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람은나를보고웃고 나는세상

이정석


세상 사람은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세상을 보고 웃는다

지은이:이정석

차례

글마당을 열며

마당 하나 / 역설의 사랑법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며
궁합 보지 않으려면 확실히 연애하라
첫사랑과의 해후
남존여비는 사이비
유교식 사랑법
후세교육은 궁합에서부터
가정 떠나 어디서 사랑하나
살아 있는 부처 찾은 총각
때로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효
한 세상에 친구 하나

마당 둘 / 마음으로 그리는 인생

여행하며 그린 자화상
흐르는 물에는 비춰볼 수 없는 얼굴
향기나는 인생
고기와 그물
즐기지 않는 즐거움
나 자신을 알라
꽃에서 맡는 물 향기
손톱 밑에 쌀 한 톨 못 가져가네
죽어야 할 이유

마당 셋 / 청학은 어디로 날아갔나

팔아먹은 갓
청학은 어디로 날아갔나
혼쭐난 NHK
법만 내세우는 망나니
유교에 대한 오해
다종교 사회에서 사는 지혜
종교의 노예가 되려는가
지구상 최고의 목적

마당 넷 / 흔들리는 세상 풍경

갓 쓰고 당한 봉변
배꼽티 입은 아가씨
텔레비전 씨에게 보내는 편지
최고의 투기꾼
분서갱유하고 싶은 세상의 횡설수설
체증 앓는 세상
길에서 만난 두 사람
서당에서 만난 요즘 아이들
무자식이 상팔자인가

마당 다섯 / 세계의 꽃으로 필 우리

강남 유자가 강북 가면 탱자 된다.
누가 묻거든
모든 사물은 저마다 개성이 있다
지구의 방랑자
자만심과 열등 콤플렉스
미친놈, 호로새끼, 개잡년
갓 쓴 시위대
인간시대
세계의 꽃으로 필 우리

*지은이 이정석은 낙안 읍성에서 태어났다.
이십여 년 동안 구례, 남원, 논산 등에서 한학을 수학했으며, 현재 청학동에서
훈장으로 후학 지도에 여념이 없다.
그동안 각기업체, 대학, 사회 단체에서 수십 회의 특강을 했고, 91년, 95년에는
미국에 건너가 교민들에게 강의를 통해 한민족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힘써 왔다.

글마당을 열며

그 안개가 어디서 올라오는지 궁금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스멀스멀 산자락을
타고 올라온 그 안개는 청학동을 넘어 천왕봉 쪽으로 사라지곤 했다.
언제쯤이었을까? 나는 그 안개가 올라오는 방향을 따라 내려가본 적이 있다.
가도 가도 산이었다. 나는 다시 산으로 올라왔다. 해마다 안개는 그렇게 엷은
연두빛으로 올라와서, 옴싹 청학동을 하얗게 감싸 안았다가 연보라빛이 되어
산 너머로 달아나곤 했다.
나는 어느새, 그 안개가 청학이려니 여겼다. 다시 어느 날, 나는 안개를 따라
내려갔다. 태백산맥 중턱에서 소백으로 갈라진 줄기가 좌로 휘감는 척하다가
갑자기 솟아버린 그곳에는 지리산이 있었고, 그 산이 빠져내려간 바다 쪽으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변에 앉아서, 안개는 그 강에서 올라오는 걸거라고
여겼다.
또 세월이 흘렀다. 아니었다. 안개는 강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안개는 세상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세상을 봤다. 세상도 나를 봤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참 많다. 청학동의 안개만큼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었다.
나도 그들을 보고 웃었다. 세월은 절로 흘렀고 우리의 그 웃음도 흘렀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 세월 동안 만나 세상 사람들에게 얘기를 하고 싶다. 두런두런
밤이 새도록, 청학동에 날아오던 그 뽀얀 청학의 얘기며, 초봄에는 할미꽃이 바로 서
있더라는 얘기, 달이 뜨지 않는 밤에도 달맞이 꽃이 피곤 하더라는 얘기를....
그러나 나는 안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이런 얘기들에 시큰둥하리라는 것을,
어쩌면 너무 시시해서 큰 하품과 함께 잠이 들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또 안다. 그런 얘기가 시시하게 느껴질 때, 도시의 시멘트 벽 사이에서
핏발 선 눈으로 발걸음을 재촉할 때 우리는 이미 사람 사는 얘기를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인생의 멋은 이미 신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생의 멋은 이미 어쩌면 먹거리의 맛과 같다. 맛없는 빵에서 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 없듯이, 멋이 없는 인생에서는 사는 즐거움을 찾을 수가 없다. 또 빵의
겉에 바른 설탕만으로는 진실로 그 빵을 맛있게 할 수 없듯이, 인생의 겉멋도
진실로 사는 즐거움을 주지는 못한다. 요즘 우리는 그 겉멋을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찌된 영문으로 베르디의 오페라 앞에서만 황홀한 표정이고 그 신명나는
판소리 한 판 앞에서는 그토록 무덤덤한가? 피카소 앞에서는 지그시 눈을 감는
척하면서 추사의 그 요염한 곡선은 볼 줄을 모르는가?
로스앤젤리스의 거리를 걸어보라. 수많은 민족들이 자기 민족의 멋을 내세우며
문화전쟁을 벌이고 있다. 개방된 세계 속에서 내 멋을 찾는 몸부림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 세계화란 곧 우리화 되어야 옳다. 된장 한 사발이라도 우리 것을
들고 세계무대에 나서야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멋을 가꾸는
일이라야 우리의 가치를 스스로 높이는 길이 되고 절로 사는 즐거움을 찾는
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혹자는 그렇게 묻는다. 사실,
해답은 스스로가 알고 있다.
모든 문제는 내 자신에게 달려있다. 내 자신만 책임지면 된다. 수만 년을
누려온 세상이라지만 이 세상에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태산이다. 역사에는
완성이라는 게 없다. 사람에게 완성이라는 것이 없듯이. 역사는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서 흐른다. 인생도 역시 자신을 완성해가는 과정일 것이다. 그래서 말 한
마디도 인생이요, 눈빛 하나 태도 한 가지, 보고 듣고 느끼고 사랑하고 울고
웃고가 모두 인생이다. 인생은 그저 산다는 데는 별의미가 없고 뭔가 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나는 본다. 뭔가 해야 할 인생, 완성해가야 할 인생을 포기해버린
사람들을 본다. 아니 어쩌면 팽개쳐버린 듯한 인생인지도 모른다. 안개는 해마다
청학동으로 올라왔지만 오는 걸 봤을 뿐, 가는 걸 봤을 뿐 느낄 수가 없었다.
안개는 그저 스쳐 지나갔다. 인생도 어쩌면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를 논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압구정동의 그 젊은이들
얘기를 하자거나 권력을 잡고 어쩔 줄 몰라했던 사람들의 얘기를 하자는 건
더더구나 아니다.
그저 사람 사는 얘기를 해보자. 잃어버린지도 모르고 있는 우리의 그 멋을
얘기하고 홀로 돌아누워서도 웃음이 나오는 그런 행복을 얘기해보자.
세인소아 아소세--세상 사람들은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세상을 보고
웃는다.("부응경" 중에서)
그 웃음의 뜻을 누가 알까? 청학동을 가을로 만들어 놓고 천왕봉 넘고
정령치를 비켜서 소백산맥 줄기를 따라 오르고 있을 그 안개라면 알까?
지난 여름 아빠 품에 안겨와서 한사코 내 수염을 만져보자던 세 살바기 그
소녀라면 알까?
세상 사람들아! 그 움켜쥔 주먹들을 풀자. 그 옹골찬 눈빛도 풀자. 맺힌
한이 있거든 안으로 울고 사랑할 일이 있거든 꽹과리로 울리자. 우선 나를
사랑하고 때로는 다독거리고 덮어주고, 그래서 오천 년 살아온 그 멋 따라
살자. 세상 사람들아.

청학동 가을 안개가 오던 날
훈장 이정석 배

마당 하나 / 역설의 사랑법

아무리 궁합의 중요성을 말해도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으니,
바로 확실하게 연애를 하는 것이다.
제대로 연애를 하는 쌍을
서로 기가 맞는 것이고
그것은 궁합으로도 결국 좋다는 것이다.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며

하루의 반나절이 지난 시간에, 점심을 먹고 마루에 앉아 앞산의 능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그 어떤 희열을 느끼곤 한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인생의
무동이 능선을 타고 춤을 추는 듯하고,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무궁무진으로 조화를 부리는 듯하다.
내가 앉아 있는 곳도 지리산이요, 바라보는 앞산도 지리산이니, 지리산에 안겨
지리산을 바라보는 것이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어머니를 바라보는 갓난아기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어머니의 품에 안긴 갓난아기가 너무도 자연스럽고
태연하게 어머니의 젖을 빨아대듯 나는 어느새 능선을 타고 춤을 춘다. 마음이
이미 거기에 가 덩실덩실 춤을 추니 몸도 덩달아 신명이 오른다. 자연은 진정
신이 만든 최고의 예술품이요, 최고의  가르침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능선이 갈아입는 계절의 옷을 볼라치면, 왜 그것이 최고의
예술품이요, 최고의 가르침인 줄을 안다. 사람이 감히 흉내내기에는 너무도
신묘하고 감동적이다. 어느 도공이 그와 같은 모양과 빛으로 도자기를 빚을
것이며, 어느 음악가가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을 연주할 수 있겠나. 그러니
필설로도 당연히 그것을 다 드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요즘 같은 가을의 능선은
그 자체로 인생의 교과서가 된다. 능선에 깔린 뭉게구름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나는 그 구름을 따라가다가 그만 동심에 젖어버린다. 세상에 대한 꿈만으로도
넉넉히 아름다울 수 있는 마음, 거기에 이르면 나는 구름 한 조각으로도 부러울 게
없는 부자가 된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구름 한 조각이나 풀잎 하나 만으로도
부자가 될 수 있으니 인간은 그 얼마나 축복 받은 존재인가. 아귀다툼에 찌들린
세상이라지만 때로는 별 하나만 보고도 풍요로워질 수 있으니 인간은 그 얼마나
희망적인 존재인가. 더럽혀진 정신이 판을 친다지만 문득 돌아온 동심만으로도
마음을 씻을 수 있으니 인간은 그 얼마나 깨끗한 존재인가.
자연은 그러나 부풀기만 하는 가슴에게 눈을 뜨라는 듯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자가 된 나를 가난하게 만들어 버린다. 흘러가고 흘러오는 구름 속에 능선의
풍경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그 변화를 따라가다가 나는 그만 이렇게 묻고 만다.
인간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가. 무상함에 인생이 사로잡히면 동심으로 콩다콩
뛰었던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시리도록 서늘한 바람이다. 그러나
몸을 움츠리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일상의 때로 막힌 가슴을 뚫어주곤 하니
차라리 온몸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수 있는 무상함이다. 나는 왜 살고 있는가.
왜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그토록 가슴을 앓고, 왜 누군가를 용서하려고 그토록
괴로워하고, 왜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그토록 애를 쓰는가. 다 부질없는 일이
아닌가. 아니다. 그렇게만 묻는 게 아니다.
이렇게 묻기고 한다. 무상의 바다를 떠도는 주제에 나는 왜 그리도 어리석은
나를 버리지 못했던가. 무엇 때문에 나는 그 누구를 용서하지 못했던가. 무엇
때문에 나는 그 누구를 이해하지 못했던가. 무엇 때문에 나는 그 누구를
사랑하지 못했던가.
묻고 또 묻노라면 산은 묵직한 저음으로 대답한다. 네가 바라보고 있는 산처럼
살라고, 저기 흘러가고 흘러오는 구름처럼 살라고, 저기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처럼 살라고. 그러면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옆에 있던
내 아이들은 그 고갯짓이 무슨 뜻인 줄 몰라 저희들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이들도 커서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되면 그 능선을 바라보며 그렇게 느낄
것이다.
가을의 능선은 찬바람이 불어오면 겨울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한다. 눈이
쌓이고 그 주위를 겨울새들이 간혹 날아다니며 적막을 깬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적막과 고요 속에 묻힌다. 겨울새마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면 바람이
때때로 그 적막과 고요를 깨울 뿐이다.
집 주위에 있는 대밭에서 부는 바람이 적막에 묻혀 있는 나를 깨우곤 한다.
어찌 들으면 소나기가 퍼붓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가야금과 거문고가
합주를 하는 것 같고, 또 어찌 들으면 파도가 철썩거리는 것 같기도 한 대밭의
바람 소리는 고요한 능선까지 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그 바람이 멎으면 주위는
더 깊은 적막에 휩싸인다. 적막을 깨우쳐 주기 위해 능선을 흔들어 놓고 나를
깨웠단 말인가.
고요에 묻혀 귀를 기울이노라면 바람은 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 소리가 들려온다. 헌데 그 소리는 사람의 울음과 너무도 닮았다.
적막한 자연이 안타까워서일까. 살아 있어야 할 것이 죽은 듯이 보여
슬펴져서일까. 아닐 것이다. 사람이 그저 그렇게 듣는 것뿐일 것이다.
자연은 안다. 죽은 듯이 움츠리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끝내 살아날 것임을
안다. 자연은 말한다. 늘 피어 있기만 하는 꽃은 없음을 말한다. 죽음이 있어야
새로운 삶이 있다. 적막함을 견뎌야 환희의 찬가를 부를 수 있다. 고독의
슬픔을 알아야 어울림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침묵의 무게를 알아야 말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번뇌의 고통을 겪어야 평안의 희열을 느낄 수 있다. 겨울
능선이 그렇게 말한다.
생로병사로 이어지는 인생에 어찌 고빗길이 없겠는가. 살아있는 사람의 입에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들이 수시로 튀어나온다. 한 번뿐인 인생임에도
우여곡절은 참으로 많다. 일에서 실패하면 사람의 심장은 얼어붙는다. 꽁꽁
얼어붙은 심장을 끌어안고 살아갈 의욕마저 잃어버린다. 도대체 무엇으로 산단
말인가. 그러나 겨울 능선의 풍경이 비록 적막하다 하더라도 아름다운 소리를
품고 있듯, 그렇게 얼어붙은 심장 속에는 따뜻한 피가 숨어서 흐르고 있다.
인간이 의지의 눈만 세우면 언제나 볼 수 있고, 지혜의 손만 움직이면 언제나
만질 수 있다. 의지와 지혜를 외면하면 봄을 기다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봄이
와도 봄이 온 줄을 모른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어깨에 묻은 눈을 털고 다시 봄의 옷으로 갈아입는 능선을 보라. 그것을
보노라면 싹이 트면서 내뿜는 향기가 느껴지고, 생명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오감이 다시 태어난 생명 앞에서 춤을 춘다.
우는 듯하던 계곡의 물은 덩달아 노래를 부르고, 미심쩍게 날아다니던 새들은
마음껏 지저귄다. 대지에 딛는 사람의 발걸음은 경쾌해지고, 온갖 짐승들도 날고
뛰고 어슬렁거리며 찾아온 봄을 만끽한다.
어느 시인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물었다. 그 시인은 빼앗긴 나라에도
봄이 옴을 이미 믿고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봄이 옴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좌절하고 변절하다가 그대로 죽었다. 얼어붙은 심장만 끌어안은 채
봄이 옴을 믿지 않고, 봄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겨울은 끝나지 않는다. 봄이
와도 봄이 온 줄 모르는데 어찌 겨울이 갔다고 말할 수 있겠나
봄의 능선은 생명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희망이 어떻게 사람의 가슴속으로
들어오는지, 우리 삶이 왜 기나긴 인내를 요구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근엄한
소리가 아니라 태연한, 너무도 태연한 자연의 소리로 말해 준다. 그토록이나
아름다운 옷을 입은 능선은 때가 되면 다시 옷을 갈아입는다. 역시 너무도
태연하게 몸을 바꾼다. 봄에 입은 옷이 아름답다 하여 그것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다 그대로의 아름다운 옷을 입을 수
있고, 끝내는 또 봄이 오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앉아 있는 마루는 좁지만, 거기에 앉아 능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상향의 청학동도 끝내 만들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푸른 학은 지금
어딘가에서 날고 있을 것이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우리에게로 날아올
것이다. 가슴 태우며 기다린 우리를 무색하게 만들면서 태연하게,. 태연하게
찾아오리라.

궁합 보지 않으려면 확실히 연애하라

연애지상주의자들이 득세한 세상에서 볼 수 있는 흥미로운 풍경이 하나 있다.
요즘의 젊은 부부들이 중매 결혼이냐,. 연애 결혼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보이는
반응들이다.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한 측에서는 '연애요!'라고 개선 장군처럼
당당하게 대답하면서 중매를 진화가 덜 된 사람들의 수작쯤으로 여기기도 하고,
중매를 통한 측에서는 무슨 죄라도 지은 듯이 모깃소리로 '중매요'라고
대답하면서도 묻지도 않았는데 중매 후에 사귀는 기간이 있었으니 '중매 반 연애
반'이라는 사족을 단다.
연애라는 화려한 말에 쫓겨 초라하고 불쌍해진 말 중매, 그에 못지않게 요즘
젊은이들로부터 퇴물 기생 취급을 받는 게 또 있으니 바로 궁합이다. 궁합이라는
말만 나오면 대명천지 이 문명 사회에 무슨 미신이냐며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가
하면, 심심풀이 재미로 본다며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노리개 취급을 하기 일쑤다.
그러나 궁합은 결코 서양식의 학문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말하는 미신도 아니요,
노리개 취급을 당할 만큼 하찮은 게 아니다.
학교건 직장이건 사회 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은 어떤 상대방을 만나 서로 기질이
통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느끼고, 요즘 젊은이들의 표현대로 서로 온도가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경험하게 된다. 기질이 통하고 온도가 맞으면 가까위지는 것이요,
그렇지 않을 경우는 나름대로 노력을 해 보아도 잘 가까워지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상적으로 봐서 모든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왜 어떤 사람은 절로 끌리는데 , 또 어떤 사람은 나름대로 노력을 해도
멀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만물이 그렇듯 사람에게는 생명의 근원 속에 기가 있고, 그것은 개인에 따라
다르게 드러난다. 누군가에게 끌리고 끌리지 않고 하는 것은 넓게 봐서 기의
작용이라 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서로 기가 맞지
않으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기가 어렵다. 100볼트 제품을 220볼트 전선에
연결시키면 당장 망가지듯 기가 맞지 않는 남녀는 행복하게 어울릴 수 없는
것이다.
남녀의 기가 어울리는지의 여부를 보는 것이 바로 궁합이다. 그것은 동양의
심오한 자연과학인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것으로, 서양 과학의 잣대로 함부로
난도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근래에 들어와서 서양 물리학의 최첨단 이론들이
동양의 자연과학과 사상에 근접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이 이를 웅변적으로
입증한다. 사주를 가지고 두 남녀의 기가 맞는지 여부를 보는 궁합은 신비주의도
미신도 아닌 엄연한 과학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궁합이 심오한 자연과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경험적으로 궁합을 비판하는 이들도
많다. 예를 들어 사주를 보는 어떤 사람을 찾아갔더니 하늘이 맺어 준 궁합이라
했는데, 다른 사람을 찾아가니 같은 사주를 놓고 절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말했다면 당사자는 혼란에 빠질 것이고, 당연히 사주를 바탕으로 한
궁합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일들은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요즘 세상에서
사주를 보는 사람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돌팔이들이라 할 수 있다. 음양오행의
사상과 과학은 난해하고 심오한 것으로 짧은 공부와 수도로는 그 깊이를 제대로
알아낼 수 없다. 적당히 배운 사람들이 아는 체를 하고 흉내를 낼 때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사들도 실력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력이 좀
모자라는 사람이 있고, 또 아주 돌팔이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에 완벽한 의사가 없듯 완벽하게 궁합을 볼 수 있는 사람을 찾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다. 그러나 완벽한 의사가 없다고 병원에 가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신뢰가 가는 의사를 찾아가서 자기 병을 고치면
되는 것이다. 궁합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로 생각하면 된다. 만약 어느 한
쌍의 남녀가 궁합을 보았는데 절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치자.
이들은 어찌해야 할까. 사주를 보는 몇 사람을 더 만나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이 병원에 가서 불치병 진단을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다. 불치병 진단을 받은
사람은 오진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른 병원을 찾아보지 않겠는가. 오진이 적지
않다는 게 의학계의 현실이란 말을 들었다.
그런데 다른 병원들에서도 마찬가지 진단 결과가 나온다면 그 사람은 자기 병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궁합으로 결혼 불가 판정을 받은 남녀가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같은 소리를 들었다면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갈라서야 한다.
각설하고, 아무리 궁합의 중요성을 말해도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으니, 바로 확실하게 연애를 하는 것이다.
기가 맞지 않는 쌍을 제대로 연애를 할 수 없다. 바꾸어 말하자면 제대로
연애를 하는 쌍을 서로 기가 맞는 것이고 그것은 궁합으로도 결국 좋다. 적당히
조건만 따져서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연애, 참모습을 감춘 채 상대방에게 자신의
겉모습만 서로 내보이며 적당히 만나서 적당히 즐기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겉모습만 서로 내보이며 적당히 만나서 적당히 즐기는 연애, 될대로 되라는 식의
체념 섞인 연애 등으로는 두 남녀가 진정 어울리는 한 쌍이 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다. 이런 어설픈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한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결혼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확실한 연애를 통해 기가 맞는지 여부를 볼 수 있다고도 했는데, 여기에는 숱한
문제점들이 생긴다. 바로 요즘 사회,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성적
혼란과 방종과 타락, 그로 인해 생기는 숱한 문제점들이다.
섹스는 아름답고 신성한 것이다. 그것은 삶의 소중한 보석이요, 인간이 지닌
예술성의 한 극치요, 생활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활력소다. 옛시절에도 섹스를
단순히 애를 낳기 위한 행위로 보는 선비와 섹스의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만끽하는
선비를 놓고 볼 때 뒤의 선비가  더 도가 높은 것이라 했다. 섹스를 동물
근성쯤으로 치부하는 것은 미개적 시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중한 보석은
함부로 다루는 것이 아니듯 섹스는 함부로 대하거나 조절 능력을 상실하면
인간에게 주어진 그 복을 금세 화로 바꾸어 버린다.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다루지 않는 것에 대한 응징인 셈이다.
젊은이들에게는 감정을 조절할 능력이 부족하다. 궁합을 보지 않으려면 확실히
연애하라 했지만, 그런 연애를 하다 보면 감정 조절능력이 부족한 젊은이들이
숱한 성적 문제를 만들어 사회를 타락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만든다. 정조
관념이 점점 퇴색해지고 혼전관계에 의한 낙태, 미혼모 급증, 사생아 출산 등이
뒤따르게 된다. 이런 현상들은 몇몇 개인의 불행이라는 차원을 넘어 이제는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되었다.
낙태의 문제만 보더라도 그것은 이미 전체 사회 구성원의 윤리 의식을 마비시킬
정도로 타락한 양상이 되어버렸다. 근래에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사건들을 보며
온 나라가 탄식을 했지만, 그 저변에 깔린 인명 경시 풍조를 반성하고 참회하는
모습은 희미하게만 보인다. 낙태란 엄격히 보면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골이다.
뱃속의 자식은 자식이 아닌가.
혼전 성관계를 가져야만 확실한 연애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에 따라 가정의 행복이 좌우되고, 가정의 행복이 사회 평화의 기본이
되니 서로 이성을 잃지 않고 조화롭게 어울리는 것이 확실한 연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뜨거운 연애를 하는 젊은이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현실이 말해
주고 있다.
궁합을 끝내 보지 않겠다는 사람들을 위해 편법이지만 확실한 연애가 필요함을
말했다. 그런 연애 끝에 결혼을 해서 잘산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지만, 그렇지
못했을 경우 생길 수 있는 숱한 문제들은 어떻게 할 것이다. 지혜로운 행복의
조건을 늘 염두에 두면서 연애지상주의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는다.

첫사랑과의 해후

최근에 서울에 사는 한 중년 여인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생김새도
짐작할 수 없고 목소리도 낯서니 그저 중년 여인이라고 할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을 때, 그 이름 석자가 멍해진 머릿속을 톡톡 두드렸을
때, 내 가슴은 묵직하게 밀려오는 어떤 농밀한 향기에 감싸여 버렸다. 그 중년
여인은 바로 내 첫사랑이었다.
처음으로 맺은 사랑, 첫사랑. 세상에 이보다 더 가슴 뛰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너무도 순수했기에 그 어떤 미숙함이나 부끄러움마저도 다 품어버리고
빛나는 순수함, 그것이 첫사랑이다. 끝내 맺지 못한 미완의 꿈이었기에, 다른 그
어떤 꿈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아쉬운 꿈이었기에, 가슴속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문득문득 고개를 내미는 얼굴, 그것이 첫사랑이다.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차마 꺾을 수 없는 꽃처럼 그저 향기만으로도 취하는 추억, 그것이 첫사랑이다.
한 마을에서 자란 그녀와 나는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구슬치기도 같이 하고,
온갖 장난으로 함께 웃고 울던 이웃집 소녀, 그것이 처음으로 내게 다가온 그녀의
모습이었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그 많은 놀이와 장난들 속에서 우리는 무슨
말들을 나누었을까.
철이 들면서 우리는 그 동화의 세계에서 살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순진무구했던 그 시절을 뒤로 하고 우리는 변해 갔다. 서로에게 의미있는 이성이
된 것이다. 소 닭 보듯 서로를 바라보는 그런 단순한 이성이 아니라. 상대방의
존재로 인해 가슴이 부풀고, 상대방의 부재로 인해 가슴조이는 그런 관계가 된
것이다. 그런 감정이 어떻게 싹트기 시작했을까.
갸름한 얼굴의 그녀는 선한 눈빛을 띠고 있었는데, 그 눈빛을 느끼면서 사랑의
감정이 시작된 것일까. 코 흘리던 시절에 쌓은 정이 그만 그렇게 번한 것일까.
알 수 없다. 사랑은 그렇게 알 수 없이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당시 나는 십대 중반의 나이로 객지로 다니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철저한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정규 교육을 그만두고 각지의 서당들을 찾아다니며
한문과 유학을 배운 것이다. 그녀 역시 직장을 얻어 서울에 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기껏해야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때밖에 볼 수 없었다. 명절 때 고향으로
가는 발걸음은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인해 더욱 가벼워지곤 했다. 그녀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가슴을 이미 벅차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께 고향에 와 있다
해도 사람들의 눈 때문에 마음대로 만날 처지는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그
눈빛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 속에 속절없이 밤이
지나가곤 했다.
다행히 우리 사이에는 충직한 파발꾼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녀의
남동생이었다. 나는 귀여운 그 파발꾼을 통해 그녀에게 쪽지를 전하곤 했다.
약속 시간을 주로 밤이었고 장소도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으슥한 골목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확인하는 서로의 눈빛, 그 짜릿함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런 만남이 시작될 무렵에는 주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오랫동안 기다려
온 그 시간을 가 보내곤 했다. 부끄럼 많은 어린 연인에겐 그것만으로도 벅찬
순간들이었다. 결혼이라는 말만 나와도 얼굴이 붉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주로 직장에서 일어난 일들과 느낌을 말했고, 나는 서당에서 겪었던 경험들을
들려주었다.
명절과 명절 사이의 그 긴 시간 동안에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그 편지
속에 만나서 하니 못한 말들을 적을 수 있었다. 세상을 다녀 봐도 너처럼 마음
터 놓고 얘기할 수 있는 편한 여자는 없더라, 라는 표현에서 좋아한다, 혹은
사랑한다는 표현까지 속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게 편지였다. 편지로 마음의
갈증을 달래다가 명절이 오면 우리는 다시 우리의 방식대로 남들의 눈을 피해
만날 수 있었다.
사랑이 익어갈수록 두려움도 깊어지는 것일까. 우리의 소박하고 순수한 만남을
앞날에 대한 기대와 불안으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를 따르며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나의 이상적인 여성, 이상적인
반려자가 될 수 없을 것 같다고도 했다. 비록 자주 만날 수는 없었지만 몇 해를
사귀다 보니 우리 앞에는 결혼이라는 문제가 어느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주면서 사는 게 결혼이라며 그녀를 격려해 보기도 했지만,
우리 사이에 생긴 미묘한 틈을 완전히 메울 수는 없었다. 더구나 우리에겐 보고
싶을 때, 할 말이 있을 때 언제라도 만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없었다.
이 서당에서 저 서당으로 여전히 나는 객지를 떠돌며 공부를 해야 했고, 그녀는
서울살이에 차츰 익숙해져 갔다. 그녀와 내가 함께 하지 못한 그 많은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스무 살이 넘으니 서로의 생각도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한복을 입은 나와 양장을 한 그녀는 서로 만나는 것이
어색해졌다. 물론 옷 때문만이 아니었다. 우리 사이에 파고든 미묘한 틈,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 점점 커지고 높아졌다. 사랑이 어떻게 왔는지 명확하게
말할 수 없듯 그 틈도 어떻게 생기기 시작했는지 딱 하나로 꼬집어서 얘기할 수는
없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세월이리라. 사랑을 가져다 주었다가는 시샘을 하듯
이별을 불러오고, 이별 후에는 또 추억을 새겨주는 것, 그것이 세월이 아니겠는가.
그 세월의 장단 속에서 우리는 주어진 생애를 나름대로 꾸려가는 것이다,
사랑하고 이별하고 추억하면서.
첫사랑이었던 그녀의 전화가 너무도 뜻밖이었던지라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언제 만나서 차 한 잔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만나기가 두렵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두려운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비쳐질지가 염려된다는 뜻으로
들렸다. 소중한 첫사랑의 추억이 달라진 현재의 모습 때문에 깨질지도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이었다.
어쩌면 그럴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 차 한 잔 나누었다고 첫사랑의 추억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서로의 달라진 모습을 보며 추억의 상당
부분이 손상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차라리 가슴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영원한 사랑으로 남겨두고 사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가슴에
소중히 담아둔 채 어쩌다 가끔씩 그 순수한 열정을 떠올릴 깨 첫사랑의 추억은
삶의 향기가 될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쓰라렸던 것이라 해도 추억은 우리를
좀더 아름답고 순수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러하듯.
세월은 그래서 때로는 마술사가 된다.
아내는 지금 내 옆에서 잠들어 있다. 잠에서 깨어나면 불순할 수 없는 이
첫사랑의 추억을 아내에게 들려줘도 좋으리라. 아내는 웃을까? 아니면 공연히
질투의 표정을 지을까? 아마 웃을 것이다.

남존여비는 사이비

여성상위시대라는 말을 종종 들을 수 있는데, 우스운 말이다. 뜻인즉슨
남성보다 여성이 위에 있다는 것일 텐데, 무엇으로 위에 있단 말인가. 가정이나
사회에서 권리가 더 많고 위치가 더 높다는 뜻인가. 아니면 현대에 들어와서
무슨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나 남성보다 여성이 질적으로 우수한 인간이 됐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잠꼬대 같은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단순한 잠꼬대는 물론 아닐 것이다. 상대적으로 낮았던 여성들의 지위가
높아졌다는 뜻일 것이다. 세상이 변했다는 뜻일 것이다. 여성이 남성에게
예속당했던 지난날을 남성상위시대로 보면서 그 반발 작용으로 나온 표현일
것이다. 이렇게 따져 보면 여성상위시대라는 우스운 말이 나오게끔 만든
남성상위시대라는 거만한 유물이 더 우습고 한심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누가 위에 있고 아래에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남자는
남자대로 또 여자는 여자대로 각기 특성을 살려 서로 조화를 어울리는, 세상에는
가장 아름다운 짝이 될 수 있는 그런 동반자다. 그것이 선현들의 진정한
가르침이다.
그러면 왜 이 땅에서 남성이 여성을 예속시키고 비하하는 잘못된 전통이 이어져
온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교적 전통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다. 틀린
말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덧붙일 말이 있다. 조선시대에 잘못 이해되고
편법으로 사용된 유교의 원리 때문이지 유교 그 자체가 그런 불평등을
조장했다고는 할 수 없다. 남존여비의 악습이 유교를 편법으로 이용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남자는 높은 위치에 있으니 그에 합당한 권리와 지위를
누리고, 여자는 그 아내 예속되어 순종하라 하는 것은 철저한 반상의 차이를 두어
양반 계급의 특권을 유지하려 한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식 유교의 폐해라 할 수
있다. 그 잘못된 전통이 오늘날까지 내려와 여전히 '어디 감히 여자가'식의 말을
하는 기고만장한 남자들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선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는 상하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역할 분담으로 나뉘었다. 세상에 태어나 할 일과 갖추어야 할 예의에
남녀의 구별이 생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해가 달이 될 수 없고, 달이
해가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지극히 평범한 남자와 여자의 풍경을 보자. 출산을 한 여자에게는 자식에게
젖을 풀려 영양을 고급하고 사랑을 나누어 주는 게 가장 소중한 일이 된다.
그것을 남자가 대신할 수는 없다. 하기야 소젖으로 아이를 키우는 세태니
젖병으로 남자가 먹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대들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바람직한 육아의 방법을 말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남자는 여자가 젖을 물려 아이를 기르는 동안밖에 나가서 일을 해야
한다. 이런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따지고 들어가면 남자와 여자가 할 일과
갖추어야 할 예의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조화로운 역할 분담, 그것이
남녀를 구분하는 근본적이고 유일한 이유요 기준이 된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의 뜻은 단순히 남녀가 한자리에 앉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일곱 살쯤 되면
철이 들 터이니, 남자와 여자의 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라는 가르침이다. 그 다른
격은 상하를 말하는 게 아니라 역할 분담을 이르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나란히 서거나 앉을  때의 전통 예법을 보면, 그 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예법에 따르면 남자는 여자를 왼쪽에 두고 여자는
남자를 오른쪽에 두는데 그것은 상대에 대한 최고의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습관으로 만들어진 단순한 오른쪽 혹은 왼쪽이 아니다.
동승서추라는 말이 있다. 동쪽에서 올라 서쪽으로 내려간다는 뜻인데, 태양을
비롯해 세상 만물의 움직임을 가리킨다. 승은 양의 기운이요 추는 음의
기운이다. 만물은 그렇게 음양의 조화에 의해 생성되고 변화한다. 그리고 모든
생명력은 태양 입자를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남쪽을 향해 서는 것이 원칙이다.
남쪽을 향해 섰을 때 동쪽은 왼쪽이요, 서쪽은 오른쪽이다. 그런 연유로 음의
기운을 가진 여자는 서쪽, 바로 오른쪽을 상석으로 삼고, 양의 기운을 가진 남자는
동쪽, 바로 왼쪽을 높은 자리로 여긴다. 남자끼리 앉았을 경우, 어른이 왼쪽에
앉고 여자끼리의 경우는 그 반대가 된다.
남자와 여자가 섞여 있을 때는 어떤가. 남자는 존경의 표시로 높은 자리인
왼쪽을 여자에게 내 주고, 여자 역시 존경의 표시로 오른쪽 자리를 남자에게 내
준다. 남자와 여자는 이렇게 음양의 조화로 어울리는 것이다. 상하로
구분하기는커녕 역할 분담을 하면서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다.
남존여비는 입장이나 위치가 서로 다르다는 말이지, 남자는 높으니 가치가 높고
여자는 낮으니 가치가 낮다는 말이 아니다. 가치로 보면 둘을 같은 존재다.
다만 모든 물체에 양면이 있듯이 남녀를 양면으로 볼 때 남자를 앞면 여자를
뒷면으로 질서를 구분하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과거의 지배 논리인 그 뒤틀린
사고를 허물어야 참다운 남녀 관계를 볼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남성들이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품는 헛된 우월감을 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스스로를 비하하는 열등감을 먼저 극복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보면 남존여비의 잘못된 구습만큼이나 문제가 되는 것이
있으니, 남녀의 역할 분담이 제대로 되지 않아 생기는 인간 질서와 조화의 파괴가
그것이다. 남자가 할 일을 남자가 하지 않고 여자가 할 일을 또 여자가 하지
않는 성의 왜곡이 숱한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결혼한 여성의 사회 진출이라는 문제를 보자. 언뜻 보면 그동안 소외받아 온
여성이 직업을 통해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성취욕도 느끼고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만 보면
여성의 사회 진출은 적극적으로 장려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한 것인가. 남성과 여성은 타고난 특성으로 부여받은
각각의 역할이 있다. 기본적으로 말하면 남자는 일을 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여자는 가정을 꾸려가야 하는 것이다. 가정을 꾸려가는 일은 사회의 그
어떤 다른 일보다 소중하고 우선이 되어야 한다. 남자가 밖에 나가 일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가정을 꾸려가기 위한 수단이 아닌가. 인간 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려면 이러한 기본적인 관계는 지켜져야 한다. 교묘하게 포장된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워 그것을 함부로 난도질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몸을 보면 손이 할 일이 있고 발이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순리에 의해 움직일 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눈으로 들으려 하고 귀로 보려 하면 들을 수도 없다. 여자가 제 일은
제쳐둔 채 남자 일에 매달리고 남자 도한 그렇게 여자 일에 끼어들어 역할 분담이
허물어졌을 때 가정과 사회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온갖 편법이 난무하고,
그로 인해 평화는 깨질 것이다.
기혼 여성의 사회 참여를 무조건 반대하거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라 매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가치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선후의 문제로 봐야 한다.
즉 여성의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를 알아야 한다. 여성은 직장보다는
가정에서 우선적으로 자기 역할을 해야 한다. 직장 일도 하고 가정에서도 제
역할을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항변할 이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만
된다면야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그렇지가 않다.
기혼 여성이 직업을 가졌을 경우 대개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아닌 편법 속에서
아이들은 자라고, 여인네의 손맛 대신 밥상 위에는 인스턴트 식품들이 진을 치고,
가정의 훈훈함은 안주인의 부재로 유발된 냉기에 사라진다. 필설로 그 문제점을
다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텅 빈 집에 늘 혼자 있어야 하는 아이를 상상해 보라. 특히 편법 속에서
아이들이 자란다는 것은 가장 큰 문제가 된다. 아이들은 바로 미래의 주역이요,
희망이다. 그 아이들이 제대로 잘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그 중요한 일의 상당 부분은 가정에 있는 어머니의 몫이다. 밖에서
일을 한다는 핑계를 대로 정작 해야 할 그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십원을 벌러
나갔다가 백만 원짜리 집안의 보석을 잃는 꼴과 다를 게 없다.
사회 분위기가 그런 역할 분담의 왜곡을 부추기기도 한다 가정에서 소중한 일을
하며 제 역할을 다하는 여성들 가운데도 스스로를 비하하는 이들을 가끔 보게
된다. 이웃집의 누구는 돈을 얼마나 벌고, 동창생 누구는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데, 나는 도대체 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조바심을 내는 것이다. 물질
숭배가 팽배한 세상이고 보니 만사를 돈의 척도로 바라보는 나쁜 버릇이 생겨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구분조차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의 소중한 역할을 내팽개치고 밖으로 뛰어 나가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해로 말하면 어머니의 역할, 아내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생기는 손해를 어디에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가난한 처지에서 자식을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들의 모정은
눈물겨운 것이다. 그런 어머니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남자들이 할 일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을 두고 감히 역할 분담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감히 역할 분담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빼어난
재능을 지닌 여성이 결혼 후에도 그 재능을 살려 사회에 기여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 여성이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가정을 꾸려간다면 그 또한
존경의 대상이지 결코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예외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역할 분담의 지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남존여비식의 남성 지배 논리는 가정과 사회의 건강함을 좀먹는 악습이다.
오늘날까지 여전히 남아 있는 그 잔재는 끝내 타파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성과 여성의 역할 분담이라는 조회의 성을 쌓아야 한다. 만약 세상에
남성이 혹은 여성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 보는 것조차 끔찍하지 않은가.
여성을 남성을 위해, 남성은 여성을 위해 조화의 축배를 들자.

