광한루,
여기서 만났어요.
지금도 나는 여기 있어요.
나는 사랑하고 있는걸요.
이제는 우거진 숲에 들어도
무섭지 않아요.
햇살이 안 드는 어둔 곳이
오히려 정다워요.
풀잎에 손이 스치면
슬며시 허리께가 부끄럽기도 해요.
나는 사랑하고 있는걸요.
나는 여기 앉아 있어요,
그이는 저만치 서서 있어요.
지금도 나는 놀라워요.
그이는 나를 언제나 놀랍게 해요.
흰 돌 위 쓸리는 물에,
목욕하고 앉은 제비.
사람을 보고, 그 놀란 제비.
그것이 그이 앞의 나에요.
내 입술은 반쯤 열려 있어요.
물에 젖어서
반쯤 흔들리는 연꽃이에요.
나는 사랑하고 있는걸요.
보세요,
나는 이렇게 앉아 있는데,
저만치 서서 있는 그이.
육분당혜 신은 발은
극상세목 겹보선.
남갑사 대님에 영초단 허리띠.
가슴엔 도포 받친 흑사띠.
보세요,
세백저 상침바지.
모초단 도리낭 당팔사 중치막.
육사단 겹배자의 밀화단추.
곱게 빗어 밀기름에 잠재운 머리,
맵시 있는 궁초댕기.
내 입술은 반쯤 열려 있어요.
물에 젖어서
반쯤 흔들리는 연꽃이에요.
나는 사랑하고 있는걸요.
보세요,
선풍 어린 그 얼굴.
보세요,
무어라고요, 안 보인다고요.
저만치 서서 있는데 아무도 없다고요.
나는 앉아 있는데,
그래요,
나는 이곳에 앉아 있어요.
무어라고요, 무어라고요.
아무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앉아 있는데,
내 입술은 반쯤 열려 있어요.
물에 젖어서
반쯤 흔들리는 연꽃이에요.
나는 사랑하고 있는걸요.
그래요,
나는 이곳에 앉아 있는데.
나는 칼을 쓰고 앉아 있다고요.
칼을 쓰고, 칼을 쓰고, 칼을 쓰고.
저만치 있는 것은
목 매달아 죽은 귀신.
이곳은 광한루가 아니라고요.
지금은 궂은 비 퍼붓는
깊은 밤의 삼경이라고요.
저것은 난장 맞아 죽은 귀신,
저것은 형장 맞아 죽은 귀신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