유교식 사랑법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평생을 살다 보니 겨우
사랑이란 것을 느끼겠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온 세상을 다 뒤져보았지만 결국
사랑이란 것은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다.
사랑에 대한 이해와 느낌이 그렇게 제각각이듯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도
백가쟁명으로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내게도 사랑은 영원한 주제요 삶의 포기할
수 없는 목적이 된다. 그래서 무엇이 사랑이고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인지
하는 의문을 늘 가슴속에 품고 산다. 그러면서 가끔 떠올리는 구절이 하나 있다.

애무차등
시유친시

사랑에는 차등이 없고, 베푸는 것은 어버이로부터 시작된다는 뜻이다. 언뜻 보면
사랑은 그 대상에 따라 다를 것이라 생각되지만, 그 뿌리를 캐 들어가면 같은
것이다. 부모의 사랑도 사랑이요 이웃 혹은 연인 사이의 사랑도 사랑이다.
이웃을 사랑할 때와 연인을 사랑 할 때 그 마음의 색깔은 다를 수 있다 해도 그
근본적인 생각과 느낌은 결국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한다.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고, 이웃을 사랑할 줄 모르는 어떤 사람이 연인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은 사랑의 뿌리를 알지 못하고
그저 그 열매만을 이기적으로 따 먹으려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연인에 대한 사랑도 온전한 것이라기보다는 얄팍하고 왜곡된 욕망의 부산물일 수
있다.
흔히들 자식이나 친구 혹은 연인에게 '너만을 사랑한다'는 식의 말을 하곤 한다.
그것은 자기의 간절한 마음을 전하려는 표현으로는 감격스럽기까지 한 것이지만,
그 진정한 뜻은 '주위에서 많은 사랑을 느끼지만 특히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
되어야 사랑의 본모습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리라. 사랑에는 이렇게 차등이
없어야 그 뿌리를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베품은 어버이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역시
흘려버릴 수 없는 진실이다. 자식을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애정과 가르침을 쏟는 것, 거기서 사랑은 시작되고, 사람은 그 품안에서
최초로 사랑을 배운다.
요즘 세상을 보노라면 우리는 어쩌면 애유차등에 더 가까이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자라는 사람에게는 멸시를 보내고 넘치는 사람에게는 아첨을 하고,
힘 없는 이들을 짓밟으면서 힘 센 이들에게는 추파를 보내는 세태가 아닌가.
그런 곳에 사랑이 자리할 곳은 없다.
해외 입양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돈을 받고 외국에 입양아를 가장 많이
보내는 수치스런 국가가 바로 우리나라라는 사실은 고개를 들기도 부끄러운
일이다. 외국의 언론들은 입양아 수출로 돈을 버는 나라라고 냉소를 퍼붓는다니
참으로 안타깝고 참담한 노릇이다. 해외 입양이 그렇게 많은 것은 근본적으로
말하면 버려진 아이들이 많기 때문이지만, 현실적으로 국내 입양이 적기 때문이라
한다.
입양에 대한 여러 얘기를 듣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어쩌다 국내에서 입양을
원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지만 그들은 대부분 예쁘고 똑똑한 아이들만 찾는다고
한다. 그래서 지체장애아와 같이 몸과 마음에 상처가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해외의 양부모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
키우겠다는 것은 어쨌든 가상한 일이고, 예쁘고 똑똑한 아이만을 찾는 것 역시
사람들이 응당 보이는 태도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한 것일까.
상처를 지니고 있는 아이들을 데려가는 사람들은 예쁘고 똑똑한 아이들이 당장
품고 있기에 좋은 줄 몰라서 더 어려운 선택을 했을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리라.
그들은 차등 없는 사랑을 실천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쁘게 생겼건 밉게 생겼건,
똑똑하건 바보스럽건, 몸을 제대로 가누건 가누지 못하건 따지지 않고 그들은
사랑의 손길을 내밀고 싶었을 것이다. 오히려 베풀 것이 더 많을 수 있다는
이유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선택했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태도에 차등
없는 진정한 사랑의 실체가 배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이 바로 어짐이다.
가난하고, 외롭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어질지 못하고 베풀지 못하면 사랑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유가에서는 인을 가장 핵심적인 가치관으로 꼽아 왔다.
우리 민족은 본래 사랑의 은근함을 소중하게 품고 살아왔다. 배추속 같은
사랑이다. 잎을 하나 슬쩍 벗기면 속이 나오고, 다시 잎 하나를 벗기면 속이
나오는, 그러면서 그 속내를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그런 사랑이다.
마음의 정표가 담긴 선물을 받았을 때도 '고맙다'는 식의 표현보다는 '뭐하러
이런 걸 사왔어'라 한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그런 표현이 무슨 뜻인
줄 충분히 느낀다. 그러면서 뜸을 들여 밥을 짓듯, 사랑도 푹 뜸을 들여 익힌다.
쉽게 만나고 또 쉽게 헤어지는 요즘의 경박한 사랑 놀이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은근함이 배어 있다.
형제 혹은 친구와 나누는 애정도 은근함의 운치가 넘친다.

사상무일하야
무기상견이니
낙주금석하야
군자유연이로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몰라, 서로 볼 날이 얼마 없으니, 술로써 오늘밤 즐겨,
우리들의 잔치를 열어 보자는 내용이다. 정을 나누어도 이렇게 나눈다. 짧은
인생 속의 소중한 만남을 말하면서 은근히 애정의 필요성을 서로 나누고, 마음을
열 수 있는 술을 하나의 매개로 삼아 애정의 즐거움을 노래한다. 다른 그 어떤
목적 때문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를 나누고 싶은 마음, 그것이 사랑이다.
인생을 나누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삶, 그것은 아마 가장 행복한 삶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행복과 사랑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요, 남이 갖다 주는
것도 아니다. 사랑을 꿈꾸는 사람이 스스로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요건을 갖추려 애를 쓰는 것, 그것이 유교식의 사랑법이라 할 수 있다.
요건을 갖춘다는 것은 요령을 부린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스스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윤리를 배우고 도덕을 배우고 인간적인 도리를
배워 실행할 때 그 사람은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주머니 속의 돈이나 얼굴에 바른 분으로 사랑을 얻으려는 것은 얄팍하고
가증스러운 요령에 불과하다. 남자는 남자로서, 또 여자는 여자로서 쌓아야 할
덕목이 있다. 그 덕목을 쌓는 것이 바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요건을 갖추는
것이다. 사랑은 쉽게 맡을 수 있는 향수 냄새가 아니라 은은하게 가슴속 저 깊은
곳으로 느껴지는 꽃 향기와 같다.
유교식 사랑법이라는 제목으로 적어가다 보니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동성동본인 남녀의 결혼 문제다. 때때로 이 문제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런 결혼을 반대한다.
남녀의 윤리가 바로 가정의 윤리요, 세상의 질서는 남자와 여자의 질서와
분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질서라는 것은 나라마다 지역마다
나름대로 가꾸어 온 관습에 따라 세워진다. 관습이 오래 되면 전통이 되고, 그
전통은 곧 문화요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결혼의 근친성 여부를 따질 때 어떤
나라에서는 사촌의 범위만 넘어서면 결혼할 수 있고, 또 어떤 곳에서는 그 기준이
십촌쯤 되는 곳이 있을 것이요,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동성동본 금혼의 질서를
지켜온 곳도 있다.
물론 어떤 전통이 그릇된 것이라면 언제든지 바꾸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장점을 살려나가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동성동본을
피하는 우리의 결혼관은 유전학적으로 봐도 훌륭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가꾸어 와 미풍양속이 되었다. 관습과 전통이 무너지면 세계의 상놈이요, 종이
된다. 다른 민족의 경우를 비교할 것이 아니다.
그것을 허물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언필칭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말한다.
그러나 윤리와 질서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과연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것일까. 동성동본 금혼의 질서가 무너진 후에는 또 무슨 소리가 나올 것인가.
아마 십촌이 아니라면, 다시 육촌이 아니라면 하다가 사촌의 벽도 넘자는 주장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과연 자유요 권리인가. 물리 새는 작은 구멍을
막기 위해 더 큰 구멍을 뚫을 수 없듯이 불법을 저지른 이들을 위해 또 다른 법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만일 동성동본 금혼법이 폐지되면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15대손이니 16대손이니 하는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민족을 이어 온 그 세대
관계는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현실적으로 안타까운 남녀가 있다는 것을 안다. 이미 결혼을 했는데
동성동본이라는 이유로 법적으로 부부가 못 되고, 따라서 그들의 자식들마저
부부의 호적에 당당히 오르지 못해 여러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다. 이들을
위해서는 한시적인 특별법으로 구제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동성동본의 결혼을
전면적으로 허용함으로써 지킬수록 좋은 우리의 전통을 허물어서는 안 된다.
지킬 것은 무시하고 누릴 것만 말하는 것이 사랑은 아니다.

후세 교육은 궁합에서부터

다행스럽게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빛을 말하는 선조의 지혜들이 있으니, 태교가
그 가운데 하나다. 새로운 세대의 젊은 부모들까지 포함해 태교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부모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아이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산모를 비롯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다. 세상과의 첫 만남은 뱃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뱃속의
아기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기 위해 산모는 말과 행동에 조심하고, 먹는 음식에
유의하고, 아름다운 예술이나 풍경을 접하고, 현명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등의
노력을 한다. 참으로 가상한 모습이다.
교육을 말할 때 청소년기나 성인이 됐을 때의 교육에 앞서서 유아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유야 교육에 앞서서 태교의 영향력이 중시된다. 그러나 후세
교육을 잘하기 위해서는 태교 이전부터 정성을 쏟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부부 사이에서 생긴 자식은 태교를 받기 이전부터
이미 여러 문제를 가질 수 있다.
기가 서로 맞지 않는 부부 사이에서 좋은 후세가 태어나길 기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음식의 궁합을 예로 삼아보자. 어떤 음식들은 함께 먹으면 영양상
좋은 게 있고, 또 어떤 음식들은 결합되면 서로의 영양가를 파괴하면서 몸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도 있다. 각각의 음식은 저마다 영양분이 아주 높다 해도 잘못
결합되면, 즉 궁합이 맞지 않으면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성을 쌓을 때도 돌끼리 서로 조화롭게 어울리도록 해야 한다. 하나 하나
쌓이는 돌끼리의 궁합이 맞지 않으면 성을 얼마 가지 않아 무너진다. 둥근
장독에 궁합이 맞지 않는 네모난 뚜껑을 덮으면 어떻게 될까. 바람이 불면
덜덜거리며 흔들릴 것이고 맞지 않아서 새긴 틈새로 벌레들이 기어들어갈 것이다.
잘못 결합된 음식이 영양가를 헤치고, 잘못 결합된 돌들이 성을 무너뜨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궁합이 맞지 않는 부부 사이에 태어난 후세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문제를 안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이후도 문제는 더해진다.
궁합이 맞지 않는 부부는 심할 경우는 어느 한쪽이 죽을 수도 있고, 건강이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 성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상대방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한다. 서로 밀어내는 자력처럼 사사건건 대립을 하다가 서로를
포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곤 하는 것이다. 그런 부부 아래서 이미 문제를 안고
태어난 자식이 제대로 크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나무에 올라 고기를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기대라 할 수 있다. 음식의 궁합이나 돌의 궁합은 눈으로 보고
느끼면서 남자와 여자 양성으로 나뉜 인간의 근본적인 궁합을 외면하는 것은
참으로 딱하고 안타까운 노릇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자녀 교육열로 따지면 우리나라는 다른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부러울 게 없다.
그러나 교육열만 높다고 자랑할 것은 아니다. 치맛바람 휘날리며 자기 자식을
점수 벌레로 만들어 출세할 수 있는 대학에 보내려는 게 참다운 교육관일 수
없고, 사랑과 봉사를 외면한 채 자기 탐욕만 채우는 기능을 배우도록 유도하는
것을 또한 올바른 교육관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어떤 관점과 방법으로 교육을 시키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남녀가 궁합에 맞게
만나는 것 자체를 태교보다 앞선 후세 교육이라 하는 것은 먼저 남녀가 질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최상의 궁합 조건을 갖추어야 2세가 훌륭하게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의 장래는 아이들에게 있고 아이들의 장래는 교육에 있다 할 때,
그러한 인간의 근본을 외면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장래를 어둡게 하는 것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알려고 노력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의 전통
속에 담긴 지혜를 무조건 부정하려고 덤비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서양의
과학만을 과학이라 하고 동양의 그것을 멋대로 깔아뭉개곤 한다. 음양오행에
기초한 궁합도 마찬가지다. 그것의 중요성을 알면 후세 교육의 관점에서도
궁합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으되, 그렇지 못하면 소 귀에 경
읽는 소리밖에 되지 못한다.
궁합과 교육의 관계에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의
운명을 말한다. 운명은 운과 명이 어울려서 결정되는 것이다. 명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요지부동의 결정 요인이라면 운은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서 창조가 가능한
요인을 가리킨다. 겨울에 비닐하우스에서 채소를 기르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으로
운을 바꾼 것이라 할 수 있다. 채소의 명은 그대로 있되 운을 바꾸어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사람의 운명을 그 두 가지 요인의 상호 작용으로 변화한다. 명을 바탕으로
운을 개척해 나가는 게 사람이 할 일이다.
때때로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나 사주가 똑같은 사람은 똑같은 운명으로 사는
것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먼저 답을 말하면 결코 같을 수 없다. 비록
사주가 같더라도 환경과 부모에 따라, 그 부모들이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보고 듣고 즐겼느냐에 따라 태아가 받는 양분이나 영양 공급이
달라지기 때문에 사람의 기질의 청탁은 같을 수가 없다. 사람의 운을 개척할 수
있는 힘은 기질에 달려 있기에 기질이 혼탁한 사람은 운을 현명하게 개척 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사주가 같다 해도 기질의 청탁이 다른 한 운명은 다르게 전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태교를 비롯한 교육의 중요성이 거기서 나온다. 같은
사주를 같고 태어났다 해도 태교 및 교육에 정성을 쏟은 신사임당 같은
어머니에게서는 율곡 같은 아들이 나올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어머니에게서는
망나니가 나올 수 있다.
삼라만상은 저마다 타고나는 성격과 청탁이 있다. 바람직한 삶은 자신의 그
성격과 청탁을 알아 분수껏 사는 것이다. 명에 따라 타고 난 저마다의 소질대로
사는 삶이다. 소나무로 태어났으면 소나무로 살고 대나무로 태어났으면 대나무로
살아야 한다. 단, 후천적 노력으로 운을 바꾸어 어느 정도의 변화를 가져올 수는
있다. 명을 바로 안다는 것과 후천적 노력을 통해 운을 제대로 살려가는 일은 두
개의 수레바퀴가 되어 인간의 삶을 싣고 간다. 태교가 명의 질을 좌우하고
교육이 운의 성패를 결정한다. 궁합을 맞게 하여 후세 교육의 근본적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명의 기준에서 보는 시가이다. 태교와 교육, 그
둘의 조화는 궁합에 의해 결정되고 후세의 운명 또한 그것으로 정해진다.

가정 떠나 어디서 사랑하나

덴마크의 변화하는 풍속도를 취재한 <세계는 지금> 이라는 텔레비전 프로를 본
일이 있다. 프리섹스의 천국이라는 명예 아닌 명예를 갖고 있던 그 나라가 요즘
달라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때 그 나라의 상당수 젊은이들은 프리섹스의 마력에 빠져 있었는데, 심한
부류들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에 프리섹스의 장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남자들과 여자들이 한 공동체에 섞여 살면서 서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해 섹스를 하는데, 언제고 그 대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짝을 바꾸어
가며 빙빙 도는 춤을 추듯 공동체 안의 사람들과 사귄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하나의 쌍은 거의 없고 늘 달라지는 쌍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공동체에서 아이들도 태어나는데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단다. 참으로 해괴망측한 일이다. 헌데 그들은 한때 그런
생활을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난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까지 여겼다 한다. 그러나
요즘 그들은 달라지고 있단다. 그런 식의 삶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진정한
사랑의 기쁨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쌍을 만들어 가정으로
하나 둘 돌아간다는 것이다.
섹스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한때 여성들은 여성 해방을 외치며, 가정보다는
사회에서의 자기 일을 더욱 중요시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사회 생활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아이를 낳으려 하지도 않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동거부터 하는
것을 당연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의식도 차츰 바뀌어 요즘은 가정과 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가정을 택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단다.
사필귀정이다. 인류의 사랑은 가정에서 시작된다. 거기에 부모와 자식이 있고,
남편과 아내가 있고, 형제와 자매가 있다. 최초의 인류도 가정에서 시작되었을
것이요, 만약 최후의 순간이 온다면 그때도 인류는 가정을 품고 있을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가정을 대신할 것이 인류에게 있을까. 혼자 살 수 없는 사람에게
가정은 가장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터전이다. 특히 동양의 전통적인 대가족제도는
안정을 보장하는 최고의 보험제도라 할 수 있다. 혈연으로 맺어진 공동
운명체에서 개개 구성원은 전체 가족을 보호할 의무와 보호받을 권리를 동시에
갖는다. 그것은 계약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립되는
것이다. 이것만큼 가치 있고 효율적인 보험제도가 있을까.
역사학자 토인비가 우리의 대가족제도를 찬양한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근래에 들어와서 장점이 많은 대가족제도의 전통이 안타깝게도 점점 허물어지고
있지만 그 본래의 장점까지 잃어버리면 안된다. 사랑이 시작되는 가정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다름이 없다.
부모와 형제를 버리고 어찌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나. 부모를 모르는
사람은 사회에 나가서 선배를 모르고, 형제를 모르는 사람은 동료와 친구를 알 수
없다. 그런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사랑을 베풀 수 있단 말인가. 가정은
바로 사랑의 연습장이요 실천장이다. 가족을 통해 사랑과 봉사를 배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에 나가서 사랑과 봉사를 베풀 수 있는 것이다.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만큼
가족의 구성원들은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올바른 역할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이지 저절로 가정의 의미가 살려지는 법은 없다.
나도 아내와 자식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옛말에 자식을 낳아 놓고
올바로 가르치지 않으면 도둑을 만드는 것이라 했다. 세상 살아가는 올바른
태도와 능력이 없을 때 남의 것을 탐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사회에서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그 부모를 떠올려
볼 수밖에 없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는 욕은 바로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이다.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게 나의 자녀 교육관이다. 성장한 후에
지구 어느 곳에 던져지더라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아이들의 특성을 잘 살펴야 한다. 그걸 무시하고 일방적인 강요만
하는 것은 홀로서기를 방해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1남 3녀의 내 자식들을 보고 있노라면 형제이면서도 개성이 다 다름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아이는 학구적인 태도를 보이고, 또 어떤 아이는 그림에 흥미를 느껴
화가가 되고 싶어한다. 상대적으로 활동적인 아이도 있고 정적인 아이도 있다.
정원의 꽃들이 다 저마다 다른 모양과 향기를 갖고 있듯 아이들도 그렇다. 그
소질을 잘 살릴 수 있도록 하는 게 홀로서기 교육관의 출발인 듯싶다.
이러한 교육관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 나는 스파르타 식으로 자식들을 대한다.
사리 분별을 제대로 할 능력이 아이들에겐 부족하다. 따라서 제대로 엄격하게
가르치지 않으면 저마다 지닌 소질을 살려 줄 수 없다. 아이들은 저마다 소질을
갖고 있으되 어떻게 해야 그것을 살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가정에서는 그 일을 부모가 해야 하는데, 엄격함을 유지하지 않으면 성공적으로
그 일을 해내기 어렵게 된다.
자식들에게는 가끔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인간은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
그 자체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탄생 자체가 구원인데 길러주기까지 했으니
부모는 자식의 창조주요, 제2의 신인 것이다. 그런 부모를 어떻게 모셔야
하겠는가. 마약 부모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논리있게 말을 해라. 자식
생각이라도 옳은 부분이 있으면 들어줄 것이다. 단, 나의 인생은 나의 것이니
간섭 말라는 말은 감히 입에 담지 말아야 한다. 부모의 깨우침을 간섭으로
치부하고, 끝내 그 간섭이 싫다면 집에서 나가야 하리라.
이런 이야기가 있다. 나그네가 어느 날 낯선 지방의 여관에 묵었다. 그
여관에는 새장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안에 있는 앵무새 한 마리가 '자유, 자유'라는
소리를 반복했다. 바람처럼 떠도는 나그네는 앵무새가 얼마나 새장을 벗어나
자유롭게 날고 싶으면 저럴까 하고 생각했다. 마침내 나그네는 주인 몰래
앵무새를 하늘로 날려 모냈다. 며칠 뒤에 나그네는 그 여관으로 다시 왔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자신이 분명 날려 보낸 앵무새가 다시 새장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안에서 앵무새는 여전히 '자유, 자유'라는 소리를 반복했다.
나그네는 앵무새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앵무새에게는 새장 안이 자유의
공간일 수 있겠구나. 갈 곳 몰라 무작정 날아야 하는 새장 밖의 허공이 아니라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새장 안이 자유일 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나그네는 자유의 의미를 되짚어 보았다고 한다.
돌아와서 살고 싶은 곳으로 느꼈을  때 새장은 앵무새에게 자유다. 아직
홀로서기를 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 자식들이 자기 인생을 자기 것이라며 부모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은 새장 밖은 무조건 자유라는 식의 태도와 다를 게 없다.
제멋대로 구는 문제아들도 결국에는 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그렇게 늦게 후회하는 사람으로 자식들을 키우지 않으려면 부모는
분명하고 엄격한 태도를 잃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 몇 가지 더 있다. 그 하나가 사람은 오기와
질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에게 오기와 질투를 보이라는 말은
아니다. 진정한 오기와 질투의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부르면서, 왜 너는 말을 함부로 해서 남의 미움을 받느냐 이 못된
놈아, 왜 너는 행동을 함부로 해서 남에게 욕을 먹느냐 이 나쁜 자식아, 왜 너는
남보다 생활에서 뒤지고 왜 공부에서 뒤지느냐, 왜 행동이 바르지 못하느냐,
그러면서 어찌 사람 대접 받기를 바라느냐, 하면서 자신을 분석하고 검토하고
반분하라고 이른다.
그리고 사람은 한 가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열 가지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농부들을 보라. 추수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 전에 얼마나
많은 일을 해야 하는가. 그 많은 일들이 싫다해서 하지 않으면 곡식을 거둘 수
없다. 어디 농부들만 그런가. 세상 만사의 이치가 그렇다.
또한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밥값을 해야 함을 늘 말한다. 밥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농부들이 힘들게 농사를 지어야 곡식이 나오고, 부모들이 힘들게
일을 해서 그 곡식을 사 온다. 사 온 곡식을 또 어머니들은 온갖 정성을 다해
밥으로 짓는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자식은 밥을 먹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밥은 그렇게 소중한 것이다. 헌데 세상에는 밥값을 못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밥값도 못하는 정치가, 밥값도 못하는 지식인, 밥값도 못하는
건달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밥값을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래야 아이들이
커서도 밥값을 하는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분명한 그 이치들을 아이들 스스로 깨닫게 만들어 주는 게 보모의 의무다.
헌데 요즘 일부에서는 과보호니 하는 풍조가 있는 모양이다. 제 자식 예쁘다고
감싸고 돌면서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부모의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부모들이 있다. 그런 태도는 씨를 뿌리고 싶지 않으면 그저 놀다가
가을에 추수만 하라는 소리와 다를 게 없다.
그렇게 빗나간 부몰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빗나간 행동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다. 고기 잡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늘상 주는 고기만 받아먹고
자란 아이들은 홀로서기를 못한다. 고기 잡는 방법을 모르니 그릇된 방법으로
고기를 차지하려 하고, 거기서 온갖 문제들이 터져나온다. 올바른 가르침을
외면한 채 부모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참으로 가당찮은 일이다. 그런 부모들은
자기 자식은 물론 세상까지 망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부모들이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이 있다. 가정은 사랑의 연습장이요 실천장이지 짐승의
사육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혈연으로 맺어진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은 올바른 가르침과 효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수직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남남으로 살다가
만나 한 가정을 만든 부부는 수평적인 관계로 서로의 조화에 의해 사랑이
시작되고 또 결실을 맺는다. 부부의 사랑이 전제되지 않을 때 참다운 가족의
사랑은 기대할 수 없다. 인연이 닿지 않았으며 남남으로 살았을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된다. 참으로 오묘한 사랑의 조화가
아닌가. 그러나 외관상 부부라 하여 모두 조화 속에서 살 수는 없다. 서로
모자라는 것은 보충해 주고, 다른 것은 맞추어 가면서 살 때에야 비로소 사랑은
다가온다.
우리 부부의 만남을 떠올릴 때 나는 그 상식적인 부부관을 새삼스레 느끼곤
한다. 스물 일곱 살 때 나는 아내와 중매로 만났다.
순천의 어느 찻집에서 선을 봤는데, 처음에 우리는 서로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나만 호감을 갖지 않았다고 하면 아내가 섭섭해 하겠지만, 나중에 들어본 바로는
아내 역시 내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니 우리 둘은 다 상대방을 반려자로 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남남이 만나 첫눈에 그 모양이 되었으니 일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한쪽이라도 호감을 갖고 매달리면 그래도 가능성은 있을
터인데, 꼴이 그렇게 됐으니 우리는 깨끗하게 선을 보기 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헌데 아저씨뻘 되는 중매쟁이가 포기를 하지 않았다. 당사자들이 관심이
없다는데 중매쟁이가 그러니 우스운 노릇이지만, 우리는 웃어 넘길 수만은 없었다.
거듭되는 종용에 우리는 반강제적으로 만났다. 요즘 젊은이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그런 만남도 있는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집안 어른들의 의사로 결혼한
부부보다는 그래도 우리는 신식이었다.
어쨌든 궁합까지 봤는데 잘 어울린다고 나왔다. 그러자 문제는 중매쟁이
차원에서 벗어나 버렸다. 부모님이 결혼을 재촉하셨다. 그것은 권유보다는
강요에 가까웠다. 자식된 도리로 부모님의 뜻을 단호히 뿌리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전통 유교 집안의 방식이었다. 결혼은 당사자가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당사자간의 만남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가족과 가족이 만나고
문화와 문화가 만나 어울린다. 당시에도 나는 이런 결혼관을 가지고 있었다.
유학자 집안에서 자란 아내 역시 그런 결혼관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첫눈에 서로 관심이 없었으면서도 주변의 권유에 기대어 만남을
이어갔고, 마침내 결혼을 했다. 그것만 가지고 성급히 잘못된 결혼이라 말하는
것은 부부의 참모습을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소리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부부가 되면서 상대방의 장점을 격려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우리가 이상적인 부부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른 많은
부부들처럼 우리도 서로의 조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잘한
결혼이라고 느끼는 것은 그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부부의 사랑은 함께 살면서
조화를 위해 노력할 때 익어가는 것이다. 연애 시절 서로 죽고 못사는 사이로
있다가 결혼한 부부도 그런 노력을 게을리하면 사랑은 어느덧 미움으로 바뀌어
버린다. 근래에 이혼하는 부부가 놀랄 만큼 급증하는 현상은 대부분 거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요,
착각이다. 특히 부부 사이의 사랑이 그렇다.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고 잎이
나게 한 후 꽃이 핏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 꽃은 화려하게 폈다가 금세 지는
순간적인 정열이 아니라 세월과 함께 익어가는 은은한 향기다.
때때로 기이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후에 천당이나 극락에 가겠다고 하는
사람을 가운데 가정에 소홀하거나, 심할 경우는 아예 가정을 파괴하는 이들이
있다. 가정을 파괴하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사랑을 모독하는 짓이요, 넓게 보면
사회를 파괴하는 짓이다. 그런 자들이 천당과 극락으로 간다면 거기는 이미
천당과 극락이 아니다. 사랑이 필요한 곳은 사후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여기
인간의 땅이다. 그리고 그 지상의 사랑은 가정에서 시작된다.

살아 있는 부처 찾은 총각

더벅머리 총각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해
아침에 밥을 먹으면 저녁을 걱정해야 하고, 저녁 밥을 어찌 해결하면 다음날
아침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가난도 가난이지만 총각에게는 남에게 내세울
만한 별다른 능력이나 장점도 없어 중매를 하겠다고 나서는 이도 없고, 어쩌다
선을 보게 되어도 퇴짜를 맞는 게 일이었다.
장가도 못가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총각에게 내일은 희망이 아니라 쓸쓸한
오늘의 연장일 뿐이었다. 습관처럼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며 가난과 고독의
괴로움을 달래 보지만 허전한 가슴을 달랠 수는 없었다. 꿈을 잃는 것만큼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도 없을 터인데, 총각은 바로 그런 우울한 나날들 속에
묻혀 청춘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꽃들이 저마다 아름다운 얼굴을 세상에 내미는 어느 봄날이었다.
만물이 소생하여 생명의 향기를 내뿜고 있건만, 총각의 얼어붙은 가슴은 좀체로
녹을 줄 몰랐다. 시든 꽃잎처럼 마루에 앉은 총각은 또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한 스님이 탁발을 하기 위해 청년의 집으로 왔다.
시주할 만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쌀 한 줌을 스님에게 드렸다. 스님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돌아서서 길을 떠났다. 바랑을 등에 지고 가는 스님의 그
모습을 바라보던 총각은 가슴이 뭔가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유롭게
유유히 떠나가는 스님의 모습이 너무도 좋게 보였던 것이다. 총각은 스님이
떠나가는 모습이 너무도 좋게 보였던 것이다. 자유롭게 유유히 떠나가는 스님의
모습을 가슴에 담으며 동경하다가 또 다른 꿈을 꾸게 되었다. 스님의 모습이
저러한데 진짜 살아있는 부처를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이었다. 늘
허전했던 가슴이 뜨거워지자 총각 스스로도 놀랐다. 꼭 한 번 살아있는 부처를
만나고 싶었다.
마침내 총각은 부처를 만나 보고 싶은 희망을 품고 길을 떠났다. 어디로 가야
부처를 만날 수 있을까. 길을 떠났지만 막막했다. 몇몇 사람들에게 물어 보기도
했지만 미친놈 취급을 당한 후로는 사람들에게 다시 말을 걸 수 없었다. 답답한
심정으로 며칠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총각은 어느 날 우연히 탁발을 하러 왔던
그 스님을 다시 만났다. 합장의 예를 올린 후 총각은 스님에게 대뜸 물었다.
"스님, 어디로 가면 생불을 만날 수 있습니까?"
총각의 얼굴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스님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살아있는 부처를 만나고 싶습니까?"
"예. 부처를 만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습니다."
"일러줄 테니 잘 새겨 들으십시오. 저고리를 뒤집어 입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분을 만나면 그 분이 생불인 줄 아십시오."
"예?"
총각은 잘 납득이 가지 않아 다시 물어 보았지만, 스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던 기로 유유히 떠나갔다.
생불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치고는 좀 이상했지만 총각은 스님의 그 말밖에
의지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저고리를 뒤집어
입거나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다니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방방곡곡을 헤매며
찾아다님 세월이 어느덧 삼 년이 지났다. 지칠대로 지친 총각은 생불을 만나
보고 싶은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총각은 오랜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향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간 총각은 어머니를 불렀다. 실로 삼년 만에 만나는
어머니였기에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방문을 연 어머니는 아들을 보자마자
뛰어나왔다.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원하며 하루 하루 살아 온 어머니는
너무도 기뻐 정신없이 뒤집어 벗어 놓은 저고리를 그대로 입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채 달려와 아들을 품에 안았다. 총각은 어머니를 보는 순간 '생불이다'라고
속으로 소리쳤다. 달려오는 어머니는 스님이 일러 준 모습 그대로의 생불이었다.
그리하여 총각은 평생 홀어머니를 생불로 모시고 살았다.
이 이야기는 부모가 자식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잘 말해 준다. 부모는 제 2의
신이요, 하느님이시다. 자식에게 부모는 절대적 존재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상사나 사장을 어떻게 모시는가. 거기에도 나름대로의
정성이 깃들어 있다. 헌데 우리 사회를 보면 부모를 모시는 일이 직장에서
상사나 사장을 모시는 것보다 못한 경우가 많다. 자식의 죽음을 대신할 사람이
있다면, 자식의 출세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오로지 부모뿐이다.
지구상의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기에 부모의 은혜를 하늘과 땅처럼 가이없는
것이라 했다. 종교 속의 창조주를 숭배하면서 바로 자신을 낳아 준 제2의 신을
올바로 섬기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여기서 신을 그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무와 도리상으로 보면 부모도 부모의 도리를 다하여야 한다.
자식으로부터 50퍼센트의 호를 받고 싶으면 자식에게 100퍼센트 효를 해야 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무슨 효요, 100퍼센트는 또 뭐냐고 할 사람이 있겠으나, 그것이
자식에게 효를 깨우치는 일이다. 자식은 부모를 닮아간다. 말로만 제2의
신이라 하고 효의 중요성을 내세우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부모가 두 배의 효를
먼저 하라 함은 자식에게 효를 실천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식이 아침에 부모에게 문안 인사를 하는 경우를 보자. 효를 말할 때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자식의 도리만 강조한다. 그래서 문안 인사의 경우도 자식이
지켜야 하는 부분만 말한다. 그러나 부모가 더욱 정성을 쏟아야 한다. 자식이
인사를 하러 들어오기 전에 부모는 인사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지 않으면 자식은
효를 행할 무대를 잃게 된다.
단순히 문안 인사의 법도만 그런 게 아니다. 부모는 매사에 효를 할 수 있는
무대와 시간과 여건을 자식에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부모와 자식간에 호흡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노력을 외면하는 부모가 일방적으로 자식에게
효행을 강요하는 것은 부적용만 부를 뿐이다.
부모가 체벌을 가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 자식 내가 때리는데 거기에 무슨
법칙이 있냐고 할 사람도 있겠으나, 결코 그렇지가 않다. 때릴 수 있는, 자식의
입장으로 보면 맞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부모가 먼저 할
일이다.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고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매를 드는 것이니, 먼저 자식이
스스로의 잘못을 알게 하고 그것이 체벌을 받을 만한 짓이란 것을 느끼게 해야
한다. 그런 다음 매를 대면 본래의 효과를 달성할 수 있다. 헌데 그런 분위기
조성은 외면한 채 무작정 체벌을 가하는 부모들이 많다. 그런 경우 자식에게는
잘못에 대한 뉘우침보다는 반항심이 먼저 생긴다. 그러면 반항의 기색을 엿본
부모는 또 매질을 한다. 그것은 올바른 체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폭력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분위기 조성을 하지 않고, 즉 효의 무대를 만들어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훈육을 하려는 부모는 자식의 효를 기대할 수 없다. 요즘 세상에
효자 효녀가 별로 없다는 말은 효의 무대를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는 부모가
적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맹자의 어머니 이야기는 바로 그런 부모의 역할을 잘 말해준다. 맹자가 어렸을
때의 일이다. 이웃집에서 돼지를 잡고 있었다. 세상은 알고 싶은 것
투성이었으니 소년 맹자는 어머니에게 "왜 돼지를 잡습니까?"라 물었다.
어머니는 별 생각 없이 농담 삼아 "너 먹이려 잡는다."고 대답했다.
잠시 후 어머니는 자신의 대답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맹자에게 한 대답은
사실이 아니었다. 농담이라지만 결국 거짓말이 된 꼴이었다. 자식에게
거짓말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거짓말을 가르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생각에
으른 어머니는 돼지고기를 사 와서 맹자에게 먹였다. 자식을 제대로 기르기
위해서는 맹자의 어머니 같은 태도와 지혜를 지녀야 한다. 그래서 효는
하기보다는 받는 쪽이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신적 존재다. 그러나 부모가 부모의 도리를 못한다면 그러한
대접을 받을 수 없다. 자식에게 효를 실천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는 부모,
그들이 바로 살아 있는 부처가 아닌가.

때로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효

눈먼 아비를 위해 꽃다운 인생을 바다에 던진 심청,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이
소녀의 이야기는 어디로 가고 패륜을 저지른 망종들에 대한 우울한 소문만이
어찌하여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것일까. 신문을 펼치기가 두렵고 텔레비전을
켜기가 민망한 이 시대를 패륜의 세월이라 부를까. 온갖 문명의 쓰레기가
금수강산을 더럽히고 있듯 진정 패륜의 더러운 핏줄기 백의민족의 착한
가슴속까지 파고들어 왔단 말인가. 놀란 가슴을 쓸며 묻고 또 물어도 그저
아연할 뿐이다.
가슴앓이하는 세상, 그러나 패륜의 세월이라고는 부르지 말자, 비록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해도. 패륜의 핏줄에 이미 오염되어 있다는 말도 하지 말자, 비록 어미가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어미를 버리는 기막힌 풍경을 연속극처럼 본다 해도.
그러한 극단적인 인면수심의 이야기가 우리의 화두가 되어야 하는가. 화두라면
너무나 서글픈 화두가 아닌가. 입에 담기조차 참담한 그 소문들이 진정 우리의
현실이란 말인가. 아니, 결코 그럴 수 없다.
차마 믿고 싶지 않으니 엄연한 현실 앞에서 눈을 감아 버리자는 소리가 아니다.
자식이 부모를 때리고, 버리고, 죽이는 이야기가 일상적인 대화의 주제가 되는
그런 사회는 이미 패륜의 땅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그런 식으로, 못된 깡패 세계에서 저희들끼리나
주고받음직한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식을 피와 살이 있는
인간으로 이 지구상에 태어나게 한 이가 바로 부모요 키우고 가르쳐 세상으로
내보냄 이가 바로 부모다. 그러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보려면 우리는 미꾸라지
몇 마리가 흐려놓은 연못이 아니라 넓고 깊은 바다를 봐야 한다. 부모와 자식은
천륜으로 맺어진 관계다. 연인이나 친구 관계는 사람이 선택을 한 것이고
언제든지 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사랑과 우정을 나누다가도 어떤 연유로
시들해지면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하늘이 맺어준 관계다.
그러하기에 예로부터 우리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함께 부모에게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것, 바로 효도를 사람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가치관으로 꼽아 왔다.
헌데 그것이 사람다움의 기준마저 멋대로 왜곡시킨 현대 물질문명의 홍수 속에서
비틀리고, 깨지고, 무너져 때로는 차마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참담한 모습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면 먼저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야 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려면 먼저 부모와 자식간의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야 함은
패륜아들도 끝내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자식된 몸으로 효도를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참된 효도라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는 요즘의 세상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진정 자식된 도리일까를 밝히는 것은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청학동에 찾아오거나 객지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도 효도에 대한 의문과 고민을
품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 만난 세 젊은이와의 추억은 지금도
여전히 내 가슴속에 남아 있다.
몇 년 전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초췌한 모습의 한 청년이 나를 찾아왔다.
소위 말하는 운동권 학생이었던 그 청년은 쫓기는 몸으로 청학동을 피신처로 삼아
온 것이었다. 쫓기는 사람의 불안과 피곤이 그 얼굴에 더덕더덕 묻어 있었지만
무척 예의가 바르고 명석한 청년이었다. 우리는 밤하늘에 총총히 박혀 있는
별들을 바라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청년은 세상에 대해 할 말이
많았고, 나 역시 그 청년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밤이
깊어 마을의 불빛이 하나 둘 꺼질 무렵 그 청년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훈장님, 진정한 효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별빛으로 빛나는 그 청년의 눈에 물기가 보일 듯 말 듯 스쳐 지나갔다. 쫓기는
몸으로 낯선 마을에서 밤을 맞이한 청년은 아마 집과 가족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힘들게 눈물을 참아냈을 것이다.
길 잃은 양 같은 청년의 사연인즉슨 이랬다. 부모님과 아래로 두 여동생을
두고 있는 청년은 집안이 희망 같은 존재였다. 대학에 갓 입학할 무렵까지도
모범생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효성도 주변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지극했다고
한다. 그랬던 청년이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한 분노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혈기의 청년은 시위대에 끼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운동권 내에서도 남들의 주목들 받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청년의 변화와 함께 집안의 고요한 평화도 깨지기 시작했다. 수시로 경찰이
집으로 찾아왔고, 그 감시의 눈을 피해 청년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서도 자식 잘 되기만을 고대하며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던 부모 입장에서는 차마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부모의 그
마음고생이야말로 다 형언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부모는 눈물까지 흘리며 자식에게 지난날의 그 모범생으로 돌아오기를 간청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청년은 멍든 부모의 가슴을 느끼며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청년은 제 갈 길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부모에게 자식된 도리를 하고
싶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청년은 결코 내
부모만을 위한 왜곡된 모범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젊은 시절에 누구나 한번은 겪음직한 청년의 고뇌를 들으며 내 가슴 역시 아플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청년에게 먼저 운동권 학생들의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은 유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런 말을 했다.
"때로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효가 되기도 하지요."
부모의 말이라면 무조건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만이 효는 아니다. 물론 자식이
잘못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지만, 우리는 세상을 보다 넓게 보아야 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가치관들이 공존하고 있다. 그 가치관들이 때로는 서로 갈등을
할 때가 있다. 가족적 입장에서 본 가치와 사회적 입장에서 본 가치 역시 늘상
행복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를 위한 개인의 희생은 숭고한 가치가 된다. 나라를 빼앗겼던 시절에 온갖
고초를 겪으며 나선 독립운동가, 부하들을 위해 수류탄을 제 몸 하나로 받아낸
군인, 손에 쥘 수 있는 부귀영화를 물리치고 사회의 소금이 되는 사람들, 이 모든
이들의 희생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된다. 헌데 만약 어느 부모가 독립운동을
하려는 아들에게 그 뜻을 굽히고 빼앗긴 나라에서 적당히 우리가족만 잘살자고
한다면 어찌될 것인가. 부모가 자식에게 그런 식의 권유를 하는 것은 결코 희귀한
사례가 아니다. 만약 그런 부모의 뜻만을 좇는 것을 효라 생각한다면 그것을
잘못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효는 결코 그런 가족 이기주의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을 중심에 두는 가족주의와 자기 가족의 영화만 위하는 가족
이기주의는 결코 같을 수가 없다.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할 수 있을 때 참된
효가 된다. 효는 대의의 입장에서 봐야 그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 예로부터
선현들은 친구간에 의리를 지키지 않는 것도 불효요, 전쟁터에서 비겁하게 굴어
제 목숨만 부지하는 것도 불효요, 사회 봉사에 나서지 않고 제 이익만 좇는 것도
불효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지 않는 것도 불효라 하였다. 언뜻 보면
비겁하게라도 살아남아 제 부모 봉양하는 것이 효로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불효의 대표적인 표본일 뿐이다.
어떤 선택이 인간으로서 진정 가치 있는 희생이라면, 설사 순간적으로나마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라 하여도 넓은 의미의 효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이기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모가 아니라면 언젠가는 그러한 자식의
희생을 진정한 효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세상에서 진정 자랑스러운 사람이 왜
부모에게는 자랑스런 자식이 아니겠는가. 부모에게 자랑스런 자식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효자가 되고 효녀가 되는 길이다.
슬픈 얼굴을 하고 있던 청년은 내 말을 듣고 기운이 나는지 눈을 반짝였다.
나는 청년이 오해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몇 마디의 말을 덧붙였다. 젊은
시절에는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다. 어느 한 시기에 보고 느낀 것만 가지고
판단을 해서 자기가 가치 있는 희생을 하고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반성하고 노력하면서 자기 길을 찾아야 한다. 젊은 혈기만으로 자기를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대의가 아니고, 따라서 효도 아니라고 했다.
고맙게도 청년은 내 말의 뜻을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청년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진정한 효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가치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효의 갈등은 자식의 진로 문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최근에 한 젊은 의사를 만났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지리산을 찾아온
것이었다. 서울에 사는 그는 시간만 나면 그렇게 화구를 챙겨 들고 스케치
여행을 떠나는데, 그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고 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졌고, 예술적 취미도 자유롭게 누리고 있으니 남들에게는
행복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술을 한 잔 마신 그는 뜻밖에도
자신은 지독히도 불행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 역시 효에 대한 갈등과 후회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배부른 자의 투정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부탁을 하면서 그는 말을 시작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장래의 희망도 당연히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 장래 희망 때문에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그에게 의과대학으로 진학할
것을 권유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거침없이 미술대학을 가겠다는 말을 했다.
그때부터 부자간에는 갈등이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권유는 차츰 강권으로,
명령으로 변해 갔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대를 이으라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만약 의과대학에 가지 않으면 학비를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자식
취급도 하지 않겠다는 험한 말까지 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반강제적으로
의과대학에 진학해 의사가 되었다.
병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곧 회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환자에
대한 의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자위 등으로 스스로를
타일러 보았지만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그림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환자를
대하는 것이 점점 더 짜증스러워졌다. 의사로서의 직업 윤리를 떠올리며 자신을
채찍질해도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치솟는 어떤 응어리를 다스릴 수는 없었다.
스케치 여행을 다니면서 잃어버린 화가의 꿈을 조금씩 달래본다는 그는 여전히
잘못된 선택에 대한 후회를 곱씹으며 산다고 했다. 명령에 가까운 아버지의 뜻을
끝내 뿌리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그는 효의 허구성을
말했다. 아마도 갓을 쓰고 있는 내 입에서 효란 무조건 부모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이라는 말이 나오리라 지레 짐작한 모양이었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잘 따르는 게 효라면 직업 선택에 관한한 저도 효자인데,
제가 지금 느끼는 불행 같은 것은 효자가 감수해야 할 몫입니까?"
효에 대한 그의 기계적인 해석은 옳지 않지만 그의 항변에는 옳은 구석이 숨어
있다. 효란 부모가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할 때 그에 순종하며 자식이 자식으로서
할 도리를 하는 것을 이른다.
의사의 경우를 보면 그 부모는 자식의 재능이나 꿈에 대해 제대로 파악해
그것을 키워주는 쪽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것이 부모 된 도리가 된다.
자식의 특성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따르라 하는 부모는 그 자식에게 효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순종을 기대하는 것일 뿐이다.
만약 대학 진학을 앞둔 시점에서 그 의사를 만났다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그래서 자식의 참모습을 알게
한다면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의 선택을 존중해 줄 것이다. 만약 끝내 부모가
일방적인 강요만 한다면 그때는 자기가 선택한 길을 가라고 말이다. 최선의
설득이 전제되었다면 순종하지 않은 그 선택을 불효라 볼 수는 없다.
생각해 보자. 어떤 자식이 부모의 강요에 의해 자신의 재능이나 능력과는 다른
쪽으로 이끌려왔다. 그 결과로 그 자식은 불행 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때 그
자식은 부모에게 어떤 감정을 갖게 되겠나. 효성을 쏟고 싶은 대상이 아니라
심할 경우는 원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올바로 가르치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효지만 사리에 어긋나는 일방적인 강요를 따르지 않는다고 불효라고 지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순간적으로는 부모와의 갈등으로 괴로움을 겪더라도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잘 살려 훗날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이 참된 효가 된다.
효를 말할 때 가끔 떠오르는 청년이 한 사람 더 있다. 어느 지방 도시로
강연을 갔을 때였다.
강연을 끝내고 막 나서려는데 한 청년이 꾸벅 인사를 하더니 시간을 좀 내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청학동으로 돌아갈 차 시간이 빡빡했지만 진지해 보이는
청년의 얼굴을 외면할 수 없었다. 우리는 함께 찻집으로 들어갔다. 강연에 대한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하고 나서야 청년은 정작 하고 싶은 말을 시작했다. 그런데
청년의 첫마디부터가 충격적이었다.
"사람 같지도 않은 아버지를 둔 자식에게 효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람 같지 않다니요?"
"제 아버지가 그런 사람입니다."
청년의 말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정말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기치고
등치고 사는 게 일이요, 계집질은 밥 먹듯이 하고, 야비하기는 이를 데기 없고,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거짓말을 일삼으며, 술 마시고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등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혐오의 대상일 뿐인
아버지와는 부자간의 인연까지 끊고 싶다고 청년은 말했다.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있으나, 아버지에게 인사조차 시키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불쌍한 어머니
때문에 집을 떠나지는 못하지만 결혼을 해서는 어머니만 모시고 따로 살고 싶다는
미래 계획까지 털어놓았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라도 세상에 자식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적지 않다. 그들의 자식들은 어떻게 낳아 주고 길러 준
부모를 대해야 하는 것일까. 존경할 수 없고 때로는 혐오의 대상까지 되니,
차라리 외면하고 청년처럼 부모 자식간의 인연까지 끊어 버리려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결코 그런 태도는 옳을 수 없다. 그들에게도 정성을 다해 쏟아야 할 효가
있다. 부모의 잘못을 끝까지 막는 게, 막으려고 노력하는 게 바로 자식의
도리이고, 그것이 바로 효다. 악행을 저지르는 부모에게 저 잘난 맛에 비난만
일삼고 외면하는 것은 또 하나의 악행이 될지언정 결코 자식된 도리가 될 수는
없다.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백방의 묘책을 써서 부모가 악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가정과 사회를 밝히는 효의
아름다움이다.
물론 그러한 효를 실행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바로 제 부모를 제대로
모시는 그런 노력도 못하는 사람이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사회
정의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는 사람 가운에서도 그러한 효를 외면하는 사람들을
더러 볼 수 있다. 가정의 정의를 세우지 않고 사회 장의를 표방하는 것이 어딘지
공허하게 들리지 않겠는가.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라고 제 아버지를 표현했던 청년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효에 대한 나의 설명을 선뜻 수용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청년의 가족이 그 아버지로 인해 받았을 고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힘겨운 노력도 했을 것이었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데 어쩌란 말이냐고 청년의 침묵이 묻고 있었다. 차 시간이 촉박했지만 나는
그대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혐오스럽기까지 한 아버지에게 효를 행하는 방법을
어떤 식으로든 일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정도와 권도에 대한 설명과 그에 얽힌
중국 고사를 덧붙여 들려 주었다.
사람은 정도, 바로 정당한 도리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 정도를
세우기 위해서 권도, 즉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임기 웅변으로 취하는 방편을
써야 할 때가 있다. 권도는 어쩔 수 없는 예외적인 상황에서 사용하는 것인데,
청년의 경우를 그런 처지로 볼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정도로는 마음을
돌리기가 어려운 듯 보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고대 제국인 한의 고조 유방은 적자인 해제를 제쳐놓고 첩에게서 낳은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정도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절대 권력을 가진 유방에게 직설적으로 그 부당함을 지적할 수가
없었다. 유방의 뜻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정도로 나섰다가는 뜻을 이루기는커녕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자방을 비롯한 신하들은 고민 끝에 정도로 되지 않는 일을 권도를 써서
관철시키기로 하고 묘책을 찾았다. 당시 유방을 신분을 감추기 위해 평상복을
입고 신하들과 함께 궁 밖으로 나가 백성들의 사는 모습을 살피곤 했었다. 어느
날 유방 일행이 상산을 찾아갔다. 거기에는 네 늙은이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 늙은이들은 장자방이 미리 배치해 둔 인물들이었다. 유방이 구경 삼아
다가가자 늙은이들이 이미 약조해 둔 말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한 늙은이가 바둑 한 수를 두면 다른 늙은이가 '이 한고조같이 미련한 놈아,
여기 놔야지'하고, 또 한 수가 더해지면 '유방 같이 한심한 놈아, 저기
놔야지'하는 식으로 말을 이어갔다. 첩의 유혹에 빠져 정도를 벗어난 유방을
질책하는 말들이었다. 신하들은 유방에게 네 늙은이가 신선들인 것 같다고
고했다. 충격을 받은 유방은 오랜 고민 끝에 생각을 바꾸어 다시 적자를
후계자로 삼게 되었다. 장자방의 권도는 결국 절대권력을 가진 유방의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는 신하된 도리를 다한 것이다.
군주에게 바치는 신하된 도리가 그러할진대 어째서 부모에게 그러한 자식된
도리를 할 수 없단 말인가. 정도로 되지 않는다면 권도를 써서라도 부모의
악행을 막는 게 청년과 같은 입장에 있는 자식들의 도리요, 효다. 그 도리와 효를
세우지 않으면 가정의 평화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가정을 지키는 것이 나아가
우리라는 공동체 사회를 지키는 길이 된다. 그 청년이 지금 자기 아버지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옛말에 부모가 소금 가마를 지고 물 속으로 들어가라 해도 그에 순종하는 게
효라 했다. 자식이 바른 길로 가기를 원치 않는 부모가 없을 터이니 그러한
비유는 가슴에 깊이 새겨 두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부모의 생각을 거스르는
것이 참된 효가 될 때도 있는 것이다.

한 세상에 친구 하나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예수는 말했다. 그런
친구가 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보일까. 어떤 이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저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의심의 여지도 없다는 듯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친구가 없다고 지나치게 슬퍼할 일도 아니요, 있다고 함부로 떠들
일도 아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한 것이다. 사랑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 그것은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 허황해서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이루고 싶어 가슴속에 소중히 품고 있는 꿈 말이다.
우리는 다시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다. 서로를 알아 주면서 네 것 내 것 없이
서로 나눌 수 잇는 그런 친구가 있냐고. 참으로 고맙게도 내게는 그런 친구가
하나 있다. 죽마고우와 다름없는 박완식, 언제 불러도 좋은 그 친구의 이름이다.
지금 그 친구는 나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오래 전에 상투 대신 단발을 했고,
지금은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으며, 머지않아 대학의 교수가 될 것이다. 사는
방식은 그렇게 조금 달라졌지만 우리의 우정은 변하지 않았다.
열두 살이 되면서부터 나는 객지의 서당을 떠돌며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시절에 동문수학하는 벗으로 우리는 만났다. 스승을 찾아 서당을 찾을 때도
우리는 함께 했고, 서당마다에 새겨진 댕기머리 학생들의 즐거움과 고통도 더불어
나누었다. 우리는 그때 이런 글귀를 배웠으리라.

이문회우
이우보인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 인을 보충하라는 뜻이다. 진정한 학문과 친구의
의미를 가르쳐 준다. 우리가 꼭 그렇게 만나 사귄 듯하다. 함께 공부하며 숱한
추억을 쌓다가, 한 번은 죽음의 고비까지 함께 넘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에게서 인을 배웠다.
요즘도 만날 때면 가끔 우리는 댕기머리 그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짓는다.
지금은 어찌 그 모든 일들이 아름답게만 떠오르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조화다.
보석으로 우리 가슴에 남아 있는 추억이다. 태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어느
산골 서당에서 달을 바라보며 함께 즉흥시를 지어 읊고, 흥취를 주체할 수 없을
때는 술로 그 밤을 취하게 하곤 했었다. 그 술은 우리의 훈장님이 매실 따위의
과실로 담근 것이었는데, 그걸 몰래 마셨으니 회초리를 맞아도 한두 대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회초리 맞을 일이 어디 그것뿐이었던가.
훈장님이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고 드시는 눈깔사탕도 몰래 꺼내 먹다가 들켜
종아리를 맞고, 달달 외워야 할 것을 외우지 못했을 때는 상부상조한다고 서로
컨닝을 하다 들켜 또 피가 맺히도록 회초리 세례를 받고, 이순신이나 성춘향 같은
영화가 들어오면 훈장님을 모시고 가지만 호기심 자극하는 에로물이 들어오면
몰래 한 사람씩 가서 차례로 보고 와서 떠들고.... 그 매 다 맞았으면 아마 우리
다리는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서당이 있는 마을의 처녀를 두고 우리는 또 얼마나 장난을 했던가. 서당
친구들 가운데 하나를 잡아 거꾸로 잡아 맨 후에, 한 처녀를 무작정 지목한 후 '너
그 아가씨 좋아하지?' 라고 캐묻는다. 매달린 친구야 억울한 소리니 그렇다고 할
리가 없다. 그러나 계속 부인하면 발바닥을 사정없이 맞으니 어쩌랴. 매에 장사
없다고 매달린 친구는 숨을 헉헉거리며 좋아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 벌이 내린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동네 처녀한테나 눈길을 주고
있으니 친구로서 그냥 둘 수 있겠는가. 그러면 친구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지만 벌값으로 떡이며 과일을 사 와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나누어 먹는 그
맛을 세상 그 어는 음식에 비교할 수 있겠나.
때로는 댕기머리 총각들을 흠모하는 동네 처녀들이 호박이나 오이 같은 것들을
들고 찾아와 우리들을 싱숭생숭하게 만들기도 한다. 객지 생활이 워낙
궁핍했던지라 넙죽넙죽 잘도 받아 먹었다. 그러나 입 싹 씻고 처녀들을 고이
돌려보낼 수밖에 없다. 정말 한눈을 팔았다간 공부를 놓칠 터이고, 그래서는
서당에 있을 이유도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생각만 해도 즐거운 추억들 속에는 목숨을 잃을 뻔했던 일도 있었다. 그
친구와 함께 구례에서 공부를 할 때였다. 서당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들의 모임이
운봉에서 열린다는 전갈을 받고 우리 둘은 길을 떠났다.
구례에서 운봉까지는 150리 길이었다. 때는 음력으로 정월이었다.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우리는 호기를 부린다고 그 길을 걸어가기로 했다. 평탄한
길이었으면 호기랄 것도 없지만 그게 아니었다. 구례에서 출발해 지리산
노고단을 넘어 달궁길을 거쳐야 하는 험난한 길이었다.
아침도 먹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는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 덮인 산길을
보무도 당당하게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고단을 겨우 넘고 나서 우리는
기진맥진해질 수밖에 없었다. 호기만으로 당해낼 수 없는 게 바로 자연이었다.
노고단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이 우리를 보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만류를 하고 나섰다. 허나 이미 내친 걸음인데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우리
둘은 군인들에게 얻은 건빵으로 허기를 달래며 계속 눈 덮인 산길로 걸었다.
걸어도 고이 걸은 게 아니라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르며 걸었다.
우리의 모습이 오만하게 보였는지 마침내 자연은 참지 않았다. 내가 먼저
탈진해 눈 위에 쓰러졌다. 해가 서산으로 막 몸을 숨기려 하는 순간이었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왔다. 인가도 없는 눈덮인 산야에서 한기가 들면 목숨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친구는 나를 겨우 일으켜 부축을 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해 잠시 정신을 놓았다간 길마저 잃을 처지였다.
이번에는 나를 부축하며 힘들게 걷던 친구가 쓰러졌다. 부축하느라 그나마
남아 있던 힘을 다 써 버린 것이다. 이대로 죽는 것일까.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뺨을 때리며 흔미해진 친구를 깨웠다. 눈을 겨우 뜬 친구는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쉬었다.
차가운 달빛이 눈 위를 싸늘하게 비추었다. 친구를 어깨에 메고 걷다가 우리는
함께 나둥그러졌다. 그대로 포기하면 만사가 끝이었다. 친구를 눈 위에
굴리면서, 함께 뒤엉켜 구르면서 우리는 겨우 겨우 죽음의 산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주위는 이미 캄캄한 어둠에 감싸여 겨울밤의 정적만 감돌고 있었다.
죽음의 고비를 겨우 넘겼지만 허기 때문에 우리는 또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마침 불을 밝히고 있는 집 하나가 보였다. 사정 이야기를 들은 집주인은 감자
몇 개를 쥐어 주었다. 우리는 그것으로 허기를 달래고 운봉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어찌보면 무모한 일처럼 보이지만 당시 우리는 그런 패기를 자랑 할 나이였다.
댕기머리들이라고 서당에 앉아 글만 읽고 있는 모습만 연상한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시간만 나면 자전거 여행을 떠나곤 했다. 휴전선 코 앞에서
제주도까지 남한 땅에서 가 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도 자전거만
보면 당시의 여행에 얽힌 추억들이 되살아나곤 한다.
그리고 또 생각나는 것이 있다. 그 친구와 내가 궁핍했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칠십년대 말쯤으로 기억된다. 나는 순천의 한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친구는 합천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친구가
순천으로 나를 찾아왔다.
헌데 이를 어쩌랴. 공부를 하고 있던 그 친구뿐만 아니라 나 역시 주머니에
동전 하나 없는 무일푼이었다.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받는 학채로는 끼니도 이을
수 없는 게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멀리서 벗이 찾아왔는데 빈털터리라고
넋만 놓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유일한 나의 재산으로 자전거가 있었다. 무척 아끼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팔
수밖에 없었다. 그 돈으로 우리는 막걸리 집으로 갔다. 비록 가난한 처지였지만
우리 둘은 술을 마시며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었다.
벗과의 정겨운 술잔을 나누고도 친구가 돌아갈 여비가 남았으니 참으로 고마운
자전거였다.
한 세상 살면서 늘 가까이 하고 싶은 좋은 벗 하나 만나는 것은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복이요 행운이다. 그런 복을 누리고 사니 내 인생을
허망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으리라. 예수의 말을 다시 되새겨 본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마당 둘 / 마음으로 그리는 인생

어떤 친구가 성공의 과실을 따게 되었을 때,
당연히 친구로서 축하를 하게 된다.
하지만 돌아서면 축하를 해주는 마음 한구석에
경쟁 심리가 발동이 되어 스스로를 괴롭히게 된다.
참으로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또 하나의 얼굴이 그렇게 끝내 모습을 드러내니
이를 어쩔 것인가.
부끄러운 마음이 되어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여행하며 그린 자화상

인생 그 자체가 따지고보면 여행이겠지ㅁ, 마음에 때가 끼고 몸이 지치면 나는
훌쩍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떠나고 싶은 그곳이 어딘지 몰라도 무방하다.
여행은 미지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할 터이니 모르는 곳이 차라리 좋을 것이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명색이 한 집안의 가장이요, 또 청학동의 훈장노릇을 하는
처지라 떠나고 싶을 때 늘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회다 싶으면
떠난다. 여행의 맛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럴 것이다.
일단 떠나면 자신이 왜 떠났는지를 알게 된다. 일상을 벗어나 떠난 길에는
눈앞에 펼쳐지는 것마다에 새로움이 충만해 있고, 만나는 것마다에 희열과 감동이
담겨 있다. 사람이 이렇게 살고 있구나! 대 자연은 이리도 아름답고 경건하구나!
그러한 희열과 감동은 단순한 구경꾼의 것이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을 자극하고,
나를 바라보는 거울이 되어 준다.
일상의 삶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이 지속될 때 거기에는 갈등과 고민이
따르게 마련이다. 나 역시 훈장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소중한
만남들이겠지만, 나 역시 사람인지라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안으로 감추고
삭혀야 할 일들이 생기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할 경우도 빈번하다. 가장의
역할 역시 늘 즐거울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런 생활의 반복은 갈등과 고민을
낳고, 그것은 생체 리듬을 파괴해 버린다.
파괴된 생체  리듬은 일상의 늪에서 빠져나와 나를 돌아보는 여행을 떠날 때
비로소 조절된다. 여행이 아니어도 좋지만 내게는 여행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 마음의 때기 씻기어지니 지친 몸도 원기를 되찾게 된다. 씻긴 몸과
마음으로 나는 대자연의 온갖 에너지를 빨아들인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 한
포기도 생명의 아름다움으로 내 가슴에 내려앉고, 낯선 아이의 웃음 소리도
충만한 기쁨으로 인간 존재의 심연을 두드린다. 이 얼마나 놀라움 경험인가.
나는 대 자연 속에 있는 하나의 소립자가 되어 나를 둘러싼 그 모든 것을
만끽한다.
여행에는 그러나 걷은 여행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앉아서 하는 여행도 있다.
나는 앉아서 하는 여행도 걷은 여행 못지 않게 즐긴다. 조용한 토굴이나 산사를
찾아가, 내 몸 하나 둘 공간을 차지하고 멱을 바라보며 참선에 잠긴다. 아니, 꼭
토굴이나 산사가 아니어도 좋다. 내 몸 하나 온전히 지키고 있을 수 있는
공간이면 된다. 그렇게 앉아서 아무런 구애없이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여행을
한다. 그런 여행이 끝날 무렵이면 대개 나는 눈물을 떨구게 된다.
여행 끝의 그 눈물은 스스로를 정화시키는 눈물이요, 깨달음의 징검다리가 되어
빛나는 눈물이다. 일상의 늪에서 내가 미처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이해하게 해 준다. 스스로에게 지은 죄를
돌아보게 하고, 남들에게 끼친 죄를 참회케 한다. 감았던 눈을 뜨게 하고 닫혔던
마음을 열게 한다. 그런 후에 본 세상, 그것은 참으로 아름답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일상의 생활이 정적이었을 때는 걷는 여행을 하는 게
좋고, 그와 반대로 동적이었을 때는 앉아서 하는 여행을 즐기는 게 좋다. 사람은
앉아 있으면 서고 싶고, 서 있으면 앉고 싶은 법이다. 동과 정의 그 조화는
여행의 방법에서도 참고할 만하다. 어떠한 여행을 선택했건, 그 길에서 마주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 될 것이다. 미지의 땅을 걸으면서도, 그 새로움의 감흥에
빠지면서도 나는 늘 자화상을 그려 보게 된다.
요즘 나는 두 얼굴을 가진 자화상을 자주 그린다. 처음에 떠올린 하나의
얼굴만을 보면 제대로 그려진 것 같지가 않아 또 하나의 얼굴을 그린다. 나중에
그린 그림도 만족스런 것은 되지 못한다. 결국에는 그 두 얼굴을 합쳐 본다.
그제야 겨우 나를 닮은 얼굴이 된다. 그러나 두 얼굴이 합쳐 본다. 그제야 겨우
나를 닮은 얼굴이 된다. 그러나 두 얼굴이 합쳐진 자화상이 온전한 그림이
되겠는가. 일그러진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갈등에 빠져들곤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외자에 나가 강연도 드물지 않게 하는 편이고, 말을 듣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편이라 대중 앞에 서는 기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정성을 다해 나는 들려주고 싶은 말을 한다. 그런 순간의 내 모습은 제법
의젓하고 똑똑해 보인다. 그러나 강연을 끝내고 혼자 있을 때, 나는 영원히
공부해야 하는 학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낀다.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때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가정에서의 내 모습을 봐도 그렇다. 부부는 무촌이라 할 만큼 가까운 사이지만
아내 앞에 섰을 때의 나와 아내 뒤에 있을 때의 나는 다른 모습이 된다. 대체로
가장으로서의 권위 때문에 그런 결과가 생긴다. 나는 아내 앞에서 당당하고
떳떳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때로는 아내의 지적이 옳고 내가 그를
때도 생긴다. 아내의 지혜를 미처 알아채지 못할 때이다. 그럴 때도 나는 아내
앞에서는 당당한 얼굴을 거두지 않는다. 물론 뒤에서의 나는 자책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된다. 그때 또한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아이들을 교육할 때도 마찬가지가 된다. 앞에서 나는 엄격하고 근엄한 어른이
된다. 내가 선택한 교육의 방법을 스스로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때로 회초리를
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떨치지는 못한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게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 가지고 뭐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어른이라는
것은 성숙을 뜻하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때가 끼어 타산적이고 교활해진
존재가 아닌가. 그런 존재가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꾸짖는 게 합당한 일인가.
그런  상태가 되면 또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는 또 어떤가. 어떤 친구가 성공의 과실을 따게 되었을 때,
당연히 친구로서 축하를 하게 된다. 헌데 돌아서면 축하를 해주는 마음 한구석에
경쟁 심리가 발동이 되어 스스로를 괴롭히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또 하나의 얼굴이 그렇게 끝내 모습을 드러내니 이를 어쩔 것인가.
부끄러운 마음이 되어 다시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두 얼굴을 가진 자화상 때문에 나는 죽는 날까지 고민하고 갈등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물으며.
그러면 어떻게 그 두 얼굴을 조화시켜 하나의 얼굴을 만들 수 있을까. 아마도
사람은 자신의 두 얼굴을 하나로 조화시키는 정도에 따라 그 품격이 정해질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어찌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두 얼굴에 대한 고민과 갈등으로 괴로워도 나는 좌절하지는 않는다. 두
얼굴의 갈등 때문에 누구라도 좌절해서 주저앉을 필요는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그 갈등은 어쩌면 사람이 일생을 통해 풀어야 할 화두가 될 것이다.
성인들도 마찬가지다.
석가모니는 일생 동안 숱한 가르침의 말을 했으면서도, 자신이 말한 것은
없다고 했다. 예수는 또 어떤가.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숭고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고통이 닥쳤을 때 왜 자신을 버리는 것이냐고
하느님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성인이 보이는 두 얼굴은 범인들의 그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진리와 사랑으로 말하면 성인들은 그것들의 최고의
소유자이다. 그들의 두 얼굴은 가르침의 또 다른 표현이 되기도 한다.
속세의 인간들 역시 자신의 두 얼굴에서 오는 갈등을 스스로에 대한 가르침의
수단으로 삼으면 그 갈등은 인생을 살찌우는 영양분이 된다. 두 얼굴을 가진
자신의 자화상을 그렇게 본다면, 다른 사람의 두 얼굴도 먼저 선의를 갖고 읽어야
한다. 자기 자신은 용서하면서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것은 공평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한 일이 된다. 헌데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두 얼굴을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된다.
그러한 지혜를 갖기 위해서는 선 긍정 후 부저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얼굴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을 보는 데에는 그런 태도가
필요하다. 먼저 긍정하고 나중에 부정할 것을 부정하면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만약 부정부터 먼저 해 버리면 긍정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된다.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욕을 했다고 치자. 욕을 먹고 기분이 좋을 리는 분명
없다. 그때 상대를 부정부터 해 버리면 사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상대에게
욕이 터져 나올 것이고 다툼이 시작될 것이다. 상대 역시 마찬가지의 입장이
되어 욕은 점점 거칠어지고 다툼 역시 점점 심해질 것이다.
그러나 먼저 상대를 긍정적인 눈으로 보면 달라진다. 비록 욕을 먹었다
하더라도 상대가 욕을 할 만한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욕을 먹을 만한 요인이 분명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 상한 기분이야
어쩔 수 없지만 사태가 악화되는 것은 방지할 수 있다. 물론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 욕이라면 상대를 부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일단 긍정을 한 후에 따져
볼 일이다.
상대의 두 얼굴도 그런 태도로 봐야 한다. 그런 태도가 없으면 자신의 두
얼굴에서 오는 갈등도 인생을 살찌우는 방향으로 풀 수가 없으리라고 본다.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다짐해 보곤 한다.
여행을 떠나 두 얼굴을 가진 자화상을 뚜렷하게 보자. 그런 후에 그 두 얼굴을
하나로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자. 그것이 사람 사는 맛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자화상도 보지 못하면 희망은 없다.

흐르는 물에는 비춰볼 수 없는 얼굴

세상은 자동차 경주장으로 변해 버렸다. 요란한 굉음을 신음처럼 토해내며
경주차는 마지막으로 낼 수 있는 속력까지 다 뽑아내 아슬아슬하게 달린다.
경주장에 들어선 차가 모두 그 지경이고 보니 서로 부딪혀 나둥그러지는 게
예사요, 제 속력을 스스로 이기지 못해 저 혼자 뒤집혀 아무렇게나 처박히는 게
다반사다. 나둥그러지고 뒤집히고 처박혀 경주자는 목숨을 잃거나 회복할 수
없는 불구의 몸이 되곤 한다.
목숨을 건 경주라 하여 사람들은 또 박수를 치며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것이
경주장 안에서 누리는 단순한 즐거움으로 끝나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경주장 밖의 세상도 별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둥그러지고 뒤집히고
처박히는 순간이 올지라도 뒤쳐지는 것은 참을 수 없으니 달려야 한다.
경주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습관적으로 달린다. 자기도 모르게
엑셀러레이터를 밟은 발에 힘을 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상의 수레에서
떨어진다는 생각에 마구 달리다. 속력은 이미 무의식 속까지 침범해 들어와
의식을 지배하기도 한다. 사람은 이제 자기도 모르게 달리는 지경에 도달했다.
어디로 가기 위해 속력을 내는지도 모르고 달린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달리는 것일까. 남보다 앞서서 달려가 더 많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달리지 않으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쫓겨날까 봐? 남들이
달리는데 넋만 놓고 있을 수 없어서? 왠지 모르게 그냥 달리고 싶어서? 쫓아오는
게 뭔지 모르지만 달릴 수밖에 없어서? 사람들은 온갖 이유를 댈 것이다. 그러나
속력을 내 마구 달리기만 하다가 넘어져 큰코 다쳤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이 말한 이유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
"왜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렸을까?"
지리산 청학동으로 찾아오는 사람 가운데는 사업에 실패했거나 이혼을 했거나
하는 아픔을 지닌 이들이 더러 있다. 그들은 쉬고 싶어한다. 쉬면서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후회한다. 왜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렸는지 스스로도 모르겠다고, 그것이 잘못이었다고 뒤늦게 자신을 질책한다.
사고가 나고 문제가 터지기 전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세상만사를 제대로 보려면 상하좌우를 모두 살펴야 한다. 헌데 그걸 보지 않고
앞만 보고 내달리니 어떻게 문제가 생기지 않겠는가. 밥을 지으려면 뜸들일
시간이 필요하고, 뜸들인 밥도 적절히 쉬어가며 먹어야 한다. 빨리 먹으면 체하는
법이다. 헌데 체하건 말건 상관없다는 듯 쉴새없이 숟가락질을 해대는 게 바로
요즘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이다.
흐르는 물에는 얼굴을 비춰볼 수 없다. 그런 물에 한 번 얼굴을 내밀어 보라.
찌그러지고 흔들리는 이상한 모양만 보일 것이다. 그것은 본래의 자기 얼굴이
아니다. 그것을 두고 자기 얼굴이라며 세상에 내밀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처구니없게도 그렇게 살고 있다. 상하좌우를 살피지
않고 앞만 보고 내달리는 사람은 자기의 얼굴, 그 본 모습을 보지 못한다.
자기 얼굴을 보려면 움직이지 않는 맑은 물에 비춰봐야 한다. 명경지수라는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하면 맑은 거울과 움직이지 않는 물이라는 뜻이다.
명경지수의 경지에 도달했다 함은, 잡념이나 가식 혹은 허욕을 떠난 맑고 잔잔한
마음에 이르렀다는 뜻이 된다.
중국의 고전인 "장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왕태라는 사람이 있는데
뛰어난 학문과 높은 덕망으로 소문이 자자해 많은 제자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
들었다. 이에 시기심이 발동한 공자의 제자 상계가 어느날 스승인 공자에게
물었다.
"저 왕태인가 하는 작자는 특별히 잘난 구석도 없는 것 같은데 왜 제자가
되겠다고 모여드는 이들이 그렇게 많을까요? 스승님께서는 왕태라는 자에 대해
알고 계신 게 있습니까?"
왕태가 훌륭한 인물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공자는 제자에게 어째서 사람들이
왕태를 존경하고 동경하는지를 대개 이런 요지로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어른을 동경하는 것은 어떤 일을 당하거나 보았을 때 추호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보통 자기 모습을
물에 비춰보려 할 경우, 고여서 움직이지 않는 맑은 물을 거울로 삼을 것이다. 제
모습을 바로 보려면 그러한 물을 찾듯 사람들은 그 어른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찾게 마련이다.
흔들리는 마음은 사람의 올바른 사표가 되지 못하고, 흐르는 물은 사람의 본
얼굴을 비춰주는 거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앞만 보고 달리기에 바쁜
현대인들은 자신의 본 모습을 보려 하지 않고 세상만사의 상하좌우를 살피려고도
하지 않는다.
때로는 흐르는 물에 나타난 달라진 얼굴을 자기 얼굴이라 우기는 사람도 있다.
앞만 보고 달리다가 못된 짓을 저지른 사람에게 '너 본래 그런 사람 아니잖아'라고
주위에서 말하면, 맹목적인 자신의 질주를 방해하지 말라는 듯 '웃기지마. 나 그런
사람이야'라며 눈을 부라리는 사람이다.
왜 이렇게 앞만 보고 미친 듯이 달리는 세상이 되었을까. 본래 우리 민족은
여유롭고 넉넉한 심성을 지녔었다. 헌데 '빨리! 빨리!'라는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의 조급증은 이미 외국인들의 조롱거리가 되어버렸다. '대충! 대충!'까지
거기에 더해져, 그 참담한 결과물들을 하루가 멀다하고 보게 된다.
거대한 다리가 폭삭 주저앉는가 하면 번지르르한 백화점이 어느날 갑자기
땅으로 푹 꺼지고, 잠깐 사이에 신도시 몇 개를 뚝딱 만들어 놓고는 부실이
걱정되어 밤잠을 설친다. 늘상 터지는 사고를 당할까 봐 집 밖으로 나가기가
두렵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붕괴가 두려워 집에 있을 수 없다는 아우성도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안팎이 이 모양이라 어디도 마음 편한 곳이 없다니 도대체
이따위 세상을 두고 사람 사는 곳이라 할 수 있겠나.
'빨리! 빨리!'와 '대충! 대층!'의 합작품은 비단 건설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
전체가 그것으로 인해 중병을 앓고 있다.
자동차를 타고 도로에 나가 보면 정상적인 사람도 마음의 고요를 유지하지
못한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저마다 앞서 가겠다고 경적을 울려대며 달린다.
남을 위한 양보는 어쩌다 보는 신기한 모습이고, 끼어들기에 차선 위반에 중앙선
침범까지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을 다 동원해서 앞서서 가려고 몸부림을 한다.
그래서 교통사고율도 세계 정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편리하다는 지하철에서도 똑같은 모습을 보게 된다. 어쩌다 서울에 가서 머물
경우 나는 대개 편리한 지하철을 이용한다. 어느 날 전동차에서 내려 막 출구로
향할 때였다. 앞선 사람들이 남녀를 가릴 것 없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계단
위로 뛰어 올라갔다. 나는 무슨 급박한 일이라도 벌어진 줄 알았다. 헌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모두 저마다 먼저 출구를 빠져나가려고 그
모양이었다.
버스 정류장의 풍경도 다름이 없다. 어쩌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기분좋게 볼 수 있지만, 그 가운데 어떤 줄은 버스가 오기가 무섭게 흐트러진다.
그 다음 풍경은 뻔하다. 서로 먼저 타겠다고 어깨 싸움을 하며 소란을 떤다.
앞서 있던 노인네도 젊은것들의 어깨에 밀려난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묻고 싶었다. 무엇이 그렇게 바쁘냐고, 혹시 부모님이 위독하다는
전갈이라도 받았냐고. 그러나 용을 쓰고 앞서서 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붙잡아
물어 불 수 있겠나.
길에서 볼 수 있는 이 기막힌 풍경은 요즘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바탕을 들여다보면 왜곡된 경쟁을 유도하는
사회 분위기가 깔려 있음을 알게 된다.
사회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능력과  노력이 앞서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앞서게 마련이다. 그러나 경쟁은 공정하고 선의에 의해 이루어질 때
모든 사람이 승복하고, 그 사회는 평온을 유지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경쟁보다는 불공정하고 악의에 찬 것을 더 많이 경험하며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보다 앞서려는 의식 속에
빠져버렸다. 순리에 의한 발전이 무시당하고 보니, 이득이 있는 회전의자에 먼저
앉으면 주인이요,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노래나 부른다.
왜곡된 경쟁에서 조금 앞선 자는 기고만장해지고 한 발 늦은 사람은 살 맛을
잃어버린다. 이런 풍토도 사람들을 앞만 보고 달리는 습성에 빠지게 했다.
욕망에 눈이 멀면 상하좌우는 커녕 눈앞에 있는 것도 제대로 볼 수 없다.
사기꾼의 농간에 속에 사업에 실패한 한 중년의 남자가 있다. 그는 실패한 후에
지난 일을 다시 돌아보니 참으로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했다. 자신이 조금만 더
냉정했어도 사기꾼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단다.
허나 실패한 후에 찬찬히 돌아보니 그렇다는 것이지 사업 확장에만 매달렸던
당시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사기꾼이 던진 미끼는 달콤한 유혹이 되어 그를
앞만 보며 달리게 만든 것이다.
주변에 진정한 친구가 없다는 한 남자의 쓸쓸한 고백도 떠오른다. 그는 결혼
직후 악착같이 돈을 모아 잘살아 보자고 아내와 약조를 했단다. 두 사람이 정한
목표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주변의 욕을 먹더라도 뒤도 돌아보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목표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모조리 외면했다. 친구도 가족도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 함께 어울리자는 제의를 받아도 시간이 아까워 거절했고, 돈을
빌려 달라는 소리에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 자신들의 목표에 도달하면 그때 주위와도 어울릴 생각이었다. 그야말로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 십 년이 되었다. 그들 부부는 목표했던 바를 어느 정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주위에는 이미 친구도 가족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날 갑자기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남자는 지난 세월을 후회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앞만
보고 달려왔던가.
요즘 세상은 사람을 자동차 경주장 같은 곳으로 내몬다.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마구 달린다. 때로는 자기가 진정 왜 달리는지도 모르고 달린다.
그러다 넘어진 사람들이 곳곳에서 비명을 지른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쉬어 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쉬면서 왜 달리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살펴야 한다. 쉬지 않고 흐르는 물에는 얼굴을 비춰볼 수 없다.
움직이지 않는 맑은 물에 얼굴을 비춰보면서 자기가 누군지,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살 때 우리는 행복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향기나는 인생

사람에게는 사람임을 느끼게 하는 향기가 있다.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사람이 있다. 사람 향기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멀리 있어도 늘 그리운
사람이 있다. 사람의 향기를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반면에 마주할 때면 고약한
냄새가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그가 아무리 비싼 향수를 몸에 뿌렸다 해도 코를
감싸쥘 수밖에 없다. 사람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멀리 있을수록
좋은 사람이 있다. 고약한 냄새를 맡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왜 어떤 사람을 만나면 향기가 느껴져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그저 무덤덤하고,
또 어떤 사람은 고약한 냄새가 나 불행할까. 사람의 향기라는 것은 형식적으로
몸에 뿌리는 향수가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너나없이 향수를 뿌려댈 것이다.
향기나는 사람이 되고픈 것은 모든 이들의 꿈이니까.
그러나 돈이 많다고 향기가 나는 것도 아니요, 머릿속에 지식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향기가 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외모가 출중하다고 향기가 나는 것도
아니요, 힘이 세다고 향기가 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잘못
이용되었을 때 악취를 풍기는 요인이 될 뿐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향기를 낼까. 다른 것이 없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도리를
다할 때, 도리를 다하기 위해 노력할 때, 거기서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왠지
모르게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람이 있다. 왠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이유는 딱 하나, 인간적인 도리에 충실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은 그것을 다시 사회로 돌려줄 생각을 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적인
도리이고, 바로 사람의 향기가 된다. 주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향기로운
사람이다. 결초보은, 죽어 혼령이 되어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다는 이 말의
유래는 이렇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에 위무자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아들인 과에게 유언을 했다. 자기가 죽으면 자기의 애첩을 개가시키라는
것이었다. 헌데 노망이 든 위무자는 곧 그 말을 번복하고 애첩을 자기와 함께
순장시키라는 말을 아들에게 남겼다. 부모의 유언은 지엄한 것인지라 아들 과는
따라야 했다. 그러나 개가와 순장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아들은 개가를 시키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노망이 든 상태에서 순장을
말했으니 첫 번째 유언을 중시한 것이다. 물론 아버지의 애첩에 대한 인간적인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사람을 생매장하는 것보다 개가를 시키는 것이 인간적인
도리에도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 과의 결정으로 위무자의 애첩은 개가를
했다.
세월이 얼마간 흘렀다. 때는 나라마다 싸움이 빈번할 때였다. 진나라에
두회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그의 군사와 위무자의 아들 과의 군사가 서로 싸우게
되었다. 두회에게 쫓기게 된 과는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헌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사기충천한 두회의 군사들이 말을 달려 과를
쫓다가 모두 쓰러졌다. 풀이 묶여져 있는 길을 달리다가 모두 그 묶여진 풀에
걸려 넘어진 것이었다. 위무자의 애첩이었던 여인의 아버지는 이미 저승
사람이었는데, 그 혼령이 나타나 풀을 그렇게 묶어둔 것이다. 풀을 묶어, 즉
결초하여 보은한 것이다.
혼령은 자기 딸을 순장시키지 않고 개가를 할 수 있도록 한 과에게 크나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고, 그 보답을 한 것이다.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물론이요, 죽어서도 은혜를 잊지 않는 보은의 태도가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인간적인 도리요, 여기서 사람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우리 사회에도 입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베풀며 사는 사람이 있다. 주는
즐거움을 즐기며 사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보면 향기가 느껴진다. 탐욕과
위선의 향수로 자신을 치장하는 무리들에게선 결코 맡을 수 없는 향기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올바른 도리, 바로 의리를 지키는 사람은 또 얼마나
향기로운 존재인가. 의리를 모르는 사람과는 한순간도 함께 있고 싶지가 않다.
향기는커녕 고약한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의리에는 친구나 동료간의 의리도
있고, 상하간의 의리도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예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백의 신하였는데, 지백은
적국의 조양자에게 죽임을 당했다. 예량은 원수를 갚기 위해 조양자의 나라로
갔다. 그러나 조양자가 있는 궁중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어 궁리를 하다가 스스로
죄인이 되었다. 죄인이 되면 궁중의 온갖 궂은 일을 하는 의무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궁중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라는 노역이 주어졌다. 예량은
조양자와 마주칠 기회만 엿보며 가슴 조이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조양자의
신하들이 먼저 예량의 계책을 눈치채고 잡아들였다. 예량은 죽음의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조양자는 예량을 죽여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백이 죽은 후로 멸족을 당해 그 대마저 끊어졌는데, 그 신하가 원수를 갚겠다고
나선 것을 가상하게 여긴 것이다. 일단 풀려난 예량은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온몸에 옻칠을 해 문둥이의 모습으로 본 모습을 감추었다. 그의
아내조차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완벽한 변장이었다. 그런 꼴로 시장을
돌아다니면 빌어먹는 거지 노릇을 했다. 조양자가 궁중에서 나와 행차할 때를
기다리며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보기가 딱했는지 한 친구가 예량에게 이렇게 권유했다.
"자네 같은 재주로 차라리 조양자를 섬기면 얼마 가지 않아 총애를 받을 수
있다. 먼저 그렇게 총애를 받은 후에 방심한 틈을 타 죽이면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을 쉽게 할 수 있지 않은가."
친구의 말을 듣고 예량은 고개를 저으며 이런 말을 남겼다.
"들어보게. 내가 한 번 무릎을 꿇고 조양자를 섬기는 신하가 되고, 틈을 내
다시 그 자를 죽인다면 이는 두 마음이 아닌가. 그런 비열한 짓을 인간으로서 할
수는 없네."
비열한 짓을 거부한 예량은 끝내 원수를 갚지 못했다. 조양자가 지나는 길의
다리 밑에서 잠복해 있다가 조양자의 신하들에게 다시 잡혀 목숨을 잃었다.
예량이 신하로서 원수를 갚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 것도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도 그는 의리를 아는 사람이었다. 두 마음을 갖는
비열한 방법으로 원수를 갚는 것 역시 의리에서 벗어난 짓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참된 의리를 지키기 위해 그는 목숨을 버린 것이다.
의리라 하면 사람들은 흔히 주먹 세계의 의리를 떠올리는데, 자기편의 이익을
위해 상대편에게 온갖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는 자들은 의리를 알지 못하는
망나니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자기편끼리는 의리가 있는 짓이라고 서로
추켜세우니 소인배라 아니할 수 없다. 주먹 세계만 그런 게 아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저없이 마음을 바꾸어 도리에 벗어난 짓을 일삼는 이들이 많은
사회, 그 얼마나 비열하고 악취가 풍기는 사회인가. 우리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향기나는 사람들의 땅에 있는 것인가.
그에 답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으로 나눔의 도리가 존중되느냐, 그렇지 않으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탐욕스런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면, 결코 향기로운
사회라 할 수 없다.
중국 송나라에 범문정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매사에
성실했던 그는 부재상의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함께 고생하며
살았던 그의 아내와 어머니가 유명을 다리하고 있었다.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는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가난할 적에 너희들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많은 고생을 하셨다. 할머니께
음식도 변변히 올릴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녹을 얻고 사니 여유가
생겼다만, 어머니와 할머니는 이미 계시지 않으니 무엇을 대접해 올릴 상황이 못
되는구나. 그렇다고 어찌 우리들만 최고의 복락을 누리겠는가.
지금 이 고을에는 많은 우리의 동족들이 살고 있다. 그 동족들은 촌수가 멀고
가까운 친소가 있겠지만, 먼 조상들의 눈으로 보면 다 똑같은 자손들이다. 친소가
따로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만이 부재상에게 주어진 풍요를 누릴 수
있겠느냐. 부재상이 된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음덕의 결과이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풍요를 내 것이라고 우리끼리만 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범문정공은 부재상으로 받는 녹을 마을 사람들과 나눈 것은 물론이요,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집과 밭을 마련해 차별없는 풍요를 누렸다
한다. 나눔의 인간적 도리를 실천하는 사람, 참으로 향기로운 사람이다.
천진스런 한 농부가 살고 있었다. 추운 겨울날에 농부는 짚무덤에 앉아서
따뜻한 햇볕을 쬐었다. 등이 따뜻해졌다. 그 따뜻함에 행복을 느낀 농부는
누군가와 그 행복을 나누고 싶어 함께 즐길 사람을 찾았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혹시 따뜻한 햇볕을 혼자 즐기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 나아가 남이 그 즐거움을 알아챌까봐 조바심을 내며
혼자만 즐기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람은 누구나 가슴에 향기를 품고 태어났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향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향기는 저절로 맡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가슴을 열고 사람다운 도리를 다할 때 비로소 맡을 수 있다. 향기로운
사람, 함께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멀리 있으면 늘 그리운 사람, 이
얼마나 축복받은 인생인가. 나는 오늘도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자신이 향기나는 인생이 되어야 할 터인데, 그것이 또한 늘 삶의
과제가 된다.

고기와 그물

고기잡이 나가려는 한 어부가 정성스레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이방인이
지나가다가 어부를 보고 멈춰서서 한참이나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철학가라도 된 양 심각한 표정이 되어 뜬금없이 어부에게 물었다. 고기가
중요합니까, 그물이 중요합니까?
어부는 이방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웃음이 나왔지만, 차마 웃을 수는 없었다.
대답을 재촉하듯 바라보는 이방인에게 어부는 물론 고기가 중요하지요, 라고
대답했다. 삼척동자라도 그걸 모르겠느냐는 어부의 표정에 이방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다시 물었다. 고기는 바다에 얼마든지 있는 것이고,
어부에게 그물이 없으면 고기를 잡지 못하는데, 그래도 고기가 더 중요합니까?
들어보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라 어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물이 더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헌데 어부의 고갯짓을 그물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이방인이 또 물었다. 그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바꾸신
모양인데, 고기가 없으면 그물이 무슨 소용이지요?
그물을 손질하던 손을 멈추고 어부는 이방인을 바라봤다. 철없는 어린애 같은
질문을 하면서도 이방인의 표정은 세상 고민 다 끌어안고 있는 듯 보였다.
어부는 물론 그렇지요,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진지한 이방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자 이방인은 시비를 걸듯 또 물었다. 무엇이 그렇다는 말씀이십니까?
고기와 그물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따지듯 물어오니 어부의 기분도
약간 상했다. 그러나 되도록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결국 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이 있는 것이니 고기가 중요한 것이고, 그물이 없으면 고기를 잡지 못하니
그물 또한 중요한 것이라고. 헌데 그 대답은 어느 하나의 선택을 요구하는
이방인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방인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제 가던 길로 갔다.
나 역시 종종 어부의 처지가 되어 이방인식의 질문을 받곤 한다. 저울로 달아
봐서 고기와 그물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는 물음들이다. 나는 어부처럼
먼저 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이 있는 것이니 고기가 더 중요한 것이라 답한다.
세상에는 고기가 더 중요한 것임을 잊고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수단과 목적을
가리지 못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학문이나 종교 등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면
인생을 깨우치고, 그 깨우친 것으로 보다 나은 삶을 이끌어간다. 학문이나 종교는
깨우치는 수단이요, 보다 나은 삶이 그 목적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수단은 보다
나은 삶을 낚을 수 있는 그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깨우침의 고기는 그
중요성이 덜해지고 수단의 그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깨우침의 고기는 그
중요성이 덜해지고 수단의 그물이 무기가 되어 세상을 혼미케 하곤 한다.
학문을 보면, 이제 그것은 깨우침의 수단이 아니라 출세와 부귀와 생활의
수단이 되었다. 중요한 목적은 사라져 버리고 수단이 제멋대로 놀아나면서
목적이랄 수 없는 목적을 만든 것이다. 목적이 뒤틀려 있으니 배우는 방법도
올바를 리가 없다.
우리는 진리를 문자로 표기해서 배우는 부분이 많다. 여기서 문자는 수단, 바로
그물이요 문자가 품고 있는 진리가 목적, 바로 고기가 된다. 헌데 문자는 제법
외우면서 그 진정한 알맹이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꽃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은 그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느끼지 못할 때 피상적인 문자에 불과하게 된다.
꽃을 보면 아름다움을 배우고, 돌을 보면 무거움을 배우고, 아이를 보면 사랑을
배우고, 어른을 보면 존경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참다운 배움의 방법이다. 높은
산을 보고 그 기상을 배우지 못하면, 그것은 피상의 앎은 될지언정 진정한
깨달음은 되지 못한다. 문자만으로 꽃이 어떻다는 말을 아무리 해봐야, 거기서
아름다움을 배우지 못하면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배움과 생활은 결합되어 있는 것이요, 우리는 대자연을 스승으로 삼아 깨우쳐야
한다. 공자 역시 스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대자연이 스승이라 했다.
책으로만, 글자로만 배우는 것은 실체를 잃어버린 배움일 뿐이다. 마호메트가
말하길 탐구하는 학자의 잉크는 피보다 강하다고 했다. 피보다 강한 탐구는
수단인 문자 그 자체에 머물러 있는 것일 수 없다. 탐구의 목적인 깨우침을 얻을
때 비로소 그 잉크는 피보다 강한 것이 된다.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 읽은 책의 줄거리를 말하라면 줄줄 읊으면서도, 거기에
담긴 뜻과 정신을 말하라면 쭈뼛거리다가 입을 다무는 이들이 많다. 그저
줄거리를 아는 것만으로 공부를 했다 하고, 그런 껍데기로 시험과 경쟁에서
이기면 그만이라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사회가 그러한 젊은이들의 그릇된 태도를 조장했다고 할 수 있다. 인간
교육보다는 밥벌이 수단을 가르치는 교육에 치중하고, 성공의 잣대를 인간적인
성숙도에 두지 않고 물질에 바탕을 둔 실용성과 기능적인 가치에 두어 무엇이
목적이고 중요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게 만들었다. 고기의 중요성은 사라져
버리고 그물만 이리저리 마구 던지면서 무엇이건 건져올리면 그만이라는 풍토가
되었다.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종교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깨달음의
수단인 것이다. 헌데 요즘 종교인들을 보노라면 종교 그 자체가 목적인 양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중요한 것은 고기이지 그물이
아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어부가 이방인에게 받은 반론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된다. 그
내용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전통 속에 살아 있는 격식과 의식의 문제다. 정신만
살아 있으면 되는 것인데, 지나치게 의식과 격식에 치우쳐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의식과 격식은 그물에 불과하고 정신이 바로 고기인데, 어째서
그물을 그토록 중시하느냐는 것이다.
먼저 우리 문화의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양 문화는 모양 문화라 할 수
있다. 모양이라는 그릇에 정신을 담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도 물 한 잔 떠놓지
않고 고개만 숙이는 서양과는 다르다. 제사상에는 어떤 음식을 어느 자리에 놓고,
제사를 지내는 후손은 어떤 옷을 어떻게 입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절을
하는지를 정해 놓고 있다. 제사의 그 상세한 과정과 예법을 종합해 보면 그
의식은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외형적인 형식의 아름다움과
거기에 담는 정신의 고결함, 그것의 절묘한 결합에서 오는 제사 의식의 완성도를
보고 어찌 예술적 가치를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정신이라는 내면적 가치를
모양을 통해 완성시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의 예절도 그 관계에 따라 각기 예법이 다르다.
어른과 아이가 만났을 때, 남자와 여자가 만났을 때, 친구와 친구가 만났을 때
인사하는 법이 틀리고 그에 따라 상대를 맞이하는 마음가짐도 달라진다. 서양
사람들은 아들이 아버지의 등을 툭툭 두드리는 것을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인다.
그것이 그들의 예법이겠지만 우리의 경우 아들의 그런 행동은 올바른 것이라 할
수 없다. 단순히 등을 두드리는 그 모양새만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그런
행동은 자식이 아버지를 대하는 정신 상태가 잘못됐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동년배 대하듯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옷은 어떻게 입고 밥은 어떻게 먹고 길은 어떻게 걷고 인사는 어떻게 하느냐
하는 그 모든 일상의 예법 역시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과 격식은 그 자체가 마음의 표현이 된다. 결코
형식적인 허례가 아니다.
나의 아내는 가끔 외출을 할 때 화장을 한다. 요란스런 화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성스레 얼굴을 매만진다. 모양을 내는 것이다. 그것을 허례라 할 수는
없다. 아내의 화장에서 느끼는 소감도 소감이지만 나는 화장품 그 자체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해 본다.
화장품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 용기들이 참으로 각양각색이다. 화장품의
내용물은 그 품질과 성격이 다양할 터인데, 그 내용물만으로는 여인네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것을 담는 용기가 다양한 모습으로 여인네들의 손길이
닿기를 기다린다. 내용물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용기가 형편없으면 관심을 끌지
못하리란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인네들에게 좋은 화장품이란 그 질이 좋아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을 담는 용기도 마음을 끌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된다. 제품의 질을
높이면서 그와 함께 포장도 잘해야 한다는 것은 요즘의 산업 사회 현실이기도
하다. 디자인이 형편없으면 아무리 성능이 좋은 제품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래서 요즘 곧잘 디자인 혁명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우리 전통 문화가 지닌 의식과 격식도 그렇게 내용, 즉 마음을 담아 그것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여인네가 오랜 시간 화장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온 가족이 모여 조상에게 정성스레 제사를 지내는 것을 지나친 의식과 격식이라
한다면 이는 한줌의 모래가 모래인 줄 알면서 넓은 백사장의 모래가 모래인 줄
모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의 모양 문화가 이러하다고 해도 그 이방인식의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이렇게 물을 것이다. 모양이건 마음의 표현이건 중요한 것은 마음 그
자체가 아니냐. 그런데 고기보다 그물이 중요하다고 말할 것이냐.
고기보다 그물이 중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물을 제대로  만들지 않으면
고기를 잡을 수 없다. 그물의 구멍이 잡을 고기보다 크면 고기를 잡을 수 없다.
그물을 던져 놓았다 해도 그것을 끌어당기지 못하면 역시 고기를 손에 쥘 수
없다. 그물은 고기를 잡기 위한 수단으로서 중요한 것이다.
어부는 이방인에게 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이 있는 것이니 고기가 중요하고, 또
그물이 없으면 고기를 잡을 수 없으니 그물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 대답에는
모순됨이 없다. 단순하고 궤변적인 저울로 그 둘의 무게를 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목적을 잃은 수단은 고기를 잡을 수 없는 그물과 같다. 그물이 고기를 잡기
위한 수단이란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태도다. 그렇다고 그물을
아무렇게나 만들고 던지면 고기는 잡히지 않는다. 목적은 있으되 수단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고기와 그물이 하나로 어울릴 수 있게 아는 어부, 목적과 수단을 하나로
조화시키고 내용과 형식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어부야말로 최고의 어부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어부에게 인생을 배울 수 있다. 궤변적인 저울을 들이대는
이방인은 잠시 머물다가 가 벌릴 수 없다. 그러고보면 진리라는 것은 참으로
평범하다. 그물을 잘 만들어 고기를 잘 잡으면 되는 것이다.

즐기지 않는 즐거움

손님으로 찾아온 점잖은 신사 두 분이 아내가 내민 밥상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신사가 말을 하기 전까지는 왜 그랬는지 영문을 알지 못했는데,
듣고 보니 이러했다.
밥상은 나물과 야채 반찬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청학동 밥상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확인의 표현인 것이었다. 산골이니 그러려니 짐작하고 있었는데
막상 보니 정말 그렇다는 뜻이었다.
"이 곳 분들은 채식만 하십니까?"
"주로 채식을 하지요. 그게 우리 몸에 좋으니까요. 그러나 가끔 고기를
먹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고기는 절대 먹지 않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한 신사가 눈을 크게 뜨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 표정이
되어 다시 물었다.
"개고기요? 아니, 그 좋은 것을 왜요?"
몇 가지 이유로 나는 개고기를 먹지 않는 배경을 설명했다. 두 신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음식 얘기가 계속 이어졌다.
두 신사는 예의에 벗어나게도 내 앞에서 개고기가 얼마나 맛있고 몸에 좋은지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이야기는 개고기에서 소의 불알과 혓바닥으로, 하동의 재첩국으로 계속
이어졌다. 두 신사는 대단한 미식가임에 틀림없었다.
"살기 위해 먹는지 먹기 위해 사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있지만, 정말 먹는
즐거움만한 게 어디 있나요."
나물 반찬을 맛나게 씹으며 한 신사가 말했다. 먹는 즐거움, 그것은 두 신사만
느끼는 것은 물론 아니다. 먹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사람들이 음식물을 씹는
소리가 온세상을 울리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어쨌든 눈을 감으면 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세상에 어디 먹는 즐거움만 있겠나. 보면서 누리는 즐거움, 들어서 느끼는
즐거움, 좋은 옷을 입어서 생기는 즐거움, 여자를 만나는 즐거움, 남자를 만나는
즐거움, 담배를 피우는 즐거움 등 세상에는 즐거움이 참으로 많은 듯 보인다.
보는 즐거움만 해도 그렇다. 영상시대라고까지 불리는 요즘 세상에는 정말
볼거리가 많다. 텔레비전, 영화, 비디오 등에 나오는 온갖 모습들이 현란하다.
좋은 영화에서부터 온갖 살인 기술이 나오는 폭력물과 기막힌 포르노까지 불 수
없는 게 없으니 누가 그 즐거움의 유혹을 뿌리칠 것인가.
입는 즐거움은 또 어떤가. 옷이 날개라는 말이 생활 신조라도 되는 듯 숱한
남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옷가게들을 순례하다 마침내 하나 찾아낸다. 비장의
카드를 내밀 듯 그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 척 나서서 반응을 살핀다. 어울린다고
누가 한 마디 하면 만면에 미소를 짓고, 반응이 신통치 않으며 원수 대하듯
옷장에 처박아두고 다시 옷가게로 달려간다.
즐길 것이 이리도 많으니 세상은 무릉도원이 됐단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즐길 거리가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진한 즐거움의 농도를 찾아 떠난다.
어제의 즐거움은 이미 오늘의 즐거움이 아니요, 오늘의 즐거움을 내일의
즐거움으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절제 할 줄 모르고 그렇게 쉬지 않고 즐거움을
찾다가 끝내는 화근을 만나고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먹는 즐거움만 들여다보자. 거기에 빠져 자제할 줄도 모르고 마구 먹어대다가
비만해지고 성인병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성인병에 걸린
후에야 먹는 것을 조절한다 어쩐다 하지만 치료가 잘 되지 않을 뿐더러, 설사
호전된다 하더라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몸에 생기는 직접적인 병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먹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식탐이 많아질수록 점점 더 많은 돈이 요구된다. 그
돈을 벌기 위해 제 몸을 또 얼마나 혹사시켜야 하는가. 벌어서 먹고, 좀더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더 많이 벌어야 하는 생활이 반복된다. 음식을 쫓는 것은 결국
돈을 쫓는 것이 되니, 힘겨운 돈벌이에 매달려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러다 보니
사회에는 조금이라도 더 즐기기 위해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벌려는 사람들로
득실거린다.
역으로 한 번 생각해 보자. 먹지 않는 즐거움은 없을까. 굶는다거나 영양에
문제가 있을 정도의 소식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적절히 자제하는 즐거움 말이다.
그런 즐거움도 있다. 먼저 성인병에 걸리지 않으니 건강해서 좋고,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기 위해 많은 돈을 벌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편해서 좋다. 보리밥에
나물국을 먹어도 마음이 편하면 잘사는 것이다. 진수성찬을 먹기 위해 온갖
고민과 갈등 속에서 사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먹지 않는 즐거움과 마찬가지로 보지 않아서 누리는 즐거움, 듣지 않아서
느끼는 즐거움, 입지 않아서 생기는 즐거움, 여자를 만나지 않는 즐거움, 남자를
만나지 않는 즐거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즐거움이 있다. 즐기지 않는 즐거움
또한 세상에 있는 것이다.
헌데 사람들 가운데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따져보지 않고 사는 이들이 있다.
성인병에 걸리건 말건 일단 먹고 보자는 식의 태도는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헌데 사람들은 한심한 것을 한심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 태도의 배경에는
물질과 정신에 대한 몰이해가 깔려 있다. 만물에는 양면성이 있듯 인간 생활에도
물질과 정신이라는 양면성의 축이 있다. 물질은 사람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주고
정신은 행복을 느끼게 한다. 그 둘은 수레의 양바퀴처럼 어울려 삶을 끌고 간다.
만약 그 둘의 작용을 굳이 선후로 따진다면 물질이 정신보다 앞쪽에서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먼저 먹어야 움직일 수 있고,
그런 후에 정신의 작용이 가능하니 물질을 앞세울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선후는 작용상의 선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을 가치의 경중으로
따져보면 달라진다. 물질보다는 정신이 앞서는 것이다. 헌데 이것이 뒤바뀌어
요즘 세상은 물질을 숭배하고 인간을 경시하는 풍토에 젖어 버렸다. 가치상의
선후를 무시하고 작용상의 선후에 매달려 많은 사람들이 물질 숭배자가 된
것이다.
이런 현실이고 보니 즐거움도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즐거움보다는
숱한 후유증과 고통을 몰고 오는 즐거움을 사람들은 더 탐닉하게 된 것이다.
물질 숭배가 팽배한 현대에 와서만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그건 문제가 있었기에 많은 성현들은 사람의 즐거움에 대해 음미해 불만한 말들을
남겼다. 장자와 노자의 어록을 보자. 먼저 "장자"의 '지락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요지의 대목이 나온다.

천하에 지극한 즐거움은 있는가? 대개 천하가 즐거워하는 것은 몸의 편함과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옷, 좋은 빛깔, 좋은 소리인 것이다. 천하가 괴로워하는
것은 몸에 편함이 없고 입은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며, 몸은 아름다운 옷을
입지 못하고, 눈은 좋은 빛깔을 보지 못하고, 귀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이러한 것들을 얻지 못하면 크게 걱정하고 두려워하니, 그
몸뚱아리를 위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구나.
....
세속의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이 참으로 즐거운 것인가를 나는 모르겠다.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온 천하가 떼를 지어 달려서 비록 죽더라도 그칠
수 없는 듯하여, 그래서 모두 즐겁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 그것을 즐겁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즐겁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이니, 과연
즐거움이란 있는 것인가?
나는 무위로써 참다운 즐거움을 삼는다. 그러나 이것은 세속의 사람들이 크게
괴로워하는 것이니, 옛말에 '지극한 즐거움은 즐거움이 없는 것이요, 지극한
명예는 명예가 없는 것이다'라 한 것이다. 지극한 즐거움이 몸을 살리는 것은
오직 무위이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장자는 얻기 위해 크게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즐거움을 즐거움으로 여길 수
없다고 했다. 즐거움이 없는 즐거움, 바로 세속의 즐거움을 넘어선 무위를
즐거움이라 했다. 그것이 세 속의 사람들에겐 괴로움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지적했다. 우리는 왜 장자가 인위를 가하지 않은 자연 상태인 무위를 즐거움이라
했는지 음미해 보면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즐기지 않는 즐거움을 느낄
수 없을까.
노자 역시 감각적인 즐거움을 버리고 내실 있는 삶을 살라고 충고한다.
"도덕경"의 검욕의 장을 보자.

오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오음은 사람의 귀를 먹게 한다. 오미는
사람의 입을 상하게 한다.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발광케
한다. 얻기 어려운 재물은 사람의 행동을 방해한다. 이로써 성인은 배를 위해
하지 눈을 위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인은 저를 버리고 이를 취한다.

성인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감각적인 즐거움에 빠지지 않는다. 배, 바로 내실을
채우는 생활 태도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무위의 태도는 장자의 표현대로 세
속의 인간들에게는 괴로움이 되니, 눈이 머는 줄도 모르고 화려한 색에 빠져들고,
입이 상하는 줄도 모르고 맛난 음식에 집착한다. 물론 보지 않고 먹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것에 집착하고 거기서 지나치게 즐거움을 찾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세속에서 어찌 감각적인 즐거움을 좇지 않고 살 수 있으리요. 그 즐거움은
인생의 맛을 더하는 조미료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즐거움에서의 집착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즐기지 않는 즐거움의 지혜를
가져봄직하지 않은가.

나 자신을 알라

장날에 아내와 함께 하동 시장에 구경을 간 적이 있었다. 내게는 다른 볼 일이
있었지만 시간도 남고 하여 갓을 쓴 채로 이리저리 둘러봤다. 시골 장터라
하지만 들여다보면 없는 게 없었다. 아낙네들이 조금씩 들고 나온 농산물뿐만
아니라 상인들이 파는 각종 공산품들이 너도 나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잡하기 그지없는 장난감에서부터 첨단의 전자제품까지
그야말로 시장은 만물상이었다.
상품들은 그 종류만큼이나 질도 다양했다. 어떤 상품은 형편없이 만들어져
헐값으로 내놓아도 관심을 끌지 못하고, 또 어떤 상품은 잘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이라며 당당하게 비싼 값으로 손님들 앞에 나선다.
주머니 사정을 걱정하면서도 사람들은 그런 당당한 상품 앞에서 기웃거린다.
흥정을 하다 깨져 돌아서면서도 사람들은 잘 만들어진 상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손님들의 구미를 모를 리 없는 상인들은 값싸고 질 좋은 상품을 갖다 놓기 위해
애를 쓰고, 그에 따라 당연히 제조업자들은 그런 상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래도 막상 시장에 나오는 것을 보면 값과 질은 천차만별이 된다.
그러한 시장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의 세상살이가 꼭 그와 같음을 알게
된다. 세상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인간과 시장에 그러고 있는 상품은 다를 게
없다. 질 좋은 상품이란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 가치 있는 상품이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가치가 있을 때 세상의 주목을 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는 것이다.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면
사람의 가치는 누가 만드는 것일까.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이 진리를 사람들은 너무 자주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상품 하나 만들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면서도, 정작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는 태만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정받고 존경받을 수 있는 길은 딱
하나밖에 없다. 바로 자기 가치를 스스로 만드는 길이다.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 바치는 정성, 아니 예술품 하나를 빚어내기 위해 바치는 혼신의 땀으로
자신을, 자기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자기 가치를 만들지 않고 주위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은 볼품없는 상품이
손님들의 칭찬을 기대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몰염치한 짓이요,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할 때 남의 탓을
많이 한다. 자기 가치가 없는 것은, 그걸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추하게 생긴 사람이 자기 모양은 생각지 않고
거울을 탓하는 것과 꼭 같다.
가치 있는 사람을 인정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자신을 비추는 주위 사람들의
거울을 탓하지 말고 바로 자기 모습을 살펴야 한다.
이런 남자가 있다. 자기는 집안의 가장이니 당연히 아내와 자식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남자는 아주 경박하고 이기적이고
거짓말쟁이다. 자식이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내가 그런 남편을 존경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자신이 존경받지 못한다고 가족을 나무랄 것이
아니라 자기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아내로부터 존경받지 못하고 무시를 당하는
남편이 밖에 나가서는 어떨까.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 나간다고 달라질 리가
없다. 그런 남자는 사회에 나가서도 인정을 받지 못한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아내로서 의무를 다하고 스스로 가치를 쌓을 때
남편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 못하고 남편으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아내는 어디 가서도 마찬가지 신세가 된다.
너 자신을 알라고 소크라테스는 가르쳤다. 그것은 모든 성현들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바로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남에게 충고하는
일이요,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남의 허물은 잘
보면서 제 허물은 모르니, 그래서야 어찌 자기 가치를 만들 수 있겠나.
사람의 권리를 말할 때 보통 그것을 남과의 투쟁에서 얻는 성과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서양에서 주로 그런데, 그들은 권리 투쟁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으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의식이
팽배해져 있다. 물론 투쟁을 통해서 얻는 권리들이 있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해서 근본적으로 보면 사람의 권리는 자기 의무와 책임을
다할 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아내는 아내의 의무와 책임을 다할 때, 즉 자기
가치를 만들었을 때 남편의 인정을  받고, 인정을 받으니 자연스레 아내의 권리를
누린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부부 사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세상살이에 해당한다.
주위의 인정을 받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먼저 이렇게 자문해 봐야 한다.
무엇 때문에 나의 가치는 이렇게 떨어졌을까? 이기심 앞선 행동을 많이 했을까?
남을 속였을까? 욕심을 너무 부렸을까? 상처를 줄 말이나 행동을 했을까? 남의
아픔을 외면했을까? 남을 이해하는 아량이 부족할까? 잘난 체를 했을까? 비굴한
행동을 했을까? 얌체짓을 했을까...? 그렇게 묻다 보면 자기 가치를 떨어뜨린
여러 문제점들을 찾아낼 것이다.
답을 찾았다면 그것을 바로 잡는 일, 바로 떨어진 가치를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면 그 길밖에는 없다. 성공과 실패의 열쇠는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이다. 성공을 위해서는 남에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매달려야 한다. 이웃은 동반자요, 경쟁은 자기 자신과 해야 한다.
흔히들 경쟁을 말하면 주변 사람들을 떠올리지만, 그 주변의 이웃은 더불어
함께 사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사람이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공동체를 만들어
공존한다. 고독을 느낀다는 말은 공존의 그리움을 느낀다는 말이다. 이웃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대상이다. 경쟁이란 것 자체가 상대가 있는 것이고,
그 상대와의 우열을 따지는 게 아니냐고 따질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외면적인 관찰일 뿐이다.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이다. 자신과의 경쟁에서 얻은 것이 그 사람의
성과물이다. 그 성과물을 표피적으로만 비교할 수 없다. 각양각색의 사람이
제각기 내놓은 성과물들을 외형적으로만 보고 저울을 달아, 누가 누구한테
경쟁에서 이겼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허망한 노릇이 아닌가.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인정사정 보지 않고 덤벼들어 이권을 많이 챙긴 사람이 남의 사정을 살펴 과한
욕심을 자제한 사람보다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질에 탐욕스런 사람과
마음이 부자인 사람을 두고 누가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노자는 천하 제일의 장사는 자기를 이기는 장사라 했다. 자신과의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바로 성공한 사람이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다.
그러하기에 자기를 이기는 것, 자기 가치를 만드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된다.
시인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에서 나는 인간이 자기 가치를 세우기 위해
얼마나 힘겨운 노력을 해야 하고,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를 읽는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재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한 송이의 꽃이 피기 위해서는 많은 시련과 질긴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이 자기 가치를 세우는 일도 그러하다.
중국의 회남자가 말하길, 나이 50살에 49살 때의 잘못을 깨우쳤다고 했다. 이
얼마나 명쾌한 자기 확인인가. 잘못을 깨우쳤다 함은 자기 가치를 새로이 만들어
가겠다는 뜻이다. 사람은 일생을 통해 그렇게 산다. 학위인본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학생이요, 배우는 것이 사람의 근본이라는 뜻이다. 배우면서
자기 잘못을 알고 자기 가치를 세워 가는 것이다.
사람은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한다. 불교경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날 부처는 설법을 행할 곳을 찾아 길을 떠났다.
가는 길에 숲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때 한 무리의 청춘 남녀들이
우왕좌왕하며 숲속을 헤매고 있었다. 부처를 본 그들은 도망가는 한 여자를 보지
못했냐고 물었다. 사연인즉슨 이랬다. 그들은 숲에서 짝을 지어 놀고 있었다.
흥에 빠져 정신없이 놀고 있는데, 한 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저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재물을 훔쳐 달아난 것이다. 부처는 노는데 정신이 팔린 그들에게
물었다.
"젊은이들에게 하나 물어 보겠다. 그대들은 달아난 여자를 찾는 일과 나
자신을 찾는 일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가?"
자기 자신을 잃고 정신없이 놀던 젊은이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게 더 중요함을 깨닫고 그렇게 대답했다. 이에 부처는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찾는 길을 일러 주겠다며 설법을 행했다. 깨달음을 얻은 젊은이들은
후에 부처의 제자가 되었다.
인생은 자기 가치를 찾으면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나 역시 남을 속인 기억은 별로 없는데
나 자신을 속이는 죄는 종종 저질렀다. 오늘도 다짐하는 것은 그 죄를 다시 짓지
말자는 것이다. 나를 속이는 것은 가장 큰 죄요, 나를 아는 것은 가장 큰
행복이다.
요즘 우리는 반도체를 비롯해 세계에 자랑할 만한 제품을 만들고, 또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참으로 대견스럽고 흐뭇한 일이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그런 제품을 만드는 노력을 바로 자기 자신의 가치를 만드는 데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 할 일이다.

꽃에서 맡는 물 향기

저마다 꽃들은 피고, 저마다 꽃들은 향기를 내뿜는다. 장미는 장미의 향기로
국화는 국화의 향기로 스스로의 존재를 만끽하고, 또 그 존재를 세상에 알린다.
벌과 나비와 사람은 그 향기를 찬양하며 기꺼이 꽃을 찾아나선다. 꽃과 그
향기를 찬양하기에 얼마나 많은 시인들의 시가 바쳐졌던가. 시인이 아니어도
좋다. 우리는 꽃 향기를 맡으며 삶이 그렇게 향기롭기를 꿈꾸고, 그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할 것이다. 그래서 청춘도 꽃다운 청춘이 되기를, 아니 모든
인생이 꽃다운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이제 막 인생의 눈을 뜨기 시작하는 청소년들이 가슴 설레며 꽃말을 외워 보는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이리라. 개나리는 희망, 철쭉은 사랑의 기쁨, 해바라기는
숭배, 백합은 순결.... 그렇게 꽃말을 마음에 새겨 보며 꽃과 같은 인생이 되기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그처럼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 향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꽃이기에 당연히
향기가 있는 것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꽃을 피워 향기를 나게
하는 것이 있다. 마침내 필 수 있도록 생명을 공급해 주는 물, 그것이 있기에
향기도 있는 것이다.
물은 그 자체로 향기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세상
먼지를 다 씻어 주면서, 강한 바위틈 사이도 마다 않고 흐르면서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제 몸을 바친다. 제 모든 것을 오로지 자연의 순리에 바쳐
꽃에게는 개화의 찬란함과 향기를 선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꽃에서 물 향기를
맡을 수 있지 않을까. 비록 그것이 직접적으로 우리의 후각을 자극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으로 그 향기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꽃에서 물 향기를 맡아보자.
흐르고 흐르며 제 모든 것을 바쳐 마침내 꽃을 피운 물, 그 얼마나 향기로운
존재인가.
사람들이 사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이름을 떨치며 주목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꽃다운 존재들로 향기를 발산하고, 사람들은 그에 찬양을 보낸다. 그러나
그런 소수의 사람들을 보면 그 바탕에는 물 같은 인생이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향기로운 사람에게 영양분을 공급한 이들이다.
물 같은 인생, 이 얼마나 향기로운 존재들인가.
언젠가 한 문학 청년과 물 같은 존재가 주는 향기에 대해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청년은 시 한 수를 들려주었다. 독일 시인 릴케의
"엄숙한 시간"이라는 시였다.

지금 세계의 어디에선가 누군지 울고 있다.
세계 속에서 까닭없이 울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잇다.

지금 세계의 어디에선가 누군지 웃고 있다
세계 속에서 까닭없이 웃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보고 웃고 웃고 있다.

지금 세계의 어디에선가 누군지 걷고 있다
세계 속에서 정처없이 걷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향해 오고 있다

지금 세계의 어디에선가 누군지 죽고 있다
세계 속에서 까닭없이 죽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서양 사람들의 시를 별로 읽어 본 적이 없는 나이지만, 릴케라는 시인이 무엇을
노래하고 싶었는지는 느낄 수 있었다. 하나의 존재에게로 향하는 다른 존재들의
의미, 그것이 절대자의 섭리건 낯도 모르는 사람의 공력이건, 그 의미를 느끼는
것은 참으로 엄숙한 자기 확인이리라.
노자는 상선약수라 하였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그 자신은 다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물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땅에 있다. 그것이 도에
가깝다 한다. 있는 곳은 땅을 좋아하고, 마음은 깊은 것을 좋아하고, 어울릴 때는
어진 것을 좋아하고, 말은 믿음이 있음을 좋아하고, 정사는 잘 다스려짐을
좋아하고, 일은 능함을 좋아하고, 움직이는 것은 때가 된 것을 좋아하고,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다는 것이다. 최상의 선이라 하는 것이 바로 그런 물과
같다는 것이다.
물이 없으면 꽃은 금세 시들 것이다. 저마다 앞다투어 꽃으로만 피려 하는데
정작 물이 없으면 어찌 한 송이라도 필 수 있겠나.
마찬가지로 물 같은 인생이 없으면 세상은 시들어 버린다. 앞다투어 이름을
떨치려 하고, 앞다투어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밖에 없다면 세상은 이전투구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가정에서라면 현모양처를 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식들이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재능을 살려 꽃다운 인생을 만들 수 있도록 어머니는 물이
되어 자식들을 보살핀다. 한국인으로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음악가들이 많은데,
그 뒤에는 한결같이 훌륭한 어머니들이 있다. 그것이 어찌 유명한 음악가의
어머니들만의 역할이겠는가. 세상의 어머니들은 많은 희생을 한다. 어머니
자신이 꽃이 되려 하기보다는 자식이 꽃처럼 피어나기를 바라며 스스로 물이
된다. 그 얼마나 향기로운 존재들인가.
사회에서 훌륭한 일을 하고 존경받는 사람 뒤에는 또 훌륭한 아내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 아내 역시 남편에겐 물 같은 존재다. 아니, 그 존재의 의미가
남편에게만 혹은 자식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현모양처의 훌륭한 여인들이
우리가 사는 사회를 기름지게 한다. 요즘의 젊은 여성들 가운데 현모양처라는
말만 들어도 고개를 돌리는 이들이 있다. 시대에 뒤떨어져 곰팡내 나는
가치관이나 여성을 억압하는 남녀차별적 수단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어쩌면 물 같은 인생에 대한 과소평가에서 연유되었을 것이다.
사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묵묵히 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 같은 인생들이다. 늘 거리로 나와 깨끗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하는
청소부를 보라. 그들의 지위는 결코 높은 게 아니요, 보수 역시 높지가 않다.
그래도 쉼없이 빗질을 하며, 사람들이 좀더 깨끗해진 세상에서 사는 것을 보며
스스로 만족한다. 그야말로 세상의 악취를 쓸어내는 향기로운 존재들이 아닌가.
헌데 저마다 앞다투어 꽃을 피우려는 사람들은 그런 향기를 맡지 않는다.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탐욕스런 자가 그 전리품을 고급 승용차에 싣고 청소부가
깨끗이 만들어 놓은 길을 달릴 때, 사람들은 청소부를 보지 않고 탐욕스런 자를
본다. 그런 사람을 보면서 저 스스로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현실이
그러할 때 청소부 가운데도 자기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 줄 모르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이들이 생기게 된다. 그저 특별한 다른 기술이 없고 뽐낼 만한 학력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마지못해 청소를 한다고 자조하는 이들이다. 이 얼마나
딱하고 안타까운 현실인가.
사람은 제 역할을 다하며 없어지는 소금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를
많이들 한다. 그러나 정작 소금이 되겠다고 나서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다른 사람에겐 그런 역할을 맡기고 자신은 그 소금의 덕을 보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덕을 보면서도 소금이 된 사람을 존경하기는커녕 경멸하는
부류도 있으니 참으로 기막힐 노릇이다.
사람의 본성은 본디 착한 것이라는 성선설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은 본래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물과 같은 존재들이다. "맹자"의 '고자편'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먼저 고자가 맹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은 돌고 있는 물과 같습니다. 그것을 동쪽으로 터 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놓으면 서쪽으로 흐르지요. 사람의 성에 선함과 선하지 않음의 구분이
없는 것은 물에 동쪽과 서쪽의 구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고자는 물을 그저 터 놓는 곳으로 흐르는 단순한 물질로만 보면서 사람의 성도
그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이에 성선설을 주장하는 맹자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물에는 진정 동서의 구분도 없고 상하의 구분도 없다고 보는가? 사람의 성이
선한 것은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네. 사람을 보면 선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물을 보면 아래로 흐르지 않는 물이 없네. 물을 쳐서 뛰어오르게
하면 사람의 이마를 넘어가게 할 수 있고, 밀어서 역류하게 하면 산에라도
올라가게 할 수 있으나, 그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나? 외부의 힘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네. 사람을 선하지 않게 만들 수 있는데, 그 역시 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외부의 힘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네."
맹자는 사람은 본디 착한 것이고, 그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과
마찬가지라 했다. 단지 그것이 잘못된 외부의 힘 때문에 아래에서 위로 역류하고,
선이 악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외부의 힘, 그것은 지나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꽃에서 물 향기를 맡지 못하는 것도, 물 같은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도
그 지나친 욕망 때문이리라. 꽃에서 감각을 자극하는 향기에만 취하는 것과
거기서 물 향기를 맡는 것, 그 둘 가운데 어느 것이 가치있는 인생을 사는
태도일까.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실천하며 살기가
어려울 따름이다.

손톱 밑에 쌀 한 톨 못 가져가네

댕기머리 시절에 지독한 구두쇠 영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재산으로 따지면 인근 마을을 다 뒤져도 따라올 사람이 없을 만큼 부자인
영감이었다. 헌데 두구쇠 노릇이 어찌나 심한지 이웃에 쌀 한 톨 베푼 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요, 집안의 식구들까지도 밥 한 번 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었다.
논에 나가 일을 하고 온 아들이 깎아서 담은 밥그릇을 다 비우고 좀더
먹을라치면 영감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준 밥만큼만 먹어도 사는데 지장이
없는데 공연히 뱃속만 넓히려 한다는 것이다. 뱃속이 한 번 넓어지면 늘 그만큼
채워야 하고, 얼마 후에 또다시 넓히려고 할 터인데 그 밥을 누가 감당하겠냐는
말이었다. 장정인 아들은 허기진 배를 부여잡으면서도 감히 말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아들한테까지 그 모양이니 누가 감히 그에게 자비를 청할 수 있었겠나.
헌데 영감은 자기 자신에게도 인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몸이 아파도 약값이 아까워 며칠 동안 끙끙 앓기만 하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면 인상을 찌푸리고 의원을 부른다. 인상은 아파서가 아니라 돈이 아까워
찌푸리는 것이다. 고절 끝에 의원이 와서 삼일치의 약을 지어 주겠다고 하면 또
바득바득 우겨서 하루치만 고집한다.
어느 날 영감은 몹시도 고통스러워 의원을 불렀다. 늘 그랬듯 며칠 동안 신음
소리를 내며 앓다가 마지못해 부른 것이었다. 헌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가.
영감을 진맥한 의원은 심각한 표정으로 남은 수명이 한 달 가량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족들이 모두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데, 영감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더 큰 신음 소리를 냈다. 죽는 것이 두렵거나 몸이 아파서만은 아니었다.
도대체 그동안 모아 온 그 많은 재산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고통
때문이었다. 밥이나 더 먹으려는 자식이나 가족에게 주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남한테 주는 것은 더더욱 못할 일이었다. 결국은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쌀 한 톨 저승으로 가져갈 수 없으니 어쩌랴.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머리를
굴려도 방법은 없었다.
몸이 아픈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영감은 죽어서 가져갈 수 없는 자기 재산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울화통이 터져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했다. 한
달 남았다는 수명마저 재촉하며 고민을 했지만 결국 영감은 쌀 한 톨 가져가지
못했다.
이 이야기를 들었던 당시의 어린 마음에는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구두쇠가 쌀 한 톨 못 가져갔으니 얼마나 고소한가,  하는 식의 단순한
소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독한 구두쇠 영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손톱 밑에 쌀 한 톨 가져가지 못한다. 공수래 공수거,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제 손에 뭔가를 쥐고
있으려고 그렇게 버둥거리다가 끝에는 빈 손으로 가니 인생은 얼마나 허무한
노릇인가.
인생은 딱 한 번밖에 없는 단생이다. 윤회를 한다지만, 작년에 수확한 콩과
올해 수확한 콩은 서로 직접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올해 수확한 보리가
내년에 수확할 보리와 뚜렷한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일생은 특정한 그 한사람의 생애로 일단 끝난다. 생각해 보면 이 또한 허무한
일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집도 언젠가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고, 입고 있는
옷도, 읽고 있는 책도, 아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그렇게
되는데 어찌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기에 우리 인생은
보석이 된다. 돼지처럼 밥만 먹고 살기엔 너무도 아깝고, 공작의 펼쳐진 깃털처럼
아름다운 옷만으로 만족하기엔 너무도 아까운 보석이다. 갈고 닦아 빛을 내야
하는 보석이다. 어떻게 빛을 낼 수 있을까.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공수래 공수거하는 인생이지만, 오직 한 번뿐인
인생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더 살아 있는 동안은 살맛이 나야 한다. 어떻게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까.
사람은 살맛이 날 때 행복하다고 하고, 그렇지 않을 때 불행하다고 한다.
행복을 찾는 것이 곧 살맛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행복은 또 어떻게
찾을까. 행복이 무엇인지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 행복과
불행이 우리 인생에서 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살필 수는 있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산다.
무엇이 고통인지는 굳이 열거할 필요도 없다. 그 때 우리는 불행하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에 고통 없는 행복은 없다.
아이의 탄생이라는 축복도 어머니의 산고가 없으면 맛볼 수 없는 것이요, 산의
정상에 올라 누리는 환희도 오르는 고통이 없으면 느낄 수 없는 것이요, 아름다운
예술품의 향기도 창작의 고통이 없으면 결코 맡을 수 업다. 기다림의 고통 없이
만남의 기쁨이 있을까.
헌데 세상에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다. 행복을 맛보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을 거부하고 비켜가려는 이들이다. 오랜 인내와 고통 없이 사랑을
느끼려는 젊은이들을 보자. 그들은 기다림을 공연히 질질 끄는 낭비라 여기고,
고통도 감당할 필요 없는 부산물로 치부하려 한다. 그래서 편하게 만나, 편하게
놀다가, 편하게 헤어지는 것을 사랑이라 착각한다.
쉽게 만나 쉽게 헤어질 때 남는 것은 허탈과 환멸뿐이다. 그들은 순간적인
쾌락을 즐기는 것으로 젊음을 탕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 태어나
젊은 시절 나름대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을 맛보지 못하니 불행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인내와 고통을 피하기 위해 불행의 덫에서 스스로
빠져나가지 않으려 한다. 고통을 거부하는 것은 행복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불행한 사람은 행복한 쪽을 보지 못하니 불행의 늪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고통을 거부해서 행복한 쪽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또 다른 문제도 있다.
고통이 행복의 전제 조건임을 알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좌절하는 사람이
있다. 고통에 빠져 있는 현실을 이겨낼 의지를 가져야 하는데, 먼저 포기를 해
버린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남아 있지 않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그들은
자기보다 더 큰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끝내 이겨내 행복을 맛보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반면에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을 늘 보면서 살아야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 주위의 불행을 외면하면 그 행복은 곧 깨진다. 주위에 자신의
행복을 나누어 주지 않으면 그 행복은 지속 될 수 없다.
행복해 보이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짝이 되어
행복을 느꼈다. 헌데 세월이 흘러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반면, 여자는 불행을 느끼기 시작했다. 남자가 꼭
싫어진 것만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여자는 남자와 함께 있으면 불행을
느꼈다. 그때 남자는 여자의 불행을 알고 어떤 노력을 기울여다 한다. 여자의
불행을 알지도 못하고, 알았다 해도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남자의
행복은 깨질 수밖에 없다.
연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져서 행복한 사람은 가지지 못해 불행한 사람과
자신의 행복을 나눌 때 자신의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 나누어 준다는 행위 그
자체가 행복을 주는 것은 물론이요, 나누지 않아서 생길 수 있는 온갖 불상사를
미리 막을 수 있으니 그것이 바로 행복을 유지하는 길인 것이다.
행복과 불행의 관계가 이러하니, 인생의 고통 속에는 이미 행복이 살아 숨쉬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단지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잡아내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이만하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일차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살맛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그 소유권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으니, 이 얼마나 신명나는 일인가. 짐승이나 수목에는 주어지지 않은
살맛나는 인간의 생존 조건이다. 인간으로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축복받은 것이다.
손톱 밑에 쌀 한 톨 가져갈 수 없는 인생이기에, 오직 한 번뿐인 인생이기에,
우리는 헛되고도 헛된 일에 세월을 낭비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갖게 되었고,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살면서 자신의 악한 부분을 알아채거나, 남이 악한 짓을 하는 것을 보게 되면
이렇게 물어 보자. 손톱 밑에 쌀 한 톨 못 가져가는 인생인데, 무엇 때문에 그리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이오.
살면서 자신의 선한 부분을 알아채거나, 남이 선한 짓을 하는 것을 보게 되면
다시 이렇게 말하자. 손톱 밑에 쌀 한 톨 못 가져가는 인생인데, 그걸 살맛나게
하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오.

죽어야 할 이유

우리의 인생길에는 허무의 강이 쉼없이 흐른다. 허무의 강 하나를 가까스로
건너 얼마간 걷다보면 그 강은 또 저 앞에서 나타나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왜
이 자리에 있는 것인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왜 산단 말인가, 하며
한숨을 짓곤 한다. 사노라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어느 순간 갑자기 그런 상태에
빠져드는 경우도 있고,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 그 덫에 걸려들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배신을 당했을 때, 그 고통에 몸부림치다 보면 세상은
어느덧 의미가 사라져 버린다. 세상 그 어느 것과도 바꾸고 싶지 않았던
사랑이었기에 마음으로 의지할 것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느끼게 된다. 다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조차 부정해 버린다. 그 순간 허무는 배신당한 사람의
가슴을 사로잡는다.
어떤 일에 실패한 사람이 다시 도전하고 싶은 희망마저 잃어버렸을 때도 허무의
그림자는 그를 덮친다.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는 산다는 것의 그 어떤 의미도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면 산다는 것이 구차해 보이고, 삶에 대한 그
어떤 의욕도 시들어 버린다. 그 순간 허무는 실패한 사람의 가슴을 사로잡는다.
특별한 사연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이가 아니어도 사람들은 허무의 바다에
빠지곤 한다. 남들이 볼 대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때때로 허무의
한숨을 쉬고, 인생의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난 구도자도 허무의 그림자를 밟으며
걷곤 한다.
사람은 모두 제각기 다른 사연을 품고, 다른 생각들을 하며 살지만 허무의
바다를 무임승차로 건너지는 못한다. 내게도 허무는 줄곧 찾아온다. 그 덫에
걸려 한때는 죽으려 한 적도 있었다.
열네 살 무렵이었다. 왜 사느냐고 자신에게 묻곤 했다. 산다는 게 뭐냐는
자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삶 자체는 만물의 적이다.
살아야겠다고 닭이며 돼지며 잡아먹고, 과일이며 곡식이며 따 먹는다. 사람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만물을 죽이는데, 과연 그럴 가치가 있는 인생인가. 어차피
죽으면 무의 세계로 돌아갈 터인데, 그런 식으로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그렇게 답하면서 인생무상의 시를 짓곤 했다.

복사꽃 오얏꽃은 명년에 다시 필 수 있건만
포말인생 다시 기약할 수 없구나

삶을 만물의 적이라 규정한 후 삼 년의 세월을 방황 속에서 보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겠다고 보낸 시간이었다. 허나 그 이유를 끝내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죽으려고 결심을 했다. 마침내 어느 날 죽으려고 극약을 샀다. 허무의
극단에 선 셈이었다. 극약을 품고 삼일을 고민했다. 삶과 죽음이 넘나드는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그때 내 머릿속으로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죽어야 할 이유는 뭔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던 내게 그 역의 의문이 떠오른 것이다. 그에 대답해 보려
했지만 죽어야 할 이유 역시 찾을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극약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후에 나는 이렇게 다짐했다. 죽어야 할 이유가 생기면 언제든
죽겠다. 그 이유가 생겼는데도 구차하게 살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열심히 살자.
십대 시절의 이 경험을 통해 얻은 결론은 지금도 내게 유효하다. 누가 왜
사느냐고 물으면 나는 사랑이니 봉사니 하는 삶의 여러 목적을 말하기 전에, 먼저
죽어야 할 이유가 없어서 산다고 말한다. 소극적인 삶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얼핏 들으면 죽어야 할 이유가 생길 때까지만 그럭저럭 살겠다는 뜻으로 비춰질 수
있겠다. 그러나 죽어야 할 이유가 없으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생명이 다해 땅으로 떨어져 바람부는 대로 나뒹구는 낙엽이 아니라 살아있는
잎이라면, 죽어 허연 배를 드러내고 떠올라 물결치는 대로 떠다니는 죽은 고기가
아니라 물 속에 살아 있는 고기라면 살아있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비록 금세
낙엽이 되고 죽은 고기다 될 지라도 그 이유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푸른 잎이
낙엽이 되고, 물고기가 허연 배를 드러내고 죽는 것은 순간이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다. 태어난 것은 늘 변화하다가 끝내 사라지지 상주하는 것은 없다는
무상, 그것이 인생이라는 말들을 하곤 한다. 그 무상한 인생도 금세 지나간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부처는 그 무상한 짧은 생애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어느 날 부처가 제자들을
모아 놓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활 잘 쏘는 네 명의 명궁이 있었다. 그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한 사내가
나타나 큰소리를 쳤다. 명궁 넷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동시에 활을 쏘면 자기가
그 네 화살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전부 잡겠다고. 그럴 수야 없는 일이라는
전제를 한 부처는 만약 사내가 정말 그런 일을 해낸다면 그는 굉장히 빠른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했다.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했다.
한 제자는 화살 제 개가 아니라 하나만 잡아도 빠른 속력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는 말만을 덧붙였다. 그러자 부처가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을 이어갔다.

사방으로 동시에 날아가는 화살을 잡는 사내보다 훨씬 빠른 것이 있다. 해와
달이 하늘을 달리는 속도가 더 빠른 것이다. 그러나 해와 달이 하늘을 달리는
속도보다도 더 빠른 것이 있다. 죽음 향해 사람의 수명이 흘러가는 속도가 더
빠르다. 그러나 그대들은 스스로 이렇게 마음에 새겨야 한다. 사람의 목숨이
흘러가는 것은 해와 달이 하늘을 달리는 속도보다 빠르다. 그러니 허송세월을
보내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이 말을 늘 마음에 간직해 두어야 한다.

부처의 가르침은 인생은 무상한 것이기에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무상을 느끼지 못하기에 함부로 시간을 보내고 멋대로 군다는 말이 된다.
거울처럼 늘 꺼내 들고 되새겨야 할 가르침이다.
세상에는 왜 살아야 하는지 몰라 깊은 허무의 늪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왜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도 해 보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부류도 있다. 그런
부류는 인생의 무상함도 절실히 느끼지 못한다. 그걸 아는 사람이 세월을 함부로
보낼 리는 없는 노릇이다. 인생은 무상이니 아무렇게나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상의 참뜻을 아는 것이 아니다.
허무 혹은 무상, 그것은 사람이 일생을 통해 짊어지고 가야 하는 짐이리라.
가난한 사람이건 부유한 사람이건, 고통에 짓눌려 있는 사람이건 환희에 넘쳐
있는 사람이건, 그 짐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으리라. 그 짐을 부처의
가르침대로 인생을 사는 자극제로 삼는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비록
그러한 지혜를 알지는 못하지만 묵묵히 짐을 지고 버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또 사람은 때대로 그 짐이 지고 살기에는 너무 버겁다고 느끼곤 한다. 그런 사람
가운데는 진리를 부정하고 도덕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허무주의의 늪에 빠지는
이도 있고, 자살의 유혹에 빠져드는 이도 있다.
지인으로부터 고통스런 삶에 지친 어느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교통사고로 자식이라곤 하나뿐인 귀여운 외동아들을 잃은 여인이었다. 자식이
죽으면 어머니는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삶의 의욕마저 잃어 버렸다. 그래도 어쩌랴.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헌데 남편이란 사람이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술을 먹고
들어와 주정을 부렸다. 그녀는 처음에 자식을 잃은 슬픔 때문이니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를 폭행하기 시작했다. 폭행을 하면서
그녀가 자식을 죽인 것이라고 몰아댔다
두 사람의 아들은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었는데,
남편은 그녀에게 책임을 돌렸다. 집에 있으면서 애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느냐는 식의 일반적인 얘기였지만, 그것이 반복되다 보니 그녀로서는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되었다.
부부가 아픔을 함께 나누어도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헌데 하루가 멀다하고
폭행을 당하고, 자식 죽인 어미로 비난을 받으니 그 괴로움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을 했다. 그녀는 위자료조차 거의 받지 못했지만
소송 같은 것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식을 잃고, 다시 한때 사랑했던 남편을
잃고 빈털터리가 된 여인은 더 이상 살고 싶은 요구가 없어졌다. 며칠 동안
친정집 방에서 꼼짝도 않고 있다가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없었다. 무작정 가다
보니 해변가 마을이 나왔다. 그녀의 지갑에는 신경안정제가 수십 알 들어
있었다. 밤이 되어 그녀는 한 여관을 찾아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 누워 있노라니 눈물이 저절로 흘러 나왔다. 그런데 여관 주인인
할머니가 노크도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을 보더니
짐작했던 그대로라는 듯 할머니는 혀를 찼다. 할머니는 삶을 포기한 듯한 여인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자기 여관을 자살할 장소로 선택했을 것이라 짐작했던
것이다. 할머니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가."
"네?"
눈물을 닦으며 여인은 무슨 뜻인지 모라 물었다.
"나가라구. 여기는 산사람이 자는 방이지, 시체들이 누워 있을 곳이 아니란
말이야. 어서 나가."
"...."
말없이 여인은 목놓아 울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여전히 퉁명스런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왜 죽으려는지 말해 봐. 죽을 만하면 내가 어디가 좋은지 가르쳐 줄 테니."
할머니는 자살할 장소를 가르쳐 주겠다는 말을 하고는 여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여인은 울음을 그치고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매정한 말투와는 다리 할머니의 눈은 선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후에 할머니와 여인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정확히 듣지 못했다.
어쨌거나 여인은 할머니의 그 말을 들은 후 죽겠다는 생각을 버렸다고 한다.
나의 지인은 그 여인을 어느 암자에서 만났다고 했다. 자기의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웃음을 살짝 짓기까지 했다니, 그 여인은 지금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여인은 할머니의 말을 듣고 그 쭈글쭈글한 얼굴을 보며 왠지 모르게
자살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다.
내 식으로 말하면 그녀는 죽어야 할 이유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당한 고통이 별 게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그 아픔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쓰라린 것이라 해도 아픔이 곧 죽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을 고해라 한다. 인생은 또 늘 허무와 무상을 만난다. 그러나 그것이
죽어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이미
그러할진대, 그것을 이유로 삼는 것은 인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죽어야 할 이유를 따져 봐야 한다.
그리고나서 죽어야 할 이유가 없으면 다시 살아야 할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사람은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는 단순한 갈대는 아니다.

마당 셋 / 청학은 어디로 날아갔나

청학동, 푸른 학이 사는 마을이다.
푸른 학이 세상에 있을까.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푸른 학은 살아 있다.
우리의 정신 속에서 훨훨 날고 있다.
푸른 학이 사는 마을,
그것은 우리의 이상향이다.

팔아먹은 갓

외지에 나가면 갓을 쓴 나를 보고 사람들은 웃곤 한다.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쑥덕거리며, 손가락질까지 하며 웃는다. 아이도 웃고 어른도 웃고, 처녀도 웃고
총각도 웃는다. 큰소리를 내면서 웃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웃는다. 갓을 쓰고
한복을 입었다는 것 때문에 나는 구경거리가 된다. 요즘에도 여전히 웃지만
과거에는 단순히 웃는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수상한 사람으로 오인받아 경찰서를 수시로 들락거려야 했다. 도대체 왜
잡아가냐고 물으면 정신병자 혹은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신고가 들어왔기
때문이란다. 도대체 믿을 수 있는 일인가. 서양에서 들어온 옷을 입지 않고
우리의 전통 의복을 차려 입었다고 정신병자로 보이고 간첩으로 보이다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허나 세월이 그런
걸 어쩌랴.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웃을 때 혼자 조용히 이렇게 읊는다.

세인소아 아소세
세상 사람들은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세상을 보고 웃는다.

넥타이를 목에 졸라 매거나 속살을 훤히 드러낸 짧은 치마를 입는 것은
정상이요, 갓 쓰고 한복 입은 것이 비정상이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러나
외양만 따진다면야 크게 문제랄 것도 없다. 정신까지 그 모양이 되어 버렸다.
갓을 쓰고 한학을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발 붙일 곳이 없었다. 단순히 웃기만
한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 공간도 주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한학을
가지고는 일할 곳도 돈을 벌 곳도 달라진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학문으로
돈을 벌겠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그래도 호구지책은 되어야 하지 않겠나.
바꾸어 말하면 그러한 현실은 우리의 전통 학문이었던 한학이 더 이상 세상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한학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서양
학문이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유학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어릴 때부터 가난을 감수해야 했다.
객지에 공부하러 다니면서도 늘 가난에 시달렸다. 소리를 내 글을 읽다 보면
금세 배가 고파져 말 소리가 나오지 않게 된다. 꽁보리밥 감자밥으로 속을
채우고 보리개떡 등으로 끼니를 이으며 겨우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공부만 할 수 있다면 못할 일이 없었다. 서당에서 공부 시간 이외에는 일을
해야 했다. 이십 리 길을 걸어 땔감 나무를 해 오고, 냄새 나는 통시(화장실)를
치우면서 배움을 이어갈 수 있었다. 꽁보리밥 도시락을 싸들고 나무를 하러 가는
댕기머리 총각을 그래도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희망은 희망으로만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갓 쓰고
한복 입은 사람이 구경거리처럼 여겨지는 세상이었다. 그와 함께 한학이 발붙일
곳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한문 서당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됐지만, 그 일로 호구지책을 삼을 수는 없었다.
학채를 받아 호구지책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 학채라는 것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학채를 대신하는 폐백을 받곤 했다. 폐백이라는 것은 본래 선생을 처음 뵐 때
올리는 예물을 말한다. 헌데 그것이 학채 구실을 하게 됐으니 조기 몇 마리, 쌀 몇
되 등의 폐백으로 살아야 했다. 그러니 내 입 하나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명색이 학문을 하겠다고 나선 입장이니 참아야 했다. 그러나 집안 일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무거웠다. 장남으로서 가난한 집안 형편을 외면만 하고 살 수는
없었다. 스물 세 살 무렵이었다. 고민 끝에 엉뚱하게도 장사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평생 장사를 하겠다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놓으면 동생이 맡아서
하고 나는 본래의 길로 들어서면 된다고 생각했다. 집안의 재산인 논 두
마지기를 팔아서 식품 가게를 차렸다. 그러나 글만 읽던 사람이 장사를 제대로
할 리가 없었다. 세 달을 버티지 못하고 망해 버렸다. 스스로도 부끄러웠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부모님에게 면목이 없어졌다. 이왕 내친 걸음이라 빚을
얻어서라도 다시 장사를 해 보려 했다. 그러나 주위에서 만류를 하고 나섰다.
장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다시 광양의 백운산으로 가 토굴 안으로 들어갔다.
식품 가게가 망했을 때도 망하고 남은 돈을 가지고 한라산으로 갔었다. 고무신
신고 한복 입은 채 올라가려 하니 사람들이 말렸지만 나는 끝내 백록담까지
올라갔었다. 토굴 안에서 참선을 하며 내 자신을 돌아봤다.
싫은 것이 내 자신이었다. 지금도 누가 내게 세상에서 싫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바로 내 자신이라고 답한다. 토굴 안에서 세 시간 가량 목놓아
울었다. 부모에 대한 죄책감, 수치스럽고 어리석은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몰려와
나는 마냥 울 수밖에 없었다.
산에서 내려온 나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비록 세상이 당장 알아주지
않는 학문이지만, 그 길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차림새 때문에 수상한 사람으로
몰리기도 하고, 발붙일 곳을 찾을 수도 없었지만 나 자신을 버릴 수는 없었다.
어찌어찌하여 결혼을 했는데, 사정이 나아질 이유가 없었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한 아내를 조강지처라 하니, 나의 아내가 바로 조강지처였다. 객지를 떠돌며 한문
강의하는 것으로 집안을 꾸려가기는 참으로 난망한 노릇이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끼니 걱정을 해야 했으니, 가장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때가 되면 배가 고파 오건만 갖고 있는
것이라곤 빈 그릇밖에 없었다. 앞을 보고 뒤를 돌아봐도 돈을 구할 방도는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골동품을 수집하는 장사꾼이 찾아왔다. 장사꾼의
눈인지라 방 하나 차지하고 있는 집안 꼴을 보고 금세 소득이 없을 거라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헌데 내가 한복을 입고 있는 것이 그나마 그의 관심을 끄는
이유가 되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횡재를 많이 했을 터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유감스런 일이었다. 무엇 이건 팔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런데 내 눈에 갓이 들어왔다. 쓰고 나가면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갓, 서양 문물에 짓눌려 행세를 못하는 갓, 그렇지만 내게
세상을 보고 웃을 수 있는 자부심을 주는 갓, 그 갓이 가난에 기를 펴지 못하는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돈이 될 만한 유일한
것이기도 했다.
항설이고 망설이다가 나는 결국 장사꾼에게 갓을 내밀었다. 횡재를 하는
물건은 못 되지만 그래도 그는 눈빛을 반짝이며 이리저리 보고 만지고 하며
값어치를 따져보기 시작했다. 내 머리에서 늘 점잖게 앉아 있었던 것이 장사꾼의
손에 놀아나고 있으니 그 짧은 순간에도 만감이 교차했다.
굶어 죽더라도 당장 장사꾼의 손에서 도로 찾아올까. 어쩌다 갓이 저런 신세가
되었을까. 갓을 바라보니 한탄이 절로 나왔다. 갓아, 너 주인 잘못 만나 수모를
당하고 있구나. 네가 어디로 팔려 가면 새로운 주인을 만나 그 사람의 머리에
앉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저 골동품으로 구경거리로 사람들의 눈요기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이를 어쩌면 좋으냐. 그러나 한탄도 마음놓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장사꾼은 흥정을 재촉하고 나섰다. 갓을 내민 사람은 나였으니, 그의
재촉은 부당한 것이 아니었다. 내 머리에 쓰고 다니던, 내 삶의 상징이기도 하던
갓을 또 흥정을 해야 하니 그 얼마나 괴로운 노릇인가
결국 나는 갓을 팔았다. 갓을 판 돈으로 당장 먹을 것들을 샀다. 허기진 배는
오랜만에 느긋해졌다. 그러나 그 배에 손을 얹고 누워 허공을 보니 한숨이 또
절로 나왔다.
배를 진정시키니 이번에는 머릿속의 허기로 시달리게 된 것이다. 세상 탓으로
돌리면 무엇하리. 싫은 것은 바로 내 자신이었다. 갓을 팔아 베의 허기를 달랜
것은 잠시였고, 머리의 허기는 계속 지속되었다. 그래도 내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하면서 한문 강의를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고 달려갔다.
그런데 어느 날 청학동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청학동 서당의 훈장으로 오면
어떻겠느냐는 제의였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청학동은 단순한
하나의 마을이 아니었다. 우리의 전통 속에 살아 있는 정신 문화를 찾으려는
곳이었으니, 내가 추구하는 정신과 상통하므로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아내와 어린아이 그리고 괴나리 봇짐 하나와 그릇 몇 개가 나와 함께
청학동으로 들어갔다. 남의 집 골방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난이야
이웃처럼 가까운 사이였으니, 거기에 의기소침할 건 없었다. 그 골방에서 사 년을
살면서도 제자들이 무럭무럭 커 가는 것을 보며 나는 다시 희망을 찾았다.
한학이 결코 사라져야 할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제자들을 보면서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빈 집이 하나 생겼고, 학부모들의 도움으로 그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객지를 고향으로 삼고 공부를 한다, 가르친다 하며 떠돌기만 했던 서생이 편안히
쉴 수 있는 집도 생겼고, 공부하고 가르치는 보람도 되찾았으니 나에게는 호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겨우 내가 머물 곳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니 이미 부모님은
이승에 계시지 않았다. 공부를 한다고 떠돌아다닌 자식은 부모님을 몇 개월도
따뜻하게 모시지 못했다. 늘 효를 말하면서도 내 자신이 불효자였다. 싫은 것은
바로 내 자신이었다.
갓으로 상징되는 내 삶을 살기 위해 팔아먹은 그 갓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골동품으로 모셔져 있을까. 지금도 나는 갓을 쓰고 있다. 골동품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구경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에 와서
사람들이 갓을 쓰고 살 수는 없겠지만, 그 것으로 상징되는 정신마저 팔아먹지는
말아야겠다.

청학은 어디로 날아갔나

청학동, 푸른 학이 사는 마을이다. 푸른 학이 세상에 있을까.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푸른 학은 살아있다. 우리의 정신 속에서 훨훨
날고 있다. 푸른 학이 사는 마을, 그것은 우리의 이상향이다.
무릉도원이 중국인들의 이상향이고, 천당과 극락이 기독교인들과 불교도들의
이상향이듯 우리에게 푸른 학이 사는 마을은 이상향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그렇게 이름을 지어 놓았다. 고려시대 이인로의 "파한집"에도 이상향의 땅으로
청학동이 기록되어 있다.
청학동은 어떤 마을인가를 사람들은 묻곤 한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를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할 때가 있다. 그 물음 뒤에는 단순한 호기심도 있고, 오해
때문에 생긴 비뚤어진 시각도 있고, 진정 실체를 알고 싶은 순수한 의문도 있다.
그러나 처음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잘못된 정보와 기대를 가지고
있다.
이곳을 민속촌과 같은 관광지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이슬만 먹고
사는 신선들의 땅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있고, 또 상투와 댕기머리와 한복으로
상징되는 것을 오해해서 시대에 뒤떨어진 조선식 유교 마을을 상상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폐쇄적인 종교 집단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모두 청학동의 본 모습과는 거리가 먼 소문들에 불과하다.
청학동은 생활 종교를 실천하는 삶의 현장이다. 우리에게는 유불선 합일 갱정
유도교라는 종교가 있다. 선불을 바탕으로 하여 유교를 실천하는 사상을 신앙의
핵심으로 한다.
덧붙여 말하면 선불은 내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념과 사상 철학이요, 유교는
외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실천 철학이다. 선불의 이념과 사상 철학을 실생활에
접목하는데 그 수단과 방법을 유교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적인 이상을
실생활과 결합시키려 한다. 실생활 속에서 진리를 찾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 이상은 이상 그 자체일 뿐 별 중요성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생활 속에서 실천하지 않는 진리가 무슨 소용이며 그것을
진리라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실생활과 신앙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주제요 과제다.
따라서 청학동은 수도하는 도량이자 삶의 터전이 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곳은 신도의 헌금이나 시주로 운영되면서 오직 수도만 하면 되는
곳이지만, 우리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일을 하며 생활을 해야 한다.
반복할 필요도 없겠지만 단순한 생활 공간만인 것도 역시 아니다. 삶의
공간이기도 하기에 우리는 현대 문명을 거부하지 않는다.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은 것은 그것이 이어가고 싶은 우리의 전통이기도 하거니와, 그것을 평화의
상징으로 삼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한복을 입고도 컴퓨터를
사용할 것이다.
최근에 작은 중고 승용차를 하나 구입했는데, 차가 필요하면 당연히 차도
이용할 것이다. 지난날 먼 길을 가는 데는 말이나 가마가 필요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 그걸 이용할 수는 없다. 그러면 그 대용이 될 것을 찾아야 하지
않는가. 텔레비전을 비롯한 각종 가전제품들도 생활에 필요하기에 우리는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늘 염두에 두는 것이 있으니, 바로 민족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우리의 전통 속에 살아 있는 문화와 정신을 계승하여 한국적인 모델을 개발하고자
하는 뜻이다. 현대 산업사회가 가져온 문물을 받아들인다 해도 전통적 가치를
살리면서 받아들인다.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올바른 정신을 세우지 않고 물질의 편리함만 쫓으면 그
사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민속촌 같은 관광지를 예상하고 온 사람들은 현대 문명의 이기들을
이용하는 우리를 보고 실망했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단순히 구경거리로 만들어진 관광지와 수도의 도량이자 생활의
터전인 이곳을 어찌 비교한단 말인가. 문명은 거부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그것을 잘 이용해 인간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는 것이 진정 중요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결코 폐쇄적인 땅으로 청학동을 만들려는 게 아니다.
우리의 신앙 역시 폐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청학동을 이상향으로 삼는
것은 이 마을에 사는 소수의 사람들만 잘살겠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넓게
봐서 우리나라 전체가, 더 나아가 세계 전체가 이상향인 청학동이 되기를
기원한다. 청학동 사람들은 365일 이른 아침마다 온 가족이 모여서 인류평화와
국태민안을 기원 치성 드린다. 청학동은 윤리와 도덕을 다시 밝혀 세계 평화를
인류 정신 속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학술 단체요, 밖으로는 평화
안으로는 우리의 독립을 표방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조상들이 말한 이상향의 청학동이 우리가 사는 바로 이곳이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많은
이야기가 있고, 이곳의 아름다운 산수와 살기에 좋은 기후를 비롯한 자연 조건이
그에 걸맞다. 풍수지리로 따져도 참으로 좋은 명당이다.
그래서 먼 옛날부터 이곳을 이상향으로 믿고 사람들이 살아왔다. 그러나 현재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육이오전쟁 이후에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전쟁 때
지리산이 초토화되었기 때문에 원래 이 마을에 살던 사람도 다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족의 땅이 온통 불바다가 되었는데, 이상향의 마을이라고
온전할 수 있었겠는가. 그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은 후에 다시 청학동을 재건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리적인 위치만 가지고 이상향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상향의 꿈을 이곳에서 키우고, 끝내는 온 세상을 청학동화하는 염원을
품고 있다.
인류 평화에 일조한다는 신념으로 우리는 여기에 살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전통을 살리고 그 바탕 위에서 정신을 세워야 한다. 전통과 정신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어찌 세계평화를 입에 올릴 수 있겠는가. 그것은
걷지도 못하면서 뛰겠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청학동은 우리의 전통과 정신을
살려 평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다.
최근에 한 신문에서 청학동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청학동에 와 보고
실망했다는 투의 내용이었다. 언론의 자유는 참으로 좋은 것이다. 그러나
실상을 보지 못하고 한 번 슬쩍 훑어보고는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함부로 펜을 놀리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겠나. 그 기사를 쓴 기자는 아마
청학동에 대한 잘못된 여러 소문 가운데 하나를 믿고 찾아왔을 것이다.
청학동에서는 문제의 소지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 알려지기 전에 우리의 신앙과 삶의 철학을 지키며 살았다. 세상에 알려진
후에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왜곡된 소문과 외부의 좋지
않은 영향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있다.
외부에 청학동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우습게도 어느 발효음료 회사에서
전통 문화를 소개할 겸 청학동을 텔레비전 광고에 소개하겠다고 찾아왔다.
목적이 장사임을 모를 리 없는 우리는 선뜻 응낙할 수 없었다. 일주일 가량
실랑이를 하다가 마을 어른들의 승낙으로 결국 광고의 배경이 되었다.
그들은 청학동을 자기들 상품의 광고에 등장시키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도
주저하지 않았다. 광고를 한 후에 돈을 벌면 서당을 지어 주겠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금까지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어쨌거나 그 광고에 장수
마을로 청학동은 소개되었다. 자기 들 상품을 마시면 장수할 거라는 복선이 깔려
있는 광고였다. 신비로운 장수 마을이라니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텔레비전의 위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청학동까지 도로가 뚫렸다. 도로는 단순한 길이
아니었다. 도로를 타고 외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도로가 없을 때
우리는 걸어서 걸어서 산을 내려와 백리 길인 하동까지 가곤 했었다. 하루에
볼일을 보고 돌아오기 힘든 길이었다. 당연히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헌데 도로를 타고 사람들이 오기 시작하면서 세상에 더 많이 알려졌고,
알려지니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의 환경은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모든 문명은 길을 통해 전해진다. 길이 없으면 문명의
발달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길은 또한 자연을 파괴하고 순수한 모습을
오염시키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길을 통해 그 두 가지를 다 경험하고
있다. 길을 통해 들어온 물질을 통해 편리함을 누리며 살게 되었다. 그러나
물질로 인해 편리해진 만큼 우리는 또 다른 불편과 갈등에 시달리게 되었다.
잘못 알려진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마주하면서 생긴 불편과 갈등이다.
관청의 입김도 우리에게 끼쳤다. 박정희 정권 때 우리 마을은 지붕을 개량해야
했다. 초가를 슬레이트나 기와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정부에서 새마을 운동을
앞세워 반강제적으로 나오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지붕을 바꾸었다. 헌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이번에는 준민속마을이니 다시 초가로 바꾸라고 하면서, 우리의
어려운 경제적 여건을 알아챈 군청에서 군 예산으로 개량된 집들을 다시 초가로
탈바꿈시켰다.
도로가 생기고 그로 인해 활발해진 외부와의 접촉, 그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우리  또한 폐쇄적으로 살려는 사람들이 아니니 외부와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청학동 출신 젊은이들도 청학동에서 배운 것,
우리의 전통과 정신을 바탕으로 사회에서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긍정적인 요소들이 있음에도 불고하고 너무도 많은 폐해와
갈등 때문에 우리 마을 사람들은 요즘 고민하면서 어떤 결단을 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들을 나누고 있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외부에 많이 알려지기 전의 청학동을 그리워 하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도로를 통해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며 우리는 달라진 모습을 보곤 한다.
청학이 있다면 날아갔을 것이란 한탄을 하기도 한다. 청학이 날아갔다면, 과연
누가 청학을 날려 보냈는가? 우리는 묻고 또 묻는다. 그러나 우리는 도롤
상징되는 외부 세계와의 접촉 탓으로만 돌리지 않는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성하고, 우리가 다시 우리의 이상향을 되살려야 한다는 것을 먼저
생각한다.
외부 사람들도 우리의 갈등을 이해한다면, 단순한 관광지로 보는 등의 잘못된
소문만 가지고 우리를 보지는 않으리라 기대해 본다. 청학동은 수도의 도량이자
삶의 터전임을, 신앙과 실생활을 결합시키려는 땅임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외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적극 환영한다. 우리가 환영하는
것은 이상향의 꿈을 나누는, 넓게 보면 온 세상을 이상향의 땅으로 만드는 꿈을
나누는 동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꿈을 나눌 수 있다면, 우리의
전통과 정신을 바로 세워 그 꿈을 나눌 수 있다면, 이념과 정신이 있는 땅은
멸망하지 않듯이 청학동 또한 현실 속에서 영원히 존재할 것이며, 푸른 학 또한
반드시 볼 수 있을 것이다.

혼쭐난 NHK

우리 민족의 전통 문화를 보고 싶어하는 외국인들이 심심찮게 청학동을
찾아오곤 한다. 자기 전통을 지키고 사는 아프리카 어느 종족의 마을을 방문하는
것과 다를 것 없는 태도로 오겠지만, 그들은 대부분 진지하고 도 아주 탐구적이다.
단순한 호기심만 가지고 오는 구경꾼도 있지만, 이 땅의 전통을 그 뿌리에서 느껴
보려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요즘이야 외국인을 보는 게 별다른 일도 아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청학동이 세상에 막 알려질 무렵 찾아온 외국인들, 특히 생김새가 너무도 다른
서양인들은 우리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세상에 별별 인종이 다 산다는
걸 새삼 실감케 해주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호기심을 갖고 우리는 도
그들에게 호기심을 가진 채 서로를 탐색하는 시선들이 순박하기조차 했다.
낯선 것들에 대한 호기심은 인생의 조미료와 같은 것이다.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사는 맛이 조금씩 달라진다. 새로운 만남 들에도 그런 맛이 있다.
특히 외국인들과의 만남은 또 다른 맛이 있다. 당장 말도 다르고 생김새도
틀리니 마주하고 있노라면 별세계를 보는 듯하다. 그래도 서로의 눈을 보고,
웃음을 나누고, 느낌을 나누다보면 결국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사람을 사람으로 확인하는 게 무슨 대단한 경험이냐 하겠지만, 그건 자기가
자신을 새삼스레 느끼는 것처럼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더불어 사는 같은
사람이라는 확인을 하고 나면 친밀감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그렇게 만난 외국인들
가운데 요즘도 가끔씩 떠올리는 이들이 있다. 영국인 아가씨 스잔 버빌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한국에 와서 한국말과 문화를 배우다가 지금은 자기
고국으로 돌아간 처녀다. 아니, 지금쯤은 아마 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청학동에 와서 보름 정도 지냈었는데, 참으로 솔직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녀의 한국말은 서툰 구석이 있었지만,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누가 보면 연애한다고 오해할 정도로 정겨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
끊임없이 탐구하는 그녀의 태도가 그렇게 지낼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 아닌가. 그녀에게는 우리의 모습이
미지의 세계요, 탐구의 대상이었다. 동양 정신의 속살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봤다고
느끼면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짓고, 선현들의 지혜가 담긴 말을 들으면 숨을
죽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만이 아니라 옷이며 음식이며 사람들의 행동거지가
다 그녀의 의문 부호에 걸리고, 그것이 끝내는 긍정과 감탄의 부호로 이어지곤
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나는 솔직히 반했다. 아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사람의 모습은 순수하고 아름답다. 그런 순수함을 나눌 때
서로가 인간임을 확인하고 그러면서 정이 쌓인다. 사 년 가까이 이 땅에 살면서
그녀는 많은 사람들과 그런 정을 나누었을 것이다. 살면서 그녀도 나처럼
청학동에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가끔씩 떠올릴까.
세월의 마술 덕에 추억은 대개 아름답게 색칠되어 있다. 일본의 NHK
방송국에서 온 사람들과의 사연도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당시에 그 사연은 자못 심각한 것이기도 했다.
청학동이 외부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NHK에서
청학동을 취재하겠다고 찾아왔다. 여자 프로듀서를 비롯해 일곱 명의 일행이
카메라를 비롯한 각종 장비를 들고 왔다. 타국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사람들이었으니 반갑게 맞아 주는 것이 도리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나라가 일본이라는 데 있었다. 한때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앗고, 인간으로서 차마
저지를 수 없는 온갖 잔학한 짓으로 동포들에게 고통을 안긴 민족이 아닌가.
어릴 때 나는 그런 일본놈을 하나 죽이겠다는 비장한 다짐까지 한 적이 있었다.
나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대부분도 역시 일본인들에 대한 적개심 같은 것을
품고 있었다. 백의민족의 가슴에 칼을 꽂은 민족이었으니, 어찌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그들을 보면서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물론
민족적인 분노가 솟은 것이지, 그 일본 방송인들에게 직접적인 어떤 위해를
끼치자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분위기를 느낀 그들은 조심스럽게 촬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우리의 뜻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호락호락 그들의 카메라 앞에
얼굴을 내밀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머리를 맞대고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하나의 방법을 찾아냈다.
"먼저 돌아가신 우리 조상님들께 위령제를 올리고,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해
사죄하라."
우리는 촬영의 조건으로 위령제와 사죄를 요구했다. 그러자 여자 프로듀서는
몹시 긴장이 되어 우리 눈치만 살폈다. 우리의 요구는 그들에게 단순한 촬영
조건만으로 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만약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살아서
청학동에서 나가지 못하리라는 엄중한 경고를 덧붙였기 때문이었다. 목숨 운운
하는 소리에 그들은 아연 긴장했다. 낯선 산속 오지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런 경고를 하니 그들이 위기 의식을 느끼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경고는 엄중한 것이었지만, 우리는 나름대로 예의를 갖추었다.
과거에 일본인들이 어떤 만행을 저지르고, 어떻게 동포들을 학살했는지를 말해
주었다. 취재를 온 당신들이야 직접적인 죄인은 아니지만 일본에서 태어난 걸
죄로 알고 사죄하라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뜻을 제대로 알라고, 우리는 점점 더
강력하게 요구했다.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취재차 왔다가 예상치 못했던 요구를
받고 일본인들은 저희들끼리 쑥덕거리며 대책을 강구하는 듯  보였다. 우리의
분노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졌다.
그 일본인들을 안내하기 위해 온 정부 관계자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만류하고
나섰다. 국가 위신 문제 운운하면서 그는 우리의 위협과 요구를 거둬들이고
취재에 협조해 다라고 했다.
"국가 위신?"
나는 그 말을 듣고 몹시 화가 났다. 무엇이 국가 위신인가? 민족에게 크나큰
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 국가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것인가.
아니면 사죄조차 요구하지 못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행동하는 것이
민족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것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단호해지는 우리를 보고 일본인들은 마침내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튿날 그들은 시장에 가서 제물을 마련해 왔다. 제단이 만들어지고
일본인들은 그 앞에 참회하는 표정으로 섰다. 그들이 진정 참회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요구 때문에 그런 시늉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분명 그
표정들만을 진지하게 보였다. 억울하고 비통하게 목숨을 잃은 조상님들에게
울리는 일본인들의 위령제는 엄수하고 경건하게 올려졌다. 그것만으로
조상님들의 혼이 편히 쉴 수야 없겠지만, 후손으로서 할 도리를 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 일본인들은 지난 과거에 저지른 죄에 대해서도 사죄했다.
위령제도 올리고 사죄도 받았으니, 우리도 그들의 취재를 위해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첫 대면에서의 갈등과 위기감은 사라지고 그들과 우리는 우의
속에서 며칠을 함께 보냈다. 지금도 텔레비전 뉴스에서 NHK를 보게 되면 그
당시의 일이 떠오르곤 한다. 다시 생각해 봐도 당시 우리의 행동은 잘한
일이었다. 그 일본인들도 많은 생각을 하며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셈인가. 일본의 지도급 인사라는 자들은 아직까지도
쉴새없이 망언을 해댄다. 지난날의 죄악을 참회하고 사죄하기는 교묘한 언술로
지난날의 잘못을 비켜가고, 심지어는 지은 죄 자체를 부인하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침략을 미화하기까지 한다. 우리 동포들은 죽음과 고통의 늪으로
빠뜨려 놓은 게 엄연한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한일합방을 정당화하고,
식민지배를 이 땅의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미화하고, 침략을 서구 열강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보호였다고 포장하고, 온갖 잔학한 학살과
만행을 부정해 버린다. 도대체 죄의식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작자들이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들이기에 이런 수작들인가. 같은 시기에 같은
죄를 저지른 독일을 보면 일본이 보이는 태도와는 천양지차다. 독일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 진정으로 참회하고 혹독하다 할만큼 철저하게 반성한다. 아직까지도
그들은 전범들을 잡아들여 죄를 묻고, 그렇게 함으로써 피해를 당한 민족에게
사죄한다. 그런 태도가 진정한 평화를 위한 전제 조건임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과거를 망각하는 것은 현실을 망각하는 것과 다름없는 짓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지은 죄를 반성하지 않는 족속들과 어떻게 평화와 우애를 나눌 수 있겠는가.
헌데 일본은 후안무치한 민족인가. 반성할 줄도 부끄러워 할 줄도 모르는
족속인가. 참으로 가증스러운 것은 망언을 내뱉은 후에 피해를 당한 주변
국가에서 들고 일어서면 망언을 취소하거나 반성하는 체하고, 잠잠해지면 다시
망언을 내뱉는 식으로 제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경제대국이 되었다는 오만함
때문에 그들 눈에는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다. 아니면 국민성 자체가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일본인 가운데도
적지 않은 이들이 과거의 죄를 진정으로 반성하고 참회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왜 반성하지 않는지 그 분명한 이유를 찾지 못하면 국민성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일본일들이 그런 태도를 보이는 데에는 혹시 우리의 잘못도 있는 게 아닐까.
일제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민족적 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엄중한 문책은 제쳐둔 채 그들의 돈과 기술을 부러워만 하고, 과거보다는 미래가
중요하다는 그럴 듯한 말로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없는 과거 망각증에 빠져서,
우리를 만만하게 보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분명 우리의 잘못도 있을 것이다. 반성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반성이 왜
중요한지를 가르쳐 주고 자극을 가해야 한다. 담을 쌓고 서로 다시 보지도
말자는 식으로 살겠다면 그럴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 보면 평화를 나누며 살아야 하는 이웃이다. 대립이 아니라 평화가
우리의 진정한 목적이다. 그 평화를 위해, 참된 이웃의 관계를 위해 반성하지
않는 자들에게 반성을 요구해야 한다.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면서 끊임없이
자극을 주어야 한다.
청학동에 와서 위령제를 올리고 사죄를 한 NHK 사람들이 진정으로 참회를
했는지를 알 수 없다. 세월이 또 흐른 지금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똑똑히 알았을 것이다.

법만 내세우는 망나니

얼마 전에 청학동에서 참으로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구경삼아 찾아온 한
청년이 있었다. 헌데 이 청년이 대낮에 술에 취해 온갖 추태를 부렸다.
수도하는 청학동이 아니어도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것도 대낮에 그런 꼴불견을
보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점잖게 청년을 꾸짖었다. 헌데 청년은
더욱 기고만장해져 소란을 피웠다. 할 수 없어 마을 어른 한 분이 청년의 뺨을
몇 대 때렸다. 말로는 통하지 않아 뺨으로 훈계를 한 것이었다.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도리도 망각하고 있으니 당연히 벌을 받은 것이다.
헌데 사태는 이상하게 돌아갔다. 뺨을 맞은 청년은 반성은커녕 경찰서에
찾아가 폭행을 당했다며 신고를 했다. 인간 같지 않은 행동을 했기에 훈계를 한
것인데 폭행이라니! 참으로 답답한 심정으로 청학동 사람들 몇이 경찰서로 갔다.
그런데 경찰관이 말이 또 놀라웠다. 청학동 사람들은 사람으로 취라 도리, 바로
윤리를 말했다. 윤리에 너무도 벗어났기에 그것을 가르쳐 준 것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관은 청년과 마찬가지로 법을 내세웠다.
청년이 폭행을 당했다고 끝까지 주장하는 이상, 자기의 관심은 그것밖에 없다는
투였다. 벌금을 물 수도 있으니 그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청년을 잘 달래라는
것이었다. 법대로 하면 훈계를 한 쪽이 벌을 받는다는 얘기였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인간 같지 않은 행동을 했기에 따끔한 훈계를 한
것인데, 그것이 법으로 보면 죄가 된다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지만 문제는 이런
일이 결코 예외적인 불상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윤리는 땅으로 떨어지고, 그
자리에 법이 대신 우뚝 서서 눈을 부라리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조금이라도
갈등이 생기면 윤리로 봐서 죄를 지은 자도 법대로 하자고 덤벼들곤 한다. 그때
법은 사회를 유지하고자 만든 약속이 아니라 윤리 파괴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된다.
윤리를 저버린 자가 법적으로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기막힌
노릇인가. 그런 세상이고 보니 지나가다 어른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누구
하나 충고하는 이들이 없다. 인사를 하지 않아도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충고는커녕 인사는 받지 않아도 좋으니 봉변만 당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어른들이 태반이다. 길거리에서 못된 짓을 하는 청소년들을 봐도 모두 슬금슬금
피하기만 한다. 공연히 훈계를 하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환경이 만들어 놓은 이러한 어른들의 무관심 속에서 못된 짓을 하는 아이들은
점점 더 나쁜 세계로 발을 들여 놓게 된다.
현실이 이러니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 것이 길가는 노인네에게 담배를
좀 달라고 하는 짓을 거리낌없이 하는 게 아닌가. 노인네가 담배가 없다고 하자
어린 것 왈, 담배 좀 가지고 다니라고 했단다. 그리고는 침을 탁 뱉고 가더란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쩌다 세상이 이
지경까지 되었단 말인가.
이제는 어른도 아이도 따로 없는 세상이 되었다. 부모도 모르고 형제도 모르는
망종들이 활개를 치고 다닌다. 선생도 없고 선배도 없는 무례한 것들이 얼굴을
빳빳이 들고 다닌다. 심지어는 부모를 죽이고도 법망을 교묘하게 피하기만 하면
살 수 있다고 믿는 인간 아닌 인간들까지 등장한 세사이다. 이 모든 일들이
도대체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나라에서 어찌 벌어진단 말인가. 동방예의지국이
아니어도 좋다. 어찌 사람 사는 땅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도리, 윤리가 땅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왜 이토록 윤리가 땅으로 떨어졌을까. 말할 것도 없이 사람 교육이 잘못
되었고, 우리의 현대사가 그렇게 조장한 탓도 있다. 윤리를 세워 사회를
이끌어가려는 세력은 점점 영역을 잃어버리고, 법만으로 사회를 유지하려는
세력들이 득세한 세상이 바로 이 나라의 현대사이다. 물론 법만을 내세운다고
법을 자 지킨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윤리가 서지 않았는데 법이 제대로 설 리도
없다. 그래도 목소리 높여 법만 계속 앞세운다. 그러다보니 윤리에 어긋나는
짓을 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커녕 법망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안도하는
이들이 구더기떼처럼 들끓는다. 권력을 잡기 위해 숱한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만들어 놓고도 법망만 교묘하게 피하면 된다고 믿는 무리들이 그 표본이 아닌가.
공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죄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라 했다. 양심의
부끄러움을 모르면 세상에 못할 짓이 없다. 윤리 의식이 마비된 상태에서 양심의
부끄러움을 느낄 수 없다. 따라서 문제는 바로 윤리인데, 사람을 만들어야 하는
학교 교육의 현실을 보면 그것은 입시에도 영향이 없는 천덕꾸러기 과목으로
전락해 버린 정도다. 가정 교육의 현실도 오십보 백보다.
사람이 사는 땅이 이래서야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이네라도 국가는 윤리를
앞세우는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 각종 제도를 법보다 우선적으로 윤리와
접목시키고, 교육의 목적도 그 앞자리에 윤리를 두어야 한다. 법은 어떤 행위의
결과만을 보고 판단하지만, 윤리는 그 근본적인 원인에 시선을 둔다. 병을 치료할
때도 근본적인 원인을 캐야 온전한 치료가 되지, 밖으로 드러난 증상만 보고
그것만 다룰 때는 진정한 치료라 할 수 없다. 윤리에 대한 강조를 제발
도덕군자연하는 자들의 공연한 한담이라고 치부하지 말라. 윤리 회복의 시급성과
중요성을 간과하노라면 세상은 망할 수 있다.
결코 그냥 한번 해보는 엄포가 아니다. 이제 세상은 천재지변보다는 인재를 더
두려워하고 있다. 과거에는 천재지변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으나, 오늘날 그것으로
지구가 망하리라 우려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대신 인재가 불러올 재앙이
지구를 망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현실 속에 꿈틀거리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핵 귀신이다. 통제력을 잃은 괴물 같은 인간이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그 결과는 물론 공멸이 될 것이다. 이것은 현실성 없는 단순한
가상이 아니라,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로 현실화 될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인간은
자기가 만든 무기를 사용해 보지 않고 폐기해 버린 역사가 없다. 현재 지구가
안고 있는 문제는 모두 인간의 문제다.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재앙을
몰고 올 수도 있고, 유익한 문명으로 가꾸어 나갈 수도 있는 문제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핵 귀신, 공해 귀신, 전쟁 귀신, 에이즈 귀신.... 숱한 귀신들이
인간을 노려보고 있다.
같은 물이라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된다. 인간은
하기에 따라서 뱀이 될 수도 있고, 소가 될 수도 있다. 어떻게 사람은 뱀이
아니라 소가 될 수 있을까. 첨단 과학 기술을 익혀서? 지식을 머릿속에 가득
채워서? 법을 유일한 독본으로 삼아서?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아니다.
오로지 길 하나가 있을 뿐이다. 인간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문명과 문화를
창조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인간의 질을 높이는 것뿐이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리, 즉 윤리를 바로 세워야 하는 일이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핵, 공해, 전쟁, 에이즈를 비롯한 그 어떤 귀신도 두려울 게 없다. 사람이
우선적으로 세워야 할 것이 윤리요,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또한 윤리다. 그러나
질이 낮은 인간들은 윤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법이다.
비열한 사기꾼들은 법망에 피하려고 갖은 교활한 꾀를 다 생각해 내고, 법을
교묘하게 이용해 선량한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법의 허점 역시
그들이 늘상 노리는 단골 수단이다. 어찌된 셈인지 세상에는 비열한 사기꾼과
같이 윤리에 눈감아 버리는 인간들이 득실거린다.
인간보다 물질을 더 믿는 기계적인 인간은 윤리보다는 수치에 더 마음을 쓴다.
인간보다 돈을 더 믿는 경제 동물 같은 인간은 윤리보다 이익에 더 마음을 쓴다.
인간보다 권력을 더 믿는 출세지상주의 자들은 윤리보다 힘에 더 마음을 쓴다.
그 이외에도 인간보다 더 중요시하는 것들을 갖고 있는 인간들이 많다. 이들이
바로 맑은 물을 우유가 아니라 독으로 만드는 존재들이다. 핵 귀신을 비롯한
온갖 죽음의 귀신을 불러올 수 있는 자들이다.
윤리는 바로 세우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는 선택 과목이 아니다. 이
땅에서 인간이 인간으로 살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떠안고 있는
삶의 최우선적인 필수 과목이 되어야 한다. 비록 윤리가 땅에 떨어졌지만, 다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는 비관적인 소리는 하지 말자. 지금부터라도
인간으로 향하는 물꼬를 트면 된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와 사회가 나서서 할
일이 있고 가정과 개인이 할 일이 있다. 국가를 이끌어가는 기본 발상에서부터
하나의 제도까지 모든 물꼬는 윤리를 세우는 인간 쪽으로 향해야 한다.
방법상에서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우리 전통 속에는 성년식이라는 게
있었다. 나이 스무 살이 되면 남자는 관을 쓰고 여자는 쪽을 찐다. 그런
의식에는 성인이 되었음을 알리고,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음과 동시에 의무가
주어진다. 이를 관혼상제의 앞머리에 있는 관례라 한다. 이런 성년식을 부활해
우리의 관습으로 삼는 것도 윤리를 세우는 방법 가운데 하나의 예가 된다.
효자상을 받으면 남의 눈을 의식해서라도 효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주변의
환경은 인간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성년식을 통해 스스로 성인임을
자각하게 되면 세상을 보는 눈과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 성인으로서 할 도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형식적인 성년식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챙기면서 윤리의 중요성을 삶 속에서 깨닫고 실천하자는 것이다.
그런 노력 없이 땅으로 떨어진 윤리가 어느 날 갑자기 세워지지는 않는다.
윤리가 바로 서는 날이 오면, 작게 보면 인간의 도리에 벗어난 짓을 해 어른한테
뺨 몇 대 맞은 것 가지고 법으로 달려가는 망나니는 보지 않을 수 있을 것이요,
크게 보면 파괴를 재촉하는 어떤 귀신도 인간 스스로 물리쳐 평화로운 지구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법만 앞세우고 윤리를 뒷전에 처박아둘 것인가.

유교에 대한 오해

볼 일이 있어서 외지로 나갈 때마다 나는 묘한 기대감 같은 것을 갖는다.
오늘은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눌까.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내게 무엇을 기대하고, 나는 또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특히 사사로운
만남이 아니라 강연을 비롯한 공적인 만남일 경우 그 기대는 자못 크다. 낯선
사람들과의 대면은 가까운 지인들과의 반가운 회동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낯선 만남들이 신선한 것은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말들이 그 상대방에겐
익숙하지 않은 것이 되고, 상대방이 내게 하는 말 역시 내겐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인생관이 달라서이기도 하겠지만, 하루하루의 생활과 관심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다르다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 그렇게 다른
것이 없다면 어떤 만남에 새로움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헌데 그렇게 서로 다르다는 것 때문에 때로는 서로가 오해의 늪에 빠지곤
하는데, 그 늪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지 못하면 서로에게 짜증스러움을 느끼게도
된다. 오해를 하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자신이 오해를 하는 게 아니라고 끝까지
주장하는 상대방과 마주하고 있노라면 짜증이 생긴다. 상대방도 자신이 오해를
하고 있음을 모르니 내게 짜증이 날 것이다. 물론 내가 오해를 하면서 오해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때도 있을 것이다. 내가 낯선 사람들과 만나면서 가장 자주
느끼는 것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유교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강연차 서울에 갔다가 우연히 만남 한 지식인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은
유학을 다녀와 대학에서 강사 노릇을 하고 있었다. 가벼운 술자리에서 일행들과
함께 어울렸는데, 처음엔 말없이 앉아 있던 그가 말문을 여는가 싶더니 이내
유교에 대해 독설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요지는 대충 이랬다. 유교는 지배
이데올로기일 뿐 이간에게 희망을 주는 종교도, 사상도, 철학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종교와 비교까지 했다. 속세의 사사로운 것과는 인연을 끊고
최고의 깨달음을 찾아가는 불교는 그 나름의 종교적인 의미가 있고, 기독교 역시
분명한 내세관을 가지고 있는 등 종교적 바탕이 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유교는 왕을 잘 받들고 부모 잘 모시고, 하는 식으로 상하관계의 윤리만 강조하니
그게 현대 사회에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성격이 느긋한 편이 못 되지만 나는 그의 열변을 묵묵히 다 들었다. 오해
가운데서도 조금 안다는 사람들의 오해가 풀리기 힘든 법이다. 우선 나는 그에게
유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무슨 그런 질문이 있냐는
식으로 쳐다봤다. 그래서 조금 구체적으로 물었다. 혹시 율곡이나 퇴계에 대해
무엇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두 분이 조선시대 사람이라는 것
정도였다. 다시 논어나 대학 같은 유교 경전을 읽어 봤냐고 물었다. 술기운이
조금 오른 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군신유의, 부자유친
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 아니냐고 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 보았다. 수신
제가 평천하가 무슨 뜻인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제야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이
나왔다는 표시였다. 헌데 이게 어찌된 셈인가. 그는 다시 기회를 잡았다는 듯
또 어긋난 비난을 퍼붓는 게 아닌가. 학교에서 그 기본적인 뜻을 배운 모양이라,
먼저 뜻풀이부터 시작했다. 자기 수양을 하고 나서 집을 제대로 정돈한 후에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라 했다. 그런 후에 그것이 바로
요즘 문제가 되는 가족 이기주의의 뿌리가 되었다고 엉뚱한 비판을 하는 게
아닌가. 수신과 제가를 앞세우다 보니 유교적 전통에 빠진 사람들이 도대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고 제 집만 잘 꾸미고 제 가족의 행복만 찾는다는
것이었다.
"어불성설!"
마침내 짜증이 난 나는 그의 독설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었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는 유교의 가르침 가운데서도 핵심적인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엉뚱한 비난을 하는 것을 참고 들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와 일행에게 그 말의 참뜻과 가르침을 좀 말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유교의 핵심이 거기에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다행히 모두들
기꺼이 동의해 주었다.
대학은 예로부터 논어나 맹자보다 앞서서 배워야 하는 것으로 그 중요성이
강조되는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전이다. 그 대학에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
대한 말이 나온다. 먼저 수신부터 나오는 경전의 가르침을 그대로 보자.

이른바 자신의 덕을 닦는 것(수신)이 자기의 마음을 바로하는 데 달렸다는 것은,
그 마음에 성내는 것이 있으면 그것의 올바른 상태를 얻지 못하고, 그 마음에
두려워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의 올바른 상태를 얻지 못하고, 그 마음에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의 올바른 상태를 얻지 못하고, 그 마음에 근심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의 올바른 상태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거기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느끼지 못한다. 이런 것을 두고 자신의 덕을 닦는 것(수신)은 자기의 마음을
바로 하는데 달렸다고 하는 것이다.

수신의 장은 제가의 장으로 이어진다.

이른바 자기 집을 제대로 정돈하는 것(제가)이 수신에 달렸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란 자기가 가까이 하고 사랑하는 것에는 치우치게 굴게 마련이고, 자기가
천하게 생각하고 미워하는 것에는 치우치게 굴게 마련이고, 자기가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것에는 치우치게 굴게 마련이고, 자기가 슬프고 불쌍히 여기는 것에는
치우치게 굴게 마련이고, 자기가 오만하고 게으르게 다루는 것에는 치우치게 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렇기에 좋아하면서도 그것의 나쁜 점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것의 좋은 점을 아는 사람이 천하에 드문 것이다. 예로부터 사람이란 자기
자식의 악한 면을 알지 못하고, 자기 곡식의 싹이 큰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런 것은 수신이 되어 있지 않으면 자기 집을 제대로 정돈 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제가의 장은 다시 치국의 장으로 이어진다.

이른바 나라를 다스리려면(치국) 반드시 먼저 제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자기
집을 가르칠 수 없으면서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없이 때문이다. 그래서
군자는 집에서 나가지 않고서 나라에 가르침을 이룩한다고 하는 것이다.
효도라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길이 되고, 우애라는 것은 어른을 섬기는 길이 되고,
자애라는 것은 여러 사람을 부리는 길이다.
...
한 집안이 인자하면 온 나라에 인자한 기풍이 일어나고, 한 집안이 겸양하면 온
나라에 겸양하는 기풍이 일어나고, 한 사람의 탐욕이 지나치면 온 나라가 난동을
일으킨다. 그 기틀이 이와 같다. 이것은 곧 한 마디의 말이 일을 깨뜨리고, 한
사람이 나라의 방향을 정한다는 것을 이른다.
...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자기가 갖춘 후에 남에게 그것을 갖추도록 말하고,
자기가 먼저 비난받을 소지를 없앤 후에 남에게 그것을 비난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남의 경우에는 용서하여 주지 않으면서 그 일을 승복시킬 수 있는
사람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자기 집을 제대로 정리하는
제가에 달려있다.

치국의 장에는 이런 말들이 덧붙여져 있다.

집안 사람들에게 잘해야 나라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고, 형에게 잘하고
동생에게 잘해야 나라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고,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형으로서
동생으로서 본받을 만해야 백성들이 본받는다.
집안에서 아버지로서 본받을 만하지 못한 사람이 어찌 이웃의 본받을 만한
사람이 되고, 많은 대중들의 본받을 만한 사람이 되겠는가. 너무도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치국은 제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온 세상을 화평하게 하는 평천하의 장은 그것이 또 치국에 달려 있음을 말한다.

이른바 천하를 화평하게 하는 것(평천하)이 치국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은,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노인을 노인으로 모시면 백성들 사이에 효성의 기풍이
생기고,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연장자를 연장자로 모시면, 백성들 사이에 우애의
기풍이 생기고,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고아를 불쌍히 여기면 백성들이 배반하지
않는 법이다. 그렇기에 군자는 척도로 살펴보는 방법을 갖고 있다.
웃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그런 태도로 나는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 것이며,
아랫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그런 태도로 나는 웃사람을 섬기지 말 것이며,
앞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그런 태도로 나는 뒷사람에게 먼저 하지 말 것이며,
뒷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그런 태도로 나는 앞사람과 상종하지 말 것이며, 오른쪽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그런 태도로 나는 왼쪽 사람과 사귀지 날것이며, 왼쪽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그런 태도로 나는 오른쪽 사람과 사귀지 말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덕이 있음을 뜻한다. 평천하의 장은 더욱 강조한다. 덕이
있으면 그것에 따라 사람이 생기고, 사람이 있으면 그것에 따라 땅이 생기고, 땅이
있으면 그것에 따라 재물이 생기고, 재물이 있으면 그것에 따라 쓰임새가 생긴다.
덕이 근본이요 재물은 말단적인 것이다. 헌데 근본인 덕보다 말단인 재물이
중요시되면 백성을 서로 다투어 빼앗는 짓을 하게 된다. 화평을 깨지는 것이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진리를 가족 이기주의로 비난한 것은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말이 아닐 수 없다.
자기 마음을 바로하지 못해 수신을 못하고서 어찌 자기 자식은 자식의 악한
면을 알아챌 수 있을까. 자식의 악한 면조차 보지 못하니 집을 제대로 정돈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또한 제가를 못해 가족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이웃과 대중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겠는가. 존경받지 못하고
가르침을 줄 수 없는 처지에서 치국을 논하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또한
치국을 이루지 못하면서 천하의 화평을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덕이 없어 오른쪽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그런 태도로 나 역시 화풀이로 왼쪽
사람을 대할 때, 거기에는 다툼이 생길 뿐 화평을 기대할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 바로 앞에 있는 아버지 혹은 아들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인류
평화를 말할 수 있겠는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는 기계적인 단계를 말하는 게
아니라 덕이 바탕이 되는 이치요 진리다.
시냇물들이 맑아야 그것들이 모이는 강물은 맑을 수 있고, 강물들이 맑아야
바다가 맑을 수 있다. 수신과 제가를 앞세우는 것은 바다가 맑으려면 근원이
되는 시냇물과 강물이 맑아야 한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헌데 그 전체를 보지
못하고 제가를 마치 강물만 맑으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니 딱한 노릇이다.
비단 그 강사만 유교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떤 이는 여성을
억압하는 이념이라고, 어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봉건 시대의
유물이라고, 어떤 이는 허례 허식에 치우친 고리타분한 예법이라고 오해한다.
오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왜 많은 사람들은 그토록 유교에 대해 오해하고 있을까. 가장 큰 이유는
교육의 문제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통 문화와 전신에 대한 교육은 수박
겉핥기식이거나 아예 없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모두 서양 학문에만
매달린다. 서양의 철학과 사상에 대해서는 줄줄 외우는 사람이 퇴계와 율곡이
어떤 가르침을 주었냐고 물으면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학문이며
세계관이며 서양 귀신에 홀리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하고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찾겠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나를 알지 못하고는 남을 알지 못하고 우리를 알지 못한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처지에서 남을 안다고 똑똑한 체하는 것은 세상의 첫 번째 웃음거리가
된다. 우리가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가야 할 길로 가야 할 것이 아닌가.

다종교 사회에서 사는 지혜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종교적인 성향으로 보면 참으로 복잡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직장에서는 기독교적인 태도를 지닌다. 합리적인 판단과 개성을
존중하고 세계관 역시 다분히 기독교적이다. 천당에 가기 위해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지은 죄는 회개하여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헌데 그는 고향에 가면 태도가 조금 달라진다. 유교적인 가치관을 존중한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물론 가족이나 친지들과의 관계에서도 유교적인 예법과
덕성을 찾는다. 그 가치관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화가
치밀거나 멸시하는 마음이 생긴다. 집안의 분위기 탓도 있겠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익숙한 유교적 전통이 몸에 배어 있다.
그의 변화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친구의 요절을 비롯해 가까운 주변의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그는 허무를 느끼고 불교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죽음이야
모두 슬픈 것이요 허망함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기는 하다.
헌데 죽은 이들이 천당이나 지옥, 어느 한 곳으로 갔다는 생각은 그에게 들지
않는다. 그저 가슴에 차오르는 느낌은 허무다. 그는 공수래 공수거하는 인생의
허무에 빠져든다.
직장을 그만두고 작은 사업체를 경영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인다. 개업식에서 고사를 지낸 것은 물론이요 점쟁이를 찾아가 부적을 쓰기도
한다. 무속 신앙에 의지한 셈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만 사업이 망해 버렸다. 그때 그의 마음속으로 파고든
것은 도교적인 인생관이다. 사람의 인위적인 행위들이 무위의 도 아래서 하찮아
보인 것이다.
또 한 여자가 있다. 그녀에게 가끔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은 끊지
못하는 유혹이 된다. 운명철학관을 찾아가 어떤 남자와 자신의 궁합을 맞춰
보기도 한다. 또 어쩌다 여행을 떠나 사찰에 가게 되면 부처상 앞에서 합장을
하는데, 거기에 거리낌이 없다. 명절날 온 가족이 모일 때 유교적인 분위기에
젖어드는 데도 마음에 걸림돌이 없다.
이 남자와 이 여자는 외국인들의 눈에는 참으로 기이하게 보일 것이다. 물론
외국인이 아니어도 어느 한 종교의 독실한 신자들은 두 사람을 질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상당수는 이 남자와 이 여자를 별스런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로 자신들의 모습과 유사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종교 백화점 혹은 종교 박람회장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냉소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표현이다. 어쨌거나 여러 민족 종교를 비롯해
지구상에 널리 퍼진 종교 가운데 들어오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종교들이
저마다 사람들을 차지하고 있다. 각 종교단체에서 발표하는 신자 수를 합치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보다 많다는 소리도 들린다.
이런 현실이고 보니 종교백화점이라고 냉소적으로 불러도 할 말이 별로 없을 것
같다. 물론 종교의 수가 많다는 것 그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가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해서 어떤 풍성함을 느끼기보다는, 그것으로
인한 타락성을 훨씬 많이 보아 왔다.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된다.
대표적인 것이 외형에 치우치는 종교의 부실함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내실을
기하기보다는 양적 팽창에 몰두해 왔다. 많은 종교가 존재하니 서로 먼저, 많은
사람들을 자기들의 세계로 잡아당기려 한다. 적지 않은 교회와 사찰은 그 규모가
커지는 것이 목적인 양 거기에 매달린다. 자기들 세계에 참여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호들갑을 떠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기들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간다고 가당찮은 협박을 하는 이들도 있다. 모두가 자기들 종교의 영향력을
넓히려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팽창 현상은 종교의 목적과 수단을
혼동시키기까지 한다. 진정한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목사와 교회를 더 중시하는
듯한 태도, 진정한 부처의 가르침보다는 승려와 사찰을 더 숭배하는 듯한 태도,
진정한 공자의 가르침보다는 유림과 사당을 더 숭상하는 듯한 태도, 이런 왜곡된
태도들이 종교 현자에 널리 유포되어 있다.
내실보다는 외형에 치중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우리나라에 종교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놀랄 정도로 많지만 불행하게도 진정한
종교인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고 말한다. 종교 단체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참다운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적다는 뼈아픈 충고인 것이다.
실제로 나는 성직자를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장사꾼보다 더 세속적으로
타락한 이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장사꾼은 물건을 파니 스스로의 할 바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성직자들은 감히 성스러운 말을 입에 올리면서 그 대가로
세속적인 욕망을 누리려 한다. 그들은 성전을 위선적인 이익 단체로 전락시킨다.
성인들의 훌륭한 가르침을 자기들 단체를 유지하고 팽창시키는 수단으로만
이용한다. 거기에 참다운 신앙이 없음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다.
물론 종교의 타락이 다종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만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종교백화점이라 불리는 우리나라의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임에는 틀림이 없다.
종교는 많은데 진정한 종교인은 드물다는 이 기이한 현상은 종교인들이
외형보다는 내실에 충실할 때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가 많아서 문제가
아니라 내실을 기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에 다양한 종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한 남자가 아침에는 기독교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가 저녁에는 불교적인 태도를
갖는 것 역시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천지인 심신일체사상을
기본 바탕으로 다종교 속에서 살아온 민족이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를 보면 대개 국교라 부를 정도로 상대적으로 우세한 종교를 하나씩
갖고 있다. 신교와 구교로 나뉘어 있기는 하지만 기독교 국가라 부를 수 있는
나라들이 있고, 또 회교 국가, 불교 국가 등으로 불리는 나라들이 있다. 일본과
같이 외래 종교가 들어갈 틈이 별로 없는 나라도 있다.
헌데 우리의 경우는 다양한 종교가 어느 정도의 균형을 이룬 채 상존하고 있다.
과거 5백년 유교를 바탕으로 역사를 이루어 왔고, 의식의 기저에 그 정신이 배어
있어 나라 안팎에서 유교적 전통을 지닌 국가라 부르기는 하지만, 요즘 세상에서
딱 꼬집어 유교 국가라 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렇다고
불교 국가 혹은 기독교 국가라 부를 수도 없다.
왜 이런 종교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를 따져보면 삼신일체사상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향이 하나의 종교를 구교처럼
가지고 있거나 외래 종교가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 성향보다 열등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넓고 크게 포용하는 깨어 있는 민족임을, 그런 민족의 성향임을
자부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다종교 일체사회에서 사는 지혜를 익히면 독특한 우리의 종교적 성향도
장점으로 키워갈 수 있다. 다행히 우리는 다종교 사회라 해도, 종교간의 갈등이
그리 심각한 편은 아니다. 종교의 타락상이 오히려 더 큰 문제이지 종교끼리의
갈등은 평화를 깰 만큼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닌 것이다.
세계 역사와 현실을 보면 종교간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하고 적대적인 것이 될
수 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떤가. 한 건물 안에
교회와 성당 그리고 사원이 어울려 있다는 것을 군대를 갔다온 사람이면 누구나
알 것이다. 또 국장이나 사회장을 보면 어떤가. 거기에는 으레 목사와 사제가
등장하고 독경하는 스님도 함께 나온다. 그러한 광경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놀라운 진풍경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는 곳곳에서 종교 전쟁을 치르고 있다. 노골적으로
종교를 앞세우는 전쟁은 아니라 해도, 속내를 들여다보면은 종교 전쟁과 다름없는
것들이 많다. 회교도와 유대교도 사이의 전쟁은 중동을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게
만들었고, 유교 연방에서 분리된 나라들은 지금 민족과 종교의 차이로 참혹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 전쟁에서는 인종 청소라는 말까지 나온다. 종교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는 것이다.
기독교도와 회교도들의 반목과 전쟁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다. 힌두교도, 불교도들도 타종교와의
전쟁을 회피하지 않는다. 같은 종교 안에서도 싸움은 치열하다. 기독교를 보면
신교와 구교가 서로 다투었고, 그 후유증은 지금도 남아 있다. 같은 형제라는
회교도 안에서도 파벌을 지어 심각하게 갈등하고 때로는 전쟁도 불사한다.
지구 전체를 보면 그야말로 다종교 사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더불어 함께
평화를 누리며 사는 지혜가 없기에, 저마다 자기 종교만을 앞세우고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나 국가는 적이 되고, 그래서 늘상
갈등하며 갈등이 극에 달하면 전쟁을 일으킨다.
다종교 사회인 지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우리나라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상대 종교를 적대시하는 성향에 빠져 있지는 않다. 타락한 부분을 서로
질책하기는 해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원수가 되지는 않는다. 이 얼마나
지혜로운 종교적 태도이며, 우리는 또 얼마나 훌륭한 양면성을 갖춘 민족인가.
어느 한 종교에도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당히 어울리는 것이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냉소적으로 과소평가하고 싶지 않다.
지혜로운 성향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 그럴까. 예수의 가르침인 사랑이 부처의
가르침인 자비와 어떻게 적대적일 수 있고, 부처의 가르침인 자비가 공자의
가르침인 어짐과 어떻게 반목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종교의 본 모습을 찾고 참된 신앙에 들어가면 다른 종교는 적이 될 수 없다.
각 종교가 내세우는 성인들의 진정한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면 다른 종교인들이
갈등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참된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지 않을 때 공연히 다른
종교에서 트집을 잡는 것이다.
학생의 입장에서 선생님들을 보자. 한 학교에 훌륭한 선생님이 몇 분 계신다고
하자. 어느 학생은 그 선생님들 가운데 한 분을 특히 존경 할 것이다. 또 다른
학생은 다른 분을 존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이
있다고 다른 선생님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다른 선생님을 존경하는 다른 학생을
또 비난하고 경시할 수 있겠는가. 모두 나름대로의 개성이 있고, 그것은 서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어느 한 선생님만이 아니라 여러 선생님을 함께
존경한다고 그걸 이상하다고 할 수 있는가. 편을 가르고 모두 자기만 옳다고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청학동에서 유불선 합일의 삼신사상을 신앙의 근본으로 삼는 것은 보다 많은
가르침을 얻고, 그것을 바탕으로 보다 깊게 깨우치기 위해서다. 유에서 깨달을
것이 있고, 불에서 깨달을 것이 있고, 선에서 깨달을 것이 있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듯, 하늘과 땅과 인간이 서로 어울릴
때 도를 얻을 수 있듯, 다양한 가치를 하나로 모아 최고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지리산의 최고봉은 청왕봉이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오르는 길은 다르지만 오르고자 하는 곳이 천왕봉이라면 목표는 하나가
된다. 오르는 길이 다르다고 목표가 다른 것은 아니다. 일단 천왕봉에 오르면
모든 것이 다 내려다보인다. 숱한 길이 다 내려다보인다.
물론 천왕봉이 하나라고 아무렇게나 오를 수는 없다. 잘못된 길을 고집하면
결코 천왕봉에 오를 수 없다. 잘못된 길, 그것은 종교로 말하면 다른 종교를
말하는 게 아니라 타락한 종교, 사이비 종교를 말한다. 산을 헤맬 뿐인 잘못된
길과 결국 천왕봉으로 오르게 되는 다른 길은 구분되어야 한다. 가장 빠르게
오르는 길만 내세울 일도 아니요, 풍경이 좋은 길만 자랑할 것도 아니다.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평화를 누리며 사는 것, 그것이 종교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가 아니겠는가. 그곳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고
마찬가지로 여러 길이 있다. 어느 한 사람이 이 길로 가 보다가 저 길로도 가
보고 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다른 길로 가는 것도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길이 다른 것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결국 하나가
되어 만나는 최고의 고지로  오른다는 것 그 자체다.

종교의 노예가 되려는가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어떤 사람은 존재한다고 경건하게 대답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부정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미 신은
죽었다고 침통하게 말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존재 여부에 관심이 없다고
퉁명스럽게 대꾸할 것이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신의 존재를 믿기에 이렇게 다시 물어 본다. 신은
왜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대답할 것이
없겠지만, 적어도 그 존재를 믿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대답해야 한다. 도대체
신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 역시 하나로 모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신의 존재는 그 자체가
신의 섭리이지 인간이 따져물을 것이 아니라고 근엄하게 말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신의 유일한 존재 이유라고 대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그 존재 이유를 명확히 알 수는 없다고 답을 피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신의 유일한 존재 이유라고 믿는다.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신은 왜 있겠는가. 설사 그 어떤 다른 이유를 댄다 해도
그것은 이미 인간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 된다. 관계가 없는 것이라면 인간이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는 것이다. 신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보노라면 이 명제가 뿌리째 뒤흔들리고 있음을 느낀다. 신
혹은 신을 앞세운 종교 집단을 위해 인간이 있는 것 같은 현상이 보이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먼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주의 중심은 은하계의 핵인 태양계이며, 태양계의 중심은 지구이고, 지구의
중심은 바로 인간이다. 바꾸어 말하면 태양계를 중심으로 우주는 운용되고,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계는 존재하며, 인간의 기를 중심으로 지구는 운용된다.
결국 우주의 주인공은 인간이다. 우주는 형체요, 그 주인공인 사람은 형체를
의미있게 하는 혼이요 넋이요 생명력이니 한 마디로 신인 것이다. 혼이 없고,
넋이 없고, 생명력이 없다면 우주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주를 의미있게 하는 주인공이 사람이요 신이라면 그 둘은 어떻게 구분이
될까. 모든 사물에는 본말과 내외의 양면성이 있으니, 형이상 내면심계로
도달하면 사람을 구분하여 신이라 하고, 형이하 외면물계에 얽매여 있으면 신을
구분하여 사람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내면인 뿌리는 신이요, 신의 외면인 결과는 사람이다.
사람의 뿌리인 신 또한 사람 안에 존재하니 내외는 일체요 본말은 하나이다.
신과 사람은 둘이 아니다. 내면만 있는 신은 반쪽의 존재밖에 되지 못하니,
외면까지 더해져 신이 입체화된 것이 바로 사람이다. 그러니 사람은 신의
완제품인 것이다.
진리를 입체화한 것이 신이라면, 그 신이 내면뿐 아니라 외면까지 갖춘 완전한
존재로 현상된 존재 역시 사람이다. 신의 씨앗은 섭리요, 신의 결과는 사람이다.
씨앗의 가치는 그 결과로 인증받듯이 신의 가치 또한 사람을 통해서 인증되고
빛이 나는 것이다. 사람은 신을 때로는 섭리로, 때로는 도로, 때로는 이름 그대로
신으로, 때로는 우주의 생명력인 에너지로 알고 그렇게 부른다. 그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다. 불완전하다고 스스로 느낀 사람이 우주의 주인공으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섭리니, 도니, 신이니, 우주 에너지니 하는 것들을 찾고 그렇게 부른
것이다.
다시 본래의 의문으로 돌아가 보자. 신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 신은 인간에게
섭리니 도니 하는 진리를 전달하는 수단이요 매개물로 존재한다. 진리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사람은 신을 모델로 내세운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했다. 부처는 천상천하에 자신이 가장
존귀하고, 중생이 깨달으면 모두 부처라 했다. 예수가 말한 자신과 부처가 말한
자신은 누구인가. 바로 사람이요, 사람이 도달하고자 하는 모델이다. 동학을 연
수운 최제우는 인내천이라 하여 사람이 하늘이요, 하늘이 사람이라 했다. 사람이
곧 하늘이요, 깨달으면 부처요, 예수를 본받으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예수의 인격, 부처의 인격, 공자의 인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 성인들을 존경하고 모델로 삼으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은 그 성인들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법을 행하고 진리를
따르면 그것이 제자가 되는 길이다. 그러나 제자가 아니라 노예가 되는 일이
많이 벌어진다. 스스로 법을 행하고 진리를 따를 생각은 않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그 성인들에게 매달려 성인들이 무슨 은총이라도 내려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법을 행하고 진리를 따르며 사는 삶은 뒤로 제쳐둔 채 숭배만 하면 은총이
내린다고 믿으니 노예가 아니고 무엇인가.
십자가건 부처상이건 공자의 영정이건 그 자체를 신성시하여 믿는 것은 노예가
되는 길이다. 그것들은 하나의 상징이요 이념의 장일 뿐이다. 진정 신의 존재를
믿는 다 하는 것은 그 성인을 모델로 삼아 자신이 예수와 부처와 공자와 닮은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을 이른다. 진리를 배우면서 매달릴 곳은 성인이나
신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세계가 된다. 자기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복을 누가 주는가. 내 자신이 내게 준다. 죄는 또 누가 주는가. 내 자신이 내게
준다.
내 자신부터 자신에게 사랑받고 존경받고 신뢰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면
사랑과 존경과 신뢰를 받을 것이다. 노력을 하지 않아 내 자신부터 자신에게
사랑받고 존경받고 신뢰받지 못하기 때문에 남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 누구도 사람을 버리지 못한다. 버릴 권리가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자신을 버렸기 때문에 남들이 버릴 뿐이다. 한 마디로 인생의
길흉화복은 내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사람이 먼저 깨달은 성인들을 존경하는 것은, 몸과 마음을 활용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배우고 자신의 본체를 찾아 그 성인들과 같은 인격을 갖추고자 모델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인을 숭배하고 믿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배우고
행하는 것이 진정 중요한 것이요, 사람이 할 일이다. 신과 종교의 노예가 되어
무엇을 기대한단 말인가. 사후에 어디로 간다는 것, 그것을 기대하는 것인가.
우리는 삶을 얘기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성인의 제자가 되어 인간의 본체로
돌아가야 한다.
신의 목적은 사람에 있고, 성인의 목적 또한 사람에게 있다. 어찌 인간의
목적이 신에 있겠는가. 그것은 삶의 목적이 죽음에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람이 사람을 믿고 사람을 섬기고, 사람을 존경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진리도 신도 성인도 필요한 것이다.
나는 종교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성직자이건 신자이건 가릴
것 없이 일부 신앙인들은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자기들이 믿는 신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천당이나 극락 같은 사후의 이상향에도 갈 수 없다고 한다.
무신론자들만 대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도
그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하기도 한다.
그런 태도를 지니고 있는 신앙인들은 자신들의 성전에 온갖 정성을 다 바친다.
불쌍한 이들을 위해 제대로 쓰이는지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오로지 현금을 많이
하면 복받는 것으로 믿고, 다른 종교를 비난하는 것이 자기 신을 제대로 모시는
것인 양 착각하면서도 목소리를 높이고, 화려하고 거대한 성전을 만드는 것으로
신자의 역할을 다했다고 믿고, 심지어는 같은 종과 안에서도 다른 곳의
성직자보다 자기가 속해 있는 곳의 성직자가 좋은 차를 타고 다녀야 마음이
놓이는 이들이다.
맹목적인 신앙에 눈이 멀고, 돈으로 믿음의 척도를 재는,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고 타락해도 한참 타락한 이들이다. 이렇게 사람들을 어긋나고 타락케
만든 장본인들이 있다.
먼저 일부 잘못된 성직자들의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신도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신의 가르침을 전하는 일보다는, 성전을 높이고 물질적
이익을 쫓는 일에 더 힘을 쏟는다.
그런 것을 쫓기 위해서는 신도들에게 더욱 맹목적인 신앙을 강요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잘못된 길이라도 무조건 따르게 해야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성직자 아래서 명예를 누리는 신자들이 또 있다. 성직자가
그릇되게 요구한 것을 충실히 따르면서 신앙 단체 안에서 포장된 신앙심을
과시하는 이들이다. 법을 따르고 진리를 행하는 일은 외면하면서도 단체가
요구하는 일에 충실하다는 것만으로 자신이 존경받을 수 있는 신앙인으로
보여지기를 바라는 무리들이다.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예수는 이웃을 사랑하라 가르쳤고, 부처는 자비를
가르쳤고, 공자는 어짐을 가르쳤다. 실제로 삶 속에서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이 진정 그 성인들의 참된 제자들이다. 예수와 부처와 공자가 바라는
인간상도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종교가 필요한 것이다.
헌데 본래의 목적과 필요성은 어디로 가 버리고 헛것들이 판을 치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들은 종교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종교와 신은 인간이
좀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인데, 진리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있는 것인데,
노예가 되어 종교와 신이 목적인 양 착각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자비와 어짐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거대한 성전 안으로 들어와 오로지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매달리는 사람들을 보고 예수와 부처와 공자는 무슨 말을 할까. 성전에서 나가
사람들의 세상에서 가르침을 실천하라고 하지 않을까.
종교의 노예가 된 현실은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그 극단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재림 예수를 자처하며 신도들을 현혹한 한 목사의 행태는 참으로 기가
막힌다. 그 사이비 목사는 노골적으로 신도들에게 헌금을 강요하면서, 나중에
구체적인 액수까지 밝히면서 수억 혹은 수십 억의 돈을 보상받게 해주겠다고 했다.
신도들은 또 그 말을 믿고 헌금을 한다. 이쯤 되면 종교의 노예라 할 것도 없다.
어찌 종교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단 말인가.
말세를 말하면서 자기들이 믿는 종교의 신자가 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도, 종교의 노예가 되라는 식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웃집에서
실천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요, 자기집의 사랑만 사랑이라는 식의 이 주장이
과연 타당할 수 있겠는가.
성인들의 충실한 제자가 되지 않고 노예가 되려는 사람들은 눈을 떠야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신과 종교를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사람의 세상에서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 된다. 인간은 지구상 최고의 목적이다.
사람의 가치다 바로 신의 가치요, 신의 가치가 바로 사람의 가치다. 헌데 인간이
목적임을 외면한 채 무슨 이유로 종교의 노예가 되려고 그리도 몸부림을 하는가.

지구상 최고의 목적

누가 만약 사후에 천당에 보내줄 테니 현실 속의 인간적인 삶을 포기하라
한다면 나는 단호히 거절할 것이다. 누가 만약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해줄 테니
현실 속의 인간적인 삶을 가벼이 여기라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거부할 것이다.
다시 누가 만약 도의 경지에 이르도록 해줄 테니 가족과 친지들과의 인연을
끊으라 하면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을 것이다. 누가 만약 최고의
명예를 누리게 해줄 테니 인간이라는 자부심을 버리라 한다면 나는 두말없이
코웃음 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구상 최고의 목적은 인간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천당이니 해탈이니 도니 명예니 하는 그 모든 것은 인생을 빛내고
살찌우는 수단일 뿐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도를 깨우쳤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하는
이들이 있다. 진정한 도를 얻기 위해서는 부모를 버리고 떠나는 아픔을 알아야
하고, 속세를 버리는 고통을 견뎌야 하고,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들이다. 그러한 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것들이
지나치게 이상에 치우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상에 치우쳐 있다 함은 인간의
본모습에서 어긋나 있다는 뜻과 다를 게 없다.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려가는
것이 그런식의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하찮은 것이 될 수 있다.
유명한 어느 스님의 출가에 얽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스님은 출가하기
전 속세에서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그는 시장으로
달려갔다. 미역을 사 가지고 와 부인에게 먹이기 위해서였다. 헌데 미역을 사기
위해 시장으로 간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미역을 사려는 순간
무엇을 깨달았는지, 아니면 아이를 낳고 미역을 사는 그런 식의 삶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그 길로 출가를 한 것이다. 부인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시장으로 간 남편이 미역을 사 들고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스님들의 출가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또 미역을 사러 간 스님이
그런 식으로 출가를 한 것에 대해서도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다. 다만 그런 식의 태도가 신비화되고, 그런 식의 이야기 속에서 주로
깨달음이 얘기되고, 그런 식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삶을 보려는 성향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현실 속의 삶을 왜소하게 보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의 비뚤어진 시각이라고 본다. 그런 시각을 가진 이들은 실제
생활에서는 참다운 행복도 찾을 수 없고 드높은 인간적 도리도 깨달을 수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꾸 인간의 실제적인 삶을 떠난 그 어떤 곳을 가리키며 그리고
가자고 한다. 자꾸 저 높은 곳으로만 가자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땅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이다. 저 높은 곳에 비해
낮은 이곳이 아니라, 속세를 떠난 곳에 비해 참다운 행복이 없고 드높은 인간적인
도리를 깨달을 수 없는 이곳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고
있는 이곳이다.
인간에게는 오만보다도 더 지독하게 한심스러운 면이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자부심마저도 자기 비하의 늪에 빠져
내팽개치는 사람이 있다. 인간으로서의 자기 존엄성을 먼저 알아야 한다. 자기
존엄성을 아는 것과는 별개로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존재다.
부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고대 인도에 왕과 왕비가 있었다. 왕이 어느 날 왕비에게 물었다. 세상에서
왕비 자신보다 사랑스럽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냐고. 그러자 왕비는 자신보다
사랑스런 존재가 없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왕비가 왕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왕 역시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존재는 없다고 같은 대답을 했다.
왕과 왕비는 어느 날 부처에게 물었다.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존재가 없다는
자신들의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알고 싶어서였다. 부처는 빙그레 웃으며
왕과 왕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자기 생각을 어디로건 끌고갈 수 있다. 그러나 어디로 끌고가건 자기
자신보다 사랑스런 존재를 찾아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남들도 다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스러워 한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사랑스러워 하는 사람은 결코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계율을 말하는 것이지만, 사람이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할 수밖에 없음이 그 바탕이 된다. 자신을 가장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이 자기 존엄성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가장 사랑하는
것에서조차 그 존엄성을 느끼지 못하면 자기 이외의 사람에게서는 말할 것도
없다.
자신을 사랑할 때 남을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이 괴롭고 불안하면 남을 편하게
할 수 없다. 자신이 가난할 때 남을 풍요롭게 해줄 수 없다. 자신의 존엄성을
알 때 남의 존엄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존엄성을 알 때
인류의 평화는 그 싹을 마련한 것이 된다. 인간의 가치를 스스로 높였기
때문이다. 높은 가치란 바로 평화로운 삶을 가리키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나
자기 비하의 늪에 빠지면 세상은 비극 속에 빠진다. 스스로 가치를 떨어뜨렸으니
사람을 우습게 보고 아무렇게나 군다.
그러면 가지 존엄성을 어디다 찾을 것인가. 천당과 극락에서 찾을 것인가?
속세를 벗어난 해탈의 경지에서 찾을 것인가? 희노애락의 일상에서 벗어난 도의
경지에서 찾을 것인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존엄성을 더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거기에만 매달린다는 것은 일상 생활 속의 자신을 비하한다는 뜻과 다를 게 없다.
생활 속에서 찾아야 한다. 거기서 존엄성을 찾고 가치를 찾고 사랑을 찾아야
한다. 가족과 이웃과 동포와 더 나아가 인류 전체와 더불어 살면서, 그 안에서
존엄성을 찾고 삶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불교에서는 말하는 해탈은 일체의 속박이나 번뇌로부터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상태를 이른다. 그와 같은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에
집착하지 말고, 매달리지 말고, 고집부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 나아가 아예 자신을 둘러싼 어떤 문제로부터 기피하는 것을 해탈의
방법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그러나 기피하고 도피하는 것에서 인간의 진정한
해탈을 찾을 수 없는 것이고, 집착하지 않고 매달리지 않고 고집부리지 않는다고
능사가 아니다. 주어진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해탈로 가는 기리 아니라 현실,
바로 인간적인 삶을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을 보자. 타인인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것은
기쁨이지만,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반면에 두 사람 사이에는 많은 갈등과
고통이 끼어들곤 한다. 온통 기쁨만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꼭
그럴 수만은 없는 게 바로 사람의 삶이다. 수많은 소설과 시, 영화의 음악 등의
작품이 사랑으로 인한 온갖 갈등과 고통을 담고 있는 것은 그런 현실의 반영이
아니겠는가.
헌데 고통과 갈등 때문에 사랑 그 자체를 포기할 수 있을까. 포기한다면
그것을 과연 올바른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 포기한다는 것은 기피한다는
말이다. 갈등과 고통을 피하고 싶어 차라리 사랑 자체에서 벗어난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남녀간의 사랑에 관한한 인간적인 삶을 버리는 꼴이
된다. 그런 상태에서 해탈의 경지를 느낄 수 있을까.
삶의 구체적인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을 능사로 아는 사람들은 두 남녀의 사랑을
과소평가하고, 헛된 것으로 보이게 하려 하고, 결국에는 그 사랑에 매달리느니
차라리 뿌리치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갈등과 고통이 없는
마음? 그런 마음을 소중한 사랑을 포기하는 식으로밖에 얻을 수 없을까.
갈등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연인에게 더욱 집착하고, 매달리고, 사랑을 고집해야
끝내 그 갈등과 고통을 이겨낸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해탈과도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아니, 그것이 종교에서 말하는 해탈이
아니라 해도 무방하다. 결코 기피하지 않고 인간적인 가치에 충실했으니, 삶의
목적 가운데 하나를 성취한 셈이다.
남녀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 전체가 이런 문제를 안고 있다. 사랑을
나누며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숱한 갈등과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편협한
이상주의자들의 책략에 불과하다. 갈등과 고통이 없는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현실을 떠나 그리고 가자고 유혹하는 것은 기만적인 행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인간이 가치가 있고 존엄한 존재라 하는 것은 인간의 땅에서 스스로 갈등과
고통을 이겨내고 끝내 사랑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이기에 인간 그
자체가 지구상 최고의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저 높은 곳을 가리키는
사람들이 말하는 천당이나 극락 같은 것이 살아 있는 인간의 삶보다 앞서는
목적이 될 수 없다. 저 높은 곳을 가리키는 것은 인간을 위한 수단인 뿐이다.
농부는 농삿일을 통해 자기 가치와 존엄성을 찾아야 한다. 자신의 땀과
정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니 그 얼마나 가치있고
존엄한 일인가. 그러나 만약 농부가 농삿일에서 자기 가치와 존엄성을 갖지
못하면 농부뿐 아니라 농부가 지은 양식을 먹는 모든 사람까지 불행해진다.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일에서 알찬 결실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교육자는 올바른 가르침에서, 정치가는 참된 정치에서, 구두닦이는 구두를 잘
닦는 일에서 자기 가치와 존엄성을 찾아야 한다. 또한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리에서 아들은 아들의 도리에서, 남편은 남편의 도리에서 아내는 아내의
도리에서 자기 가치와 존엄성을 찾아야 한다.
수단에 불과한 것이 목적인 양 나서는 것은 비단 종교만이 아니다. 물질이
목적인 양 나서서 추태를 부리고, 전쟁이 목적인 양 앞서서 광기를 드러내고,
권력이 목적인 양 드러내 놓고 칼을 휘두른다.
이렇게 뒤바뀐 수단과 목적이 제자리를 찾을 때 인간은 이상향의 땅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리라. 누가 뭐라 해도 인간 그 자체가 최고의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마당 넷 / 흔들리는 세상 풍경

전철이라는 것을 처음 접하던 시절이었다.
서울에 와서 일행과 함께 전철을 탔다.
우리가 내려야 할 역에서 문이 열렸다.
나는 느긋하게 출구 쪽으로 갔다.
갓을 쓴 체면에 경망스럽게 내릴 수도 없었고,
또 사람이 다 내려야 문이 닫히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었기에 나의 발걸음은 느렸다.
헌데 내가 막 출구 앞에 섰을 때 문이 닫혔다.
스르르 닫히는 문,
그것은 내게 까마득한 절벽이요, 캄캄한 어둠이었다.

갓 쓰고 당한 봉변

요즘 세상을 보노라면 상전벽해라는 말을 가히 실감할 수 있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된다는 그 비유에 조금도 손색이 없게 세상은 나날이 변하고 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푸른 바다가 전에는 뽕나무 밭이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을 피부로 직접 느끼면서 사는 도시 사람들도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다고 하는데, 산속에서 갓 쓰고 사는 사람이야
오죽하겠나. 어쩌다 나가 보면 어안이 벙벙하고 눈이 휘둥그래진다. 현대
문명이라는 것이 귀신이 둔갑술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요즘에는 그래도 조금 낫다. 가끔 나다니다 보니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변화를
미리 예감하고 있기 때문에 충격을 덜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현대
문명과 그 안에서 사는 도시인들은 내게 당혹스러움을 번번이 안겨 주곤 하니,
외지로 나가면 나는 잔뜩 긴장 할 수밖에 없다. 긴장의 끈을 놓치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공연한 두려움이 아니다. 지난날 나는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을 수밖에 없는 너무나 사소한 일로 봉변을 당하곤 했기 때문이다.
산에서 공부하던 댕기머리 시절부터 당혹스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 공중전화라는 놈이었다. 어딘가에 전화를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산에서 내려와  시내로 갔다. 전화기를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얘기를 들어 본 적은 있으니 두려울 게 없다고 자신했다.
헌데 막상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가니 막막했다. 돈을 넣어야 한다는 데,
도대체 어떻게 넣어야 하는지, 송수화기는 언제 어떻게 들고 다이얼은 또 어떻게
돌리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전화기를 바라보고 너 이놈, 하고 호령을 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요, 사용법을 모르니 그것은 그저 괴물일 뿐이었다.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만 들고 나는 그저 막막함에 몸둘 바를 몰랐다. 설사 어떻게 해서
전화를 걸었다 해도, 거기에 대고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상대방이
분명 무슨 말을 할 터인데, 거기에 대꾸할 용기마저 없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나는 일단 부스 안에서 나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전화를 거는
방법을 몰래 엿보았다. 한 사람의 시범으로는 안 되어,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송수화기를 들고, 동전을 놓고, 다이얼을 돌린다. 그리고 말을 하면 된다.
참으로 쉬운 일이다. 허나 그것이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는 막막한 미지의 세계일
뿐이다. 문명의 이기라는 것들이 모두 그렇다. 일단 사용하기 시작하면 공기를
마시듯 편안한 마음으로 다루지만, 그것이 낯설 때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괴물과
다를 게 없다.
근자에 나는 일본 교포 2세인 어느 분의 집으로 초대를 받아 갔었다. 거기서
볼 일을 보려고 화장실엘 갔다. 헌데 그 안에서 좌변 세척기라는 낯선 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처음으로 마주했던 공중전화기와 다름없이 내게는
참으로 난감한 물체였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마냥 고민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조작해 볼
만한 것을 조심스럽게 눌러봤다. 무엇인가 쏙 나왔다가 들어가는 식이었다.
헌데 뭔가를 눌러서 물이 솟아 뒷처리를 해준 것까지는 좋았다. 신기하군, 사면서
나는 사용을 만족감에 젖었지만 이내 불상사가 벌어졌다. 어찌된 셈인지 솟는
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혹스러움에 나는 앉지도 서지도 피하지도
못했다. 백의민족의 하얀 옷이 물에 흥건히 적셔졌다. 손님 체면에 그 꼴로
화장실에서 나가려니 참으로 말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단순한 생활을 해서 그랬겠지만 물건이 하나 나와도 사용법 때문에
크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헌데 요즘 새로 나오는 문명의 이기들은 사용법이라는
소책자를 꼭 달고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걸 열심히 읽어 보지 않으면 사용하지
못하는 것들이 태반이다. 복잡한 사용법이 없는 것이라 해도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는 낯선 거들이 많다.
전철이라는 것을 처음 접하던 시절이었다. 서울에 와서 일행과 함께 전철을
탔다. 우리가 내려야 할 역에서 문이 열렸다. 나는 느긋하게 출구 쪽으로 갔다.
갓을 쓴 체면에 경망스럽게 내릴 수도 없었고, 또 사람이 다 내려야 문이 닫히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었기에 나의 발걸음은 느렸다. 헌데 일행이 다 내리고
내가 막 출구 앞에 서는데 그만 문이 닫히는 것이 아닌가. 스르르 닫히는 문,
그것은 내게 까마득한 절벽이요, 캄캄한 어둠이었다. 몸에 식은땀이 나고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열차는 무심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일행과 다시 못볼
것 같다는 절망과 이대로 가면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이냐는 아득함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의 황망함은 조금씩 가라앉았지만 기계적인 야멸참에 대한 당혹감과
섭섭함은 버릴 수 없었다. 긴장의 끈을 잠시라도 끌러 놓으면 바보가 되는
세상이 아닌가. 어떻게 사람이 나가려는 데 작두로 짚을 썰 듯 무시무시하게 문을
닫아버리는가. 기계적인 입장에서 보면 주어진 시간에 빨리 나가지 못한 내가
잘못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주어진 시간이란 것도 사실은 사람이 정한 것
아닌가. 사람의 입장에서 그 시간을 정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빨리 빨리 움직이고 열심히 사용법을 익힌다.
나도 봉변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래야 할 모양이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은
오기가 생길 때가 있으니 어쩌랴. 작두 아래 놓인 짚 같은 신세가 될지라도
사람의 평상시 걸음으로 전철에서 내리고 싶고, 큰 건물에 있는 회전문에 갓이
끼어 망가지더라도 좀 여유롭게 출입하고 싶다.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기계적인 것에 사람이 매달려 쫓아가기보다는 기계적인 것을
사람 쪽으로 뜰어당겨야 하지 않을까.
양식당 정도에서 나는 고집을 부려 본다. 처음 양식을 대했을 때 나는 역시
낯선 것이라 약간 당황했다. 먹는 데도 나름대로 방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방식을 배우려고 눈여겨 보기도 했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어떻게 쥐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내 식으로 들고 먹으면 그만인 것
아닌가.
나는 봉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익힐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그
이기들은 좀더 인간적이 태도를 가져야 하리라고 본다. 그렇게 만드는 일은
사람의 몫이다. 인간이 주체가 되지 못하면 문명의 이기는 살인 무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문명의 이기 못지 않게 사람들 역시 내게 숱한 봉변을 안겨 주곤 한다. 악의는
없는 것이기에 그저 웃어넘길 수도 있지만, 웃을 수만은 없는 경우가 많으니 낸들
어쩌리오.
머리를 땋고 지내던 시절에 목욕탕에서 종종 당하던 일이야 즐거운 추억거리가
된다. 땋은 머리를 풀면 여자처럼 긴 머리가 된다. 그런 모습으로 남탕에
들어가면 기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내가 남탕과 여탕도 구분하지 못하는
푼수없는 여자라도 되는 양 보니, 나는 그저 고개를 처박을 수밖에 없었다.
외모만 보고 오해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도시에 가서 시내버스를 타면 기막힌 섬김을 받곤 한다. 내 나이 이제 불혹을
것 넘겼는데, 삼십대 때부터 겪은 일이다. 갓 쓰고 한복 입고 수염 기르고 있으면
다 그렇게 보일까. 어린 학생들은 물론이요, 나보다 한참 연장자가 되는 분들까지
벌떡 일어서서는 하는 말,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 난감하기 그지없는 공경의
말이다. 언젠가는 나이든 노인까지 내게 자리를 양보하려 했다. 내 얼굴은
유난히 나이가 들어 보이는 그런 얼굴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저 내 외관만 보고
그렇게 짐작하는 것이다. 젊은 사람이 갓을 쓸 리가 없는 세상이 되었으니,
그들의 착각도 그들만의 잘못은 아니리라.
한번은 아내와 함께 외출을 했었다. 아내는 나보다 네 살 아래다. 헌데 잘
모르는 사람이 인사를 한다고 말을 붙여왔다. 인사를 고마운 노릇이지만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며느리와 어디 가십니까,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황당해서
돌아보니 아내는 그저 웃기만 하였다.
속이 상해, 그래 나 며느리와 함께 사는 패륜 인간이다, 라고 소리를 질러주고
싶었지만 단순한 오해 때문에 생긴 일이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나에게 호의를 베푼다고, 또 때로는 나를 곯려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당혹스럽게 만드는 이들이 있다.
언젠가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겪은 일이다. 상점에 가서 요구르트 하나를
달라고 했다. 헌데 예쁘장하게 생기 점원 아가씨가 나를 보더니 방긋 웃는 것이
아닌가. 실없는 것이 아니라면 웃는 낯으로 대하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도 미소를 지으며 돈을 내밀었다. 그렇게 거래가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그
아가씨 왈, 그거 드실 줄 아세요, 하는 게 아닌가. 졸지에 당한 엉뚱한 물음이라
나는 그 아가씨를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내 표정을 보고 역시 먹는 방법을
모르는 모양이라고 단정한 모양이다.
아가씨는 빨대를 꽂아 먹는 시늉까지 직접 실연해 보이고는 내게 요구르트를
넘겨 주었다. 그런 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까. 하기야 청학동에서는 옛날
동전을 쓰지 않냐고 진지하게 물어 오는 사람도 있었으니, 그 아가씨의 친절에
고마움을 표시해야겠지.
갓과 한복은 그렇게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사람에 대한
믿음이나 신뢰 같은, 우리가 잃고 사는 것들에 대한 상징이 되기도 한다.
서울역 광장에서 겪은 일이다. 기차 시간이 남아 있고 해서 나는 광장에 서서
높은 빌딩들과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헌데 한 여인이 두리번거리다가 내게
다가왔다. 여인의 손에는 커다란 짐보따리가 하나 들려져 있었다. 화장실을
가야겠는데 짐을 좀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기꺼이 나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헌데 그날따라 왜 그리도 많은
사람들에게 짐이 부담이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서너 사람이 그 여인처럼 내게
다가와 짐을 맡기고 제 볼일을 보는 게 아닌가. 주위에는 다른 사람들도 많았다.
헌데 왜 하필 내게만 부탁을 한단 말인가. 갓을 쓰고 한복을 입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 제 물건을 가지고 달아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낯선 나를 믿지야 못하겠지만 갓을
믿고 한복을 믿은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나의 차림새가 마음의 고향을 떠올리는 상징물이 되고
있으니, 감격스럽기까지 한 일이었다. 그러나 믿음도 좋고 감격도 좋지만, 짐을
맡겼으면 빨리 볼일을 보고 찾아가야 할 것이 아닌가. 기차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짐 보따리 하나는 여전히 내 앞에 있었다.
기차를 타기 위해 자리를 떠야 할 시간이 되었다. 헌데도 짐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대로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바심이 나 주위를
둘러보는데, 저쪽에서 태연하게 천천히 짐 주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기차를 향해 내달렸다.
나를 의도적으로 곯려주려는 사람들도 역시 무슨 악의 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당혹스러워 하는 것을 낄낄거리며 즐기니, 취미로 말하면 결코 좋은
취미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비군 훈련을 받을 때의 일이다. 나 같은 사람도 예비군 훈련을 받냐고 묻는
사람이 있으니, 거기서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것이 어쩌면 이상한 일도 아닐
것이다. 어느 날 포복을 한다 뒹군다 하고 보니 긴 머리가 밤송이가 되었다.
같은 예비군들이 자꾸 흘끔거리며 쳐다보고, 노골적으로 웃음을 터뜨리는 이들도
있었다. 나 역시 산발한 내 모습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몸을
마구 다루는 훈련인데 선비의 모습을 갖출 수도 없고 어쩌랴. 참을 수밖에
없었다.
휴식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오락을 하자고 나섰다. 오락이라야 딴 게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였다 하면 즐기는 것, 바로 노래부르기였다. 이미 주시의
대상이었던 내가 노래 부르라는 강권을 피해 갈 길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어서 나는 춘향가 중에서 "쑥대머리" 한 대목을 불렀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 옥방 찬 자리에

춘향이 쑥대머리로 감옥에 갇혀 있는 장면이었다. 헌데 억지로 한 곡조 뽑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교라는 자도 웃다가 다분히
조롱하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쑥대머리 어디 따로 있나, 당신 머리가
쑥대머리지.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런 반응은 갓 쓰고 한복 입으며 사는
사람들에 대한 조롱이기도 했으니 나는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왜 우리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는 것일까. 세상은 왜 이렇게 변해야만 했을까.
나는 묻고 또 물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머리를 땋고 지내던 시절이니 오래 전의 일이었다. 산에
있는 내게 바람 좀 쐬라며 서울의 지인들이 초청을 했다. 마침 여행도 좀 하고
싶었던 차라 서울로 올라갔다. 지인들 가운데 아주 괴팍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이미 작정을 했는지, 아니면 갑자기 떠오른 생각인지 모르지만 나를
이상한 곳으로 데려갔다.
나이트 클럽이었는데, 거기에서는 여자들이 옷을 다 벗고 춤을 추는 스트립
쇼가 벌어지고 있었다. 참으로 망측한 모습이었다. 동방 예의지국에서 이 무슨
해괴한 짓이란 말인가. 눈을 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더구나
지인들만이 아니라 주변의 손님들도 벌거벗은 여자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한복을 입고 그렇게 앉아 있으니 자기들 눈에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
모양이다. 나는 쩔쩔매며 시선 둘 곳을 찾았다. 지인들은 그런 나를 보고
좋아라 웃어댔다. 사람을 초청해 놓고 그 모양을 만들어 놓았으니 봉변치고는
아주 해괴한 봉변이었다.
그것을 산업이라 부르는 게 기이한 일이지만 어쨌거나 향락 산업이 날로
번창한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내가 봉변을 당할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다. 향락에 깊이 빠지는 나라 치고 잘되는 꼴을 본 적이 없다. 그것을
타락으로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보는 사람들은 여전히 나 같은 사람들을 보고
낄낄거리겠지만, 그렇게 살다가 큰 봉변을 당하지.
갓 쓰고 당하는 봉변이야 갓을 쓰고 사는 사람이 감수하면 된다. 그러나
감수만 한다고 능사가 아닌 일들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다. 인간이 주체가 되지
못하는 문명의 이기, 우리 것을 기이하게 여기는 왜곡된 정신, 그것들은 갓을 쓰고
살지 않는 사람에게도 끝내는 크나큰 봉변을 안겨 줄 것이다.

배꼽티 입은 아가씨

여름에 도시에 가 보면 눈에 쏙 들어오는 게 있다. 여자 배꼽들이다. 내가
음탕한 사람이라서 눈을 이러저리 돌리며 찾아내서 보는 게 아니다. 차마 보기
민망해 시선을 돌리려 해도 여기서 쑥 내밀고, 저기서 쑥 내밀며 다니는 데 무슨
재주로 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배꼽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서 그런 옷을 입고 다닐 터이니, 그런 아가씨를
만나면 배꼽을 뚫어지게 쳐다봐 주면 좋아할까. 그리고는 그 배꼽 참 예쁘다, 그
배꼽 참 귀엽게도 쏙 들어갔다는 식의 찬사를 덧붙이면 더 좋아할까. 그 배꼽
섹시하다고 하면 회심의 미소를 지을까.
호통을 쳐 봐야 남의 시선 따위는 이미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을 터이니 소용이 없을 테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배꼽 보기 싫은 사람은
상관하지 말고 그냥 지나치고, 배꼽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라고 할 터이니 그냥
무시하고 가 버리면 될까. 그러나 아무리 따져봐도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다. 개성도 좋고, 남의 눈에 띄고 싶은 욕구도 좋고, 섹시해 보이고 싶은
욕망도 다 좋지만, 성도덕의 타락과 방종으로 병들어 가는 이 땅의 현실을 생각
하면 결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넘겨 버릴 수는 없다. 이런 말이 있다.

야용회음
만장회도

심한 노출과 같은 지나친 꾸밈은 음욕을 부르고, 엉성하게 감추면 도둑을
부른다는 뜻이다. 배꼽을 드러내 놓고 다니는 아가씨들은 때로는 멋을, 때로는
편함을 내세워 자기 옷을 정당화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음욕을
불러일으키려는 유혹으로, 시선을 끌기 위한 바람기의 발동으로 먼저 보인다.
성도덕의 타락과 방종을 성폭행이 기승을 보루고 있다. 대부분 인면수심의
못된 남자들이 저지르는 짓이다. 가정을 파괴하고 한 여자의 일생을 망치는
성폭행범들은 진정 인간이라 부를 수조차 없는 무리들이다. 많은 정숙한
여인들도 그들의 희생이 되니, 말을 함부로 할 수는 없겠다. 그래도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배꼽을 쑥 내밀고 다니는 여자들처럼 스스로 사람들의 음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애쓰는 이들은 성폭행과 같은 죄악의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람은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으로 동물과 구분된다. 그러나 그 능력은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만으로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정과 사회
속에서 그 능력을 배운다. 그래서 조절 능력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사람에
가까워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동물에 가까워진다. 사회가 지나친 노출과 같은
나쁜 환경 속에 빠지면 동물에 가까운 사람의 동물성을 자극함은 물론이요,
사람에 가까운 조절 능력을 가진 사람도 흔들어 놓아 자기 능력을 조금씩 잃게
만든다. 사람들을 그렇게 나쁜 쪽으로 변하게 만드는 사회에서 성폭행과 같은
죄악, 타락, 방종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결코 이상한 게 아니다.
배꼽티 입은 아가씨는 이렇게 항변할 것이다. 자신은 그저 개성대로 입은 것일
뿐 언제 성폭행을 하라고 말한 적이 있냐고, 성폭행을 저지른 놈이 나쁜 놈이지
자기가 무슨 상관이냐고. 그 말이 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옳다고 얼굴 빳빳이
세워 주장할 것도 없다. 옛말에 훔쳐간 사람보다 잃어버린 사람이 더 문제라
했다. 잃은 사람이 훔친 사람의 도심을 발도시키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으니,
그를 경계하라는 가르침이다. 노출이 심하거나 행실이 정숙하지 못한 여자들은
남자들은 동물에 가깝도록 만드는, 음욕을 발동시키는 잘못이 있는 것이다.
여자의 노출과 정숙하지 않음이 문제가 되지만, 그 말을 여자가 제대로 하지
못해 사회에 성 문제가 만연하고 있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회는 여자와 남자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 대결이
아니라 조화로 관계를 맺는다. 단, 여자는 여자대로 남자는 남자대로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지킬 것을 지키지 못하면 소중한 것을 잃는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연극을 보기 위해 지인과 함께 서울의 동숭동을 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나는
그만 차마 눈 뜨고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어느 젊은
남녀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서로 끌어안고 키스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열정적으로. 갓을 쓴 내가 눈을 부라리며 다가가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대강 이런 말이 오갔다.
"자네들 그렇게 좋은가?'
"네?'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꼭 이래야 하는가?"
"뭐가 어때요? 솔직한 것이 좋은 거 아니에요?"
"솔직하다니 뭐가 솔직하단 말인가?"
"왜 이러세요? 서로 좋아하니까 이러는 거고, 그게 솔직한 모습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혼자 사는 사회가 아니야. 함께 사는 사회에서는...."
"누가 혼자 산다고 했어요?"
"자네들 사람과 개의 차이가 뭔 줄 아나?"
"네?"
"감정을 조절할 줄 알고 부끄러움을 아는 게 사람이고, 그렇지 못하고 제멋대로
구는 게 개야."
"뭐라구요? 지금 우리가 개라는 말이에요?"
"왜, 그런 말은 듣기 싫은가?"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내 말은 자네들이 개라는 소리가 아니야. 사람이라면 어떤 것이 가치 있는
행동이고, 어떤 것 이 가치 없는 행동인지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야.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지만 자네들 이러는 거 형편없이 가치가 떨어지는 짓이야.
개와 비슷한 짓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알겠나?"
"흥, 별꼴이야."
마지막 말은 실실 웃기만 하고 있던 젊은 여자가 한 소리였다. 그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버티고 있었다. 결국 내가 먼저 그 자리를
뜨고 말았다.
그런 젊은이들을 두고 이른바 X세대니 신세대니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 세대를
두고 소비 문화에 물든 부류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다양성을 추구하고 합리적인 판단과 개성을 존중하는 새로운 세대라고 인정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다.
새로운 세대들은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기성세대들의 오래된 좋지 않은
습성이기도 하다. 기성세대의 잘못이 그대로 새로운 세대에게 전해지는 것이니
큰소리만 칠 일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에게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역시 기성세대다. 비록 새로운 세대가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 해도, 그것이 인간적인 성숙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장점을 인간적인 성숙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한다.
새로운 세대를 위해 기성세대들이 가르치고 도와 줄 일도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하기에 따라서 사람에 가까울 수도 있고, 동물에 가까울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를 따질 수밖에 없다. 배꼽을 드러내
놓고 다니는 아가씨나 남들이 보건 말건 포옹하는 신세대 연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텔레비전을 보노라면 보기 민망한 꼴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른바 지성인이라
불리는 여자들 이 카메라 앞아 앉아 있는 꼴을 볼 때도 그렇다. 상당수가 다리를
꼬고 앉는다. 아마 서양 여자들의 그런 모습이 보기 좋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여기는 서양이 아니다. 여자가 앉을 때 갖추어야 할 예법이 엄연히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시청자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어떻게
다리를 꼬고 앉을 수 있단 말인가. 배꼽을 내밀고 다니는 것과 다를 발 없는
부끄러운 짓이다. 다리를 꼬고 앉아 성폭행이 만연하는 사회의 문제점을 말하는
여자 지성인이여, 먼저 그 다리 좀 제대로 하고 앉아라.
자기 개성을 추구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개성이 없는 사람들은 인생의 멋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함께 사는 사회이기 때문에 개성도 가치의 잣대로 재 봐야
한다. 인간적 가치를 떨어뜨리는 개성은 참된 개성이 아니라 타락이요 방종일
뿐이다. 사람들에게 내보일 것은 배꼽이 아니라 인간적 가치로 빛나는 얼굴이
되어야 한다.

텔레비전 씨에게 보내는 편지

테레비전 씨, 기제후 일양만강하옵신지요. 문명 사회의 한복판에 우뚝 서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사람이라면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빠짐없이
바라보고 있으니 이 사람 즐겁게 해주랴 저 사람 비위 맞춰주랴 고생이 이만저만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두 제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불평을 해대니
마음고생은 또 얼마나 하고 계십니까.
특히 바보상자라 하여 텔레비전 씨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는 사람들이 있으니
공연히 저까지 화가 날 지경입니다. 그러니 당사자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제가 먼저 그 누명부터 벗겨드리고 싶습니다. 옛말에 이런 게 있습니다.

주불취인 인자취
색불미인 인자미

텔레비전 씨도 이른바 한글 세대이니 한자는 잘 모르시겠지요. 그 뜻은
이렇습니다. 술이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저 스스로 취하는
것이고, 남녀간의 욕정이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저 스스로
미혹됨에 빠지는 것이라는 얘깁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텔레비전 씨가 바보상자이기 때문에 사람이 바보가 되는 게
아니라 텔레비전 씨 앞에서 사람이 저 스스로 바보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천재도 텔레비전 씨와 사귀는데 그는 귀하와 바보스럽지 않게
어울리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천재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리가 그러한
줄도 모르고 바보상자라 손가락질을 하니 참으로 통탄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테레비전 씨, 저의 말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일방적으로 누명을
씌워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한 것일 뿐입니다. 귀하는 옳고 귀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르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저는 귀하를 예찬하는 사람도 아니요,
아부를 하려는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귀하도
바보상자라는 누명을 쓸 만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거기에 대한
반성은 하고 계시는지요?
먼저 청학동에서 처음 귀하를 만난 일을 말씀드리죠. 아마 팔십 년대 초로
생각됩니다. 그때는 아마 귀하가 색깔 있는 옷을 입기 시작했을 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청학동으로 들어온 딱 한 대의 텔레비전은 흑백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당시 생명부지의 귀하를 보고 청학동에는 대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변고가
생긴 것은 아니고, 귀하의 모습이 너무도 신기하고 재주 역시 신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날 뜻밖에 찾아온 가설극장 앞에 들뜬 사람들이 모이듯,
마을 사람들 모두 귀하 앞에 모여 그저 입을 벌리고 신기해 했었지요. 그것은
충격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귀하는 처음 대하는 순간부터 대단한
존재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귀하의 대단함은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신선이 되면
천리안을 갖게 된다고 하는데, 귀하는 벌써 천리안의 능력을 갖고 계시니
신선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지구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일을 귀하의
얼굴에서 볼 수 있으니 그 얼마나 대단한 능력이겠습니까.
그러나 텔레비전 씨, 오늘 이 편지를 쓰는 것은 귀하의 능력을 추켜세우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면만 보려 해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들이
있기에 붓을 든 것입니다. 저 나름대로는 예의를 갖추어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
아무쪼록 화를 내시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먼저 획일화를 강요하는 귀하의 독재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귀하가
무엇이 좋다 하면 사람들은 모두 그리로 우르르 몰리고, 변덕을 부린 귀하가 다시
다른 것이 좋다고 하면 또 사람들은 그리로 달려갑니다. 귀하는 내가 언제
독재를 부렸냐,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를 따른 것뿐이지, 라고 전가하시겠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물론 우르르 몰려다니는 사람들 역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겠습니다. 독재자를 만든 국민에게도 책임이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귀하는
자신의 영향력을 잘 알면서도 일방적으로 말을 하곤 합니다. 언젠가 채식만이
건강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하고 있으니 저 개인적으로는 꼭 잘못된
주장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귀하의 주장은 독재자의 구호처럼
사람들을 사로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고기를 지나치게 많이
먹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경고가 될 수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고기를
지나치게 먹는 사람이 그렇게 많습니까?
아닙니다. 대부분 고기를 많이 먹지 못합니다. 어쩌다 날 잡아서 먹는 게
대부분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마저도 가끔 먹는 고기에 대해
걱정하도록 귀하는 일방적으로 선동했습니다. 골고루 먹는 게 영양에 좋다는
다른 전문가들의 의견을 묵살하면서, 독재자가 자기 앞에 무릎을 꿇는 국민을
보고 즐기듯, 귀하는 자신의 선동에 사람들이 말려드는 것을 즐기지 않았습니까.
그래놓고는 시간이 조금 흐르면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귀하는 입을 싹
닦습니다. 독재자의 뻔뻔한 식언과 너무도 닮은 태도 변화입니다. 어떤 계기가
생기면 돼지고기가 몸에 좋다고 떠들고, 그러면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으려고
아우성을 칩니다. 어디 먹는 것만 이렇겠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귀하를 보면서 얼굴도 닮아가고 입는 옷도 닮아가고, 끝내는
생각마저도 닮아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귀하가 일방적으로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분수와 직분에 맞게 개성적인 가치를 살려 창조적인 모습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 귀하는 무척 인색합니다. 그저 어느 순간에 하나의
표본을 일방적으로 제시하고,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표본을 내세워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식입니다. 귀하 앞에서 스스로 바보가 되는 사람들은 귀하가 제시하는
표본을 닮지 못해서, 흉내를 내지 못해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소비를 부추기는 것도 그런 귀하의 독재성에서 나온 아주 나쁜 습성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사니 다른 사람들도 좀 보라는 식으로 귀하는
끊임없이 말을 합니다. 단순히 보라는 게 아니라 따라 해보라는 은밀한 유혹임을
귀하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귀하가 내세우는 이런 식이라는 것이
거개가 일반 서민들과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흉내를 좀 내려면 가랑이가
찢어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흉내를 내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요즘 세상에서 뒤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귀하가 노리는 것입니까?
드라마에 나오는 생활 수준이란 것도 예외는 있지만 대개가 일반인들의 생활
수준을 넘는 것들입니다. 심하게 얘기하면 남의 나라 얘기를 하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며 일반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해 갈등하고, 그 수준에 이르기 위해 발버둥을 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물질만능 풍조가 팽배한 것이 아닙니까? 왜 소박한 삶 속에서의 사랑과
진실은 말하지 않고,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짓거리를 주고 말하는 것입니까?
재미를 주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싶으십니까? 독재자처럼 굴면서 진짜
재미를 만드는 능력이 그렇게도 모자라십니까? 껍데기가 아닌 인간의 알맹이
진실을 캐내면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재미를 느낄 것입니다. 그럴 능력은 없으니
포기하고, 기이한 얘기들만 하는 것입니까?
성 문제를 말하는 귀하의 태도는 참으로 가관입니다. 드라마라는 것이 외도,
불륜, 이혼, 탈선이 아니면 말이 안 된다는 듯 지나치게 자주 그것들을
등장시킵니다. 가족들과 함께 보고 있기가 민망할 지경입니다. 재미를 주기
위해 그런 것들을 주로 내세우시는 모양인데, 정말 딱하십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귀하는 그것들을 그렇게 지나치게 내세워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소중한
가정의 가치와 인간적인 만남의 중요성을 말해야 하는 것이 귀하가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외도니 불륜이니 하는 것들이 재미있는 구경거리임은 분명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재미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귀하가 고작 그
정도의 존재입니까? 불 구경을 사람들은 아주 좋아한다고 합니다. 물론 자기
집과 상관없는 불일 경우겠지요. 사람들이 그렇다고 불 구경을 위해 아무 곳에나
불을 지르는 것이 과연 사람이 할 짓이겠습니까.
귀하가 명심해야 할 일이 또 있습니다. 귀하는 저녁 시간에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습니다. 그래서 가족간의 대화마저도 막아 놓았습니다. 물론 귀하의
잘못만은 아니지만 책임이 없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 귀하는 가족간의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늘 말하고, 그런 프로를 만들어야 합니다. 귀하를 보는
데만 시간을 투자하도록 강요하지 말고, 가끔은 텔레비전 씨를 끄고 가족간의
대화를 하라고 말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무리한 요구라고 하겠지만 조금만 바꾸면 엉뚱한 요구만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차마 귀하 입으로 자기를 보지 말라는 소리를 못하시겠다면, 어떻게 하면 귀하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지를 말하십시오. 돼지고기가 좋으냐 나쁘냐 하는 말만 할
게 아니라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또 어른들대로 어떻게 이용하면 귀하를
유익한 존재로 만들 수 있는지를 사람들이 다 알아들을 때까지 말하십시오.
그것도 무리한 요구라 하시겠습니까?
말씀드릴 것은 많지만 한 장의 편지에 다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고언을 드리겠습니다. 다시는 힘 있는 사람들의 편만 들지
마십시오. 권력이 있고 돈이 있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목소리를 높이는 귀하를
보면 구역질까지 나곤 합니다. 모욕적인 언사에 마음이 불편하시겠습니다만, 귀하
스스로 반성해 보면 저의 고언이 공연한 트집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평소에는
그런대로 평형 감각을 갖고 계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무슨 특별한 일만
생기면 귀하는 힘 있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나팔수 노릇을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귀하의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귀하의 긍정적인 면을 보려고 노력하는
편에 서 있습니다. 귀하 덕에 전세계의 많은 정보를 얻고, 스트레스도 풀고
합니다. 그래서 귀하에게 붙여진 바보상자라는 누명을 벗겨드리고 싶습니다.
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귀하도
그런 사람들을 위해 고언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올바른 태도를 보여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부디 귀하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기를 빌겠습니다. 귀하가 건강해지면 귀하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도 건강해질 것입니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해 보면서 이만
글을 줄이겠습니다.

최고의 투기꾼

돈이란 놈은 요물이다.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유혹하다가 금세 얼굴을 바꿔
배반하는가 하면, 울리다가는 웃기도 웃기다가는 또 울린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구원의 얼굴을 내밀다가 배부른 사람에게 가면 탐욕의 얼굴로 둔갑을 부리기도
한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놈이다. 그러면서 세상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떡
버티고 앉아 사방을 둘러보며 거드름을 피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너나없이 그 놈을 먼저 차지하려고 덤벼들기 때문이다. 주머니가 빈
사람은 비었다는 이유로 주머니가 찬 사람은 더 큰 주머니를 만들려는 이유도
모두 덤벼든다.
워낙 요물스럽기에 사람들은 돈에 대한 철학을 만들어 왔다. 그런 게 없으면
요물에게 언제 피해를 볼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만 이용하면 선의 도구가
되지만 잘못 이용하면 악의 도구가 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돈이란 요물을 만든
게 사람이니 사람이 잘만 쓰면 그야말로 세상을 잘 굴러가게 하는 돌고 도는 돈이
된다. 그러나 탐욕스런 투기꾼들에게 돈은 포식의 대상이 뿐이다. 돈이란 놈이
요사스런 짓을 하건 말건, 악의 도구가 되건 말건,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 제
주머니에 그것을 넣는 것이다. 그래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데 그 주머니는 입을
다무는 법이 없다. 아무리 처넣어도 늘 입을 해 벌리고 있다. 참으로 염치없는
족속들이다.
이런 투기꾼들 가운데도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 있다. 첫번째로 꼽을 수
있는 투기꾼은 정치가요, 구 번째는 종교인이요, 세 번째는 일반 투기꾼이다.
정치가는 참다운 정치를 꿈꾸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정치 장사꾼을 말하고,
종교인은 존경받는 성직자를 제외한 일부의 종교 장사꾼을 말하고, 일반 투기꾼은
돈 놓고 돈 먹기를 하는 흔히 보는 투기꾼을 말한다.
정치가가 왜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투기꾼이 될까.
그들은 가니 커서 국가와 민족을 담보로 해서 투기를 하기 때문이다. 선거를
할 때 정치가들은 투기를 목적으로 많은 투자를 한다. 투자하는 꼴을 볼라치면
기가 막힌다. 남에게 그렇게 돈을 주고 싶은지, 들키지 않으려고 도둑고양이처럼
은밀히 주고, 받지 않을까봐 무릎을 꿇고 주고, 부담스러워할까 봐 웃음을 실실
흘리며 준다. 천성이 그래 평소에도 그런다면 오죽 좋으련만, 투자할 시기에만
그러니 애석한 일이다.
그러한 불법적인 투자가 아니어도 그들은 엄청난 투자를 한다. 이미 부자인
사람들은 몇 억 몇십 억을 우습게 꺼내 뿌리고, 돈이 좀 적은 사람은 집 팔고 땅
팔고, 은행 융자받고, 주위 사람들 주머니까지 뒤져 속으로 울면서도 누가 볼까 봐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뿌린다. 뿌리는 게 돈만은 아니다. 선심성 공약이란 것을
마구 뿌려댄다. 다리를 놓아준다, 도로를 닦아준다, 공장을 유치해 준다, 또 뭐를
해준다 하면서 투자 보따리를 잔뜩 풀어 놓는다. 국회의원이란 사람들이 이런
공약을 많이 하는데, 그들은 입법부에 있으니 입법이 최우선적인 일이 아닌가.
그런데 다리 놓고, 도로 닦는 게 제 일인 양 여기며 환심을 사려고 마구 공약을
뿌려댄다.
악의적으로 뿌리는 게 또 있다. 지역 감정을 조장하거나 지연, 학연, 혈연을
총동원해 파벌 의식을 조장해 이익을 보려 한다. 정치가들이 제 이익을 위해
뿌려놓은 지역 감정은 이미 망국의 병이 되었다.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로 이미
통탄스런 한이 쌓여 있는데, 그것도 모자라 경상도가 어떠니 전라도가 어떠니
충청도가 어떠니 하며 갈가리 찢어져 한을 더하니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
또한 성씨가 다르다고 원수를 만들어 놓고, 출신 학교와 마을이 다르다고 서로
등지게 만들어 놓으니, 그 죄보다 더 큰 죄가 있을까.
그러나 국가와 민족이 어떻게 되건 말건 그들은 일단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다
동원해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말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 놓으며 국가와 민족을 멍들게 하고 있으니, 도대체 이런 정치가들의 목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뻔하다. 선거 때 투자를 해서 일단 당선이 되면, 본전은 물론이요 몇 배 몇십
배의 이득을 취한다. 그것이 정치 투기꾼의 목적이다. 순진한 사람들은 이해를
못할 것이다. 당선이 됐다고 해도 법적으로 받는 월급이나 세비가 뻔할 텐데
어떻게 그런 어마어마한 이득을 취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순진한 국민들도
이제 다 안다. 불법적으로 온갖 이득을 취해 투자한 돈의 몇 배 몇십 배를 긁어
모으는 것을 이제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당선으로 주어진 권력을 이용해 온갖 이권에 개입한다. 이권으로만 본다면
세상 일에 이권 다툼이 없는 곳이 거의 없으니, 어디고 제 특기대로 손만 뻗치면
돈이 굴러 들어오는 모양이다. 그래서 선거 때 아쉬움 없이 돈을 뿌려댄 부자
정치가들은 제 통장을 빠져나간 일부를 다시 채워넣는 것은 물론, 통장을 더욱
두툼하게 만든다. 돈이 적어서 집 팔고 땅 팔고 융자 받고 주위 사람의 주머니를
뒤진 사람은, 더 큰 집 사고 더 넓은 땅 사고 융자 받은 은행에 저금하고 주위
사람들의 청탁을 받아들여 그들의 주머니를 다시 채워준다.
정치 자금이니 비자금이니 하는 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억도 그냥 억이 아니라 동그라미가 몇 개씩
더해진 억이 거래되니 그 천문학적 숫자에 먼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정치가는 얼마나 긁어 모았는지 부하들에게 수천만 원 혹은 수억 원씩을
전별금으로 뿌리기도 했단다. 그것은 자기 권력을 유지하는 또 다른 방편이기도
하니 선거가 끝나도 투기는 계속되는 것이다.
돈과 선심 공약과 지역 감정 조장과 파벌 조작 등을 투자해 이득을 취하려는
청치 투기꾼들이 설쳐대는 한 우리나라는 희망에서 점점 멀어진다. 국가와
민족을 좀먹는 이런 투기꾼들 대신 진정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정치가가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맹자는 벼슬아치가 자기 직책을 다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고, 옳은
말을 해야 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그 말을 받아들이게 하지 못하면 역시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했다. 어찌 맹자의 말이기만 하겠는가. 주어진
직책은 제쳐둔 채 투기꾼이 되어 이익을 쫓는데 급급한 정치가들은 마땅히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물러나는 길만이 그들이 말로만 떠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일이다.
종교 장사꾼들도 정치 투기꾼 못지 않게 폐해를 가져온다. 신성 모독도
유분수지 그들은 감히 신을 팔고, 신앙을 팔고, 말씀을 판다. 정치 투기꾼들이
겉으로 국가와 민족을 내세우듯 그들은 신을 내세운다. 거룩한 신을 내세우니
사람들은 감히 의문을 던지지 못한다. 신앙을 내세우니 신자들은 오로지
매달리기만 한다. 말씀을 내세우니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의 은총을 기대할 수도 없고, 천당이나 극락 갈 생각도 하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어 놓고 종교 장사꾼들은 종단이니 교단이니 하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키우기 위해 시주금과 헌금을 열성적으로 모은다. 신에게 바치는
돈이라는 신념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불어넣는다. 물론 그런 돈들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쓰이거나, 신앙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성전을 짓는 데
쓰인다면 신에게 바치는 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된 성직자들은 실제로
돈을 그렇게 사용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돈의 사용법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참된 신앙의 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종교 장사꾼들은 내실보다는 외형을 키우는 일에, 자신의
안락과 탐욕을 채우는 일에 더 많은 돈을 쓴다. 성전이 커지고 성직자가
잘살아야 종교가 성공한 것으로 믿게 만들기 위해 그들은 무척이나 노력한다.
종교 장사꾼들의 농간에 속은 사람들은 그들이 유도하는 대로 그저 따라만
간다. 자기가 속한 교회나 사찰을 크게 만들기 위해 열심히 현금과 사주를 하고,
신자 수를 늘리기 위해 열심히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그러다보니 엉터리
신앙인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웃에 사랑과 자비와 어짐을 베푸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태만하고, 인간적인 도리를 배우고 실천하는 일은 외면하면서
종교 장사꾼이 요구하는 것에는 충실하려는 이들이 많다.
그런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남편과 아니
하나와 함께 사는 여자였다. 여자는 교회 다니는 데 아주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였다. 주일날만이 아니라 교회가 필요하다면 언제고 달려가는 열성을 갖고
있다. 외견상 보면 훌륭한 신앙인이라 할 법도 했다.
헌데 같은 교인이 아닌 이웃 사람들은 그녀를 좋게 보지 않았다. 때로는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의 행실이 너무도 인간적인 도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늙은 시어머니를 몹시도 구박했다. 밥을
차려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하루가 멀다하고 큰소리로 시어머니와 싸웠다.
늙었으면 빨리 죽으라는 말도 거침없이 시어머니에게 퍼부어대곤 했다. 그런
여자니 이웃 사람들에게 보인 잘못된 행실을 열거할 필요도 없다.
인간적인 도리로 보면 참으로 형편없는 그 여자가 교회에서는 신앙심이 깊은
교인으로 대접을 받는다. 헌금을 열심히 할 뿐만 아니라 교회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하기 때문이다.
딱한 노릇이다. 종교가 왜 있는 것인가. 인간적인 도리를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껍데기일 뿐인
일에만 매달려 그것을 신앙 생활로 착각하고 있으니, 껍데기일 뿐인 일에만
매달려 그것을 신앙 생활로 착각하고 있으니, 신이 보시면 크게 노하실 일이
아닌가. 종교 장사꾼들이 있기에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종교 장사꾼들이
종교를 집단 이기주의의 늪으로 몰아간다. 거기에서 종교의 진정한 존재 의미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재림 예수가 나타난다면 그를 가장 박해할 사람들은 기독교를 내세우는
종교 장사꾼들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미륵이 나타난다면 그를 가장 미워할
사람들은 불교를 내세우는 종교 장사꾼들 일 것이다. 투기꾼의 눈으로는 예수나
미륵을 알아보지 못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중요한 이유가 또 있었다. 더 이상
종교를 팔아 장사를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정치 투기꾼과 종교 장사꾼이 적지 않은 세상이니 부동산 투기꾼을 비롯한 돈
놓고 돈 먹기를 하는 일반 투기꾼들이 설쳐대는 것을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런 투기꾼들의 악영향 때문에 참된 일꾼이 되려는 사람들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못된 투기꾼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망해 버려라. 그래야 세상 사는 맛을
제대로 느끼며 살 수 있지 않겠나.

분서갱유하고 싶은 세상의 횡설수설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단행한 인물로 악명이 높다.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책이라는 책은 모조리 불태워 없앴고, 조정을 비난하는
학자들을 마구 잡아들여 구덩이에 묻어 생매장을 시켰으니, 포악한 독재자요
문화의 반역자란 악명을 들을 법도 하다.
로마에 불을 지르고, 불타는 도시를 즐겁게 감상한 네로 황제의 광기에 비견될
수 있을까. 광기라면 광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백 명의 학자들을
생매장시키고, 학문과 문화의 보고인 책을 모두 태워 버리는 걸 광기라 하지
않으면 무엇을 광기라 하겠는가. 그러나 광기라 해도 내막은 있었다. 진시황이
어느 날 갑자기 광기가 발동해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진시황이 신하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열고 있었다. 그때 순우월이라는
사람이 진시황에게 자기 의견을 고했다. 당시 진시황은 대제국을 만들어
중앙집권적인 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 순우월의 의견은 중앙집권적인 제도를
폐지하고 예전처럼 봉건제를 부활하라는 것이었다.
봉건제를 부활해야 하는 이유로, 황실의 안녕을 내세웠다. 즉, 봉건제를 채택해
지방마다 제후를 두어 다스리게 하면, 황제에게 충성하는 그 제후들이 안전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침략을 당하거나 누가 반란을 일으켜도 제후들이
충성심으로 나서서 황실을 보호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 제후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중앙집권적인 제도 아래서는 황실을 지킬 세력이 없어지니
재고해 달라고 말했다.
순우월의 말이 무조건 틀리다고만 할 수 없어 진시황은 신하들에게 제도에 대한
의견을 말하라 했다. 그러자 이사라는 신하가 나서서 순우월의 시각을 단호하게
비판했다.
이사의 주장은 이랬다. 과거 제후들은 두던 봉건제 시대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다. 제후들끼리 서로 세력을 키우려고 싸움을 일삼았기 때문에 늘 천하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 천하가 통일되어 법과 권위가 되살아났으니, 세상이
화평해졌다. 그런데 달라진 세상의 장점을 알지 못하고, 책에서 배운 학식만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천하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을 이사는 아주 냉소적으로 보면서 위험한 존재라고
부각시켰다. 그들은 자신의 학식만 가지고 법률이나 정책을 늘 도마 위에 올리고,
조정에 나와서는 입을 다무는 주제에 밖에 나가서는 계속 논쟁거리를 만들고,
때로는 의견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무리를 지어 세력을 형성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세력이야말로 후에 화근이 될 수 있는 위험스런 존재들이라며 이사는
진시황에게 문제의 분서를 단행하라고 청했다.
그 내용인즉슨, 삶에 꼭 필요한 의술과 복술을 비롯해 농경에 관한한 글과 나라
자체에 대한 역사적 글을 제외한 모든 책들을 태워 없애라는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학식을 바탕으로 논란을 일삼는 무리들이 생긴다는 이유였다. 그러면서
이사는 책에서 배운 자식으로 논란을 하는 사람들을 처형시키는 등의 형벌까지
제안했다.
진시황은 이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분서를 단행했다. 단순한 광기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었다. 물론 그 논리가 학식을 갖춘 사람들의 비판을
거부하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지극히 독재적인 것이었지만 단순하게 미친
짓으로만 볼 수 없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학자들을 구덩이에 생매장한 갱유의 사연은 또 이랬다. 진시황은 후생과
노생이라는 두 학자를 몹시도 아껴 후하게 대접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진시황의
호의 속에서 누릴 만큼 누리고 재물까지 충분하게 챙기게 되자 먼 곳으로 도망을
갔다. 도망을 가서 두 사람은 진시황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아 나쁜 소문들을
만들어냈다.
이에 진시황이 진노한 것은 물론이다. 진시황은 자기가 그렇게 호의를 베푼
사람들이 그 모양이니, 다른 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짐작했다. 생각만 해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몰래 사람들을 거리로 보내 알아보게 했다. 예상대로
많은 학자들이 조정과 진시황을 비난하는 게 현실이었다. 진시황은 그들을 모두
잡아들여 구덩이에 생매장하는 참혹한 형벌을 가했다.
분서와 갱유, 그것은 독재자의 광기어린 만행이요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될
반문화적 폭거라 할 수 있다. 진시황이 아무리 자기 행동의 동기와 정당성을
주장한다고 해도, 결코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끔, 아주 가끔
나도 분서갱유하고 싶다고 느낄 때가 있다. 물론 모든 책을 다 태워 버리거나,
누구를 생매장하고 싶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그 많은 헛소리,
횡설수설, 잡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것들을 분서갱유하고 싶어진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헛소리, 횡설수설, 잡소리들이 왜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다.
다양한 의견이 많다는 소리가 아니다. 다양성은 언제나 존중되어야 하고, 그
속에서 참다운 창조가 가능할 수 있다. 스스로 깨우쳐 생각하는 자각적 사고와
그를 바탕으로 한 이론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이론이 넘쳐난다.
자각적 이론이 아니라 입으로 달달 외운 이론이 홍수처럼 세상을 휩쓸고 있다.
99퍼센트의 이론보다는 단 1퍼센트의 실천이 중요함을 말하고 싶다. 헌데 요즘
세상을 보노라면 1퍼센트의 실천도 하지 않는 무리들이 온갖 소리를 해댄다.
온갖 헛소리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온갖 횡설수설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온갖
잡소리로 세상을 혼탁하게 만든다. 순정이 없는 기생의 교태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말과 이론들이 서로 잘났다고 고개를 내미는 꼴을 볼라치면 구역질이
난다.
잡지를 비롯한 온갖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온갖 소리들이 대부분 허황하게만
들린다. 단순히 허황한 것만도 아니다. 때로는 아주 가증스럽고 간악하다.
무엇이 인간과 사회에 유익한 것인지는 관심이 없는 듯 보이고, 그저 흥미거리로
사람들을 붙잡으려고 온갖 헛소리, 횡설수설, 잡소리를 늘어놓는다.
서양물 먹고 돌아와 행세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교묘하게 이론을 엮어
가지만, 실체는 텅 빈 것들이 왜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다. 서양물 먹지 않아도
그와 다를 바 없는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 역시 어찌 그리도 할 말이 많은지
끊임없이 입을 놀리고 펜을 놀린다. 그런데 제대로 쓸 만한 말이나 글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로지 말이나 글을 밥벌이와 명예를 얻는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닌가 싶다.
자식을 장식품 정도로 여기는 허풍쟁이들도 온갖 헛소리, 횡설수설, 잡소리를
일삼는다. 그들은 모르는 게 없어 보이지만 어제 한 말이 다르고 오늘 한 말이
달라지기 십상이다. 삶 속에서 스스로 깨우치고 실천하는 그런 말 그런 이론이
아니라 그저 허영 때문에 내뱉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임지지도 못하는 말로
비난과 중상을 즐기는 부류들도 많다. 비난할 먹이만 생기면 기회다 싶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런 실천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임무는 비난과 중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듯 구는 한심한 족속들이다.
이런 현실이니 미래의 희망이 되어야 하는 청소년들도 나쁜 습성에 빠져들곤
한다. 생활에 입간한 실천 교육을 받지 못한 상당수 청소년들은 기성세대의 잘못
때문에 뭐가 뭔지도 구분하지 못하고 그저 입을 놀려댄다. 그저 즉흥적으로
느끼는 대로, 자기 편리한 대로 말하고 주장하고 고집을 부린다.
가끔 아주 가끔 나는 이런 현실에 분통이 터지면 분서갱유를 하고 싶어진다.
이런 나의 말을 듣고 어느 지인은 독재자를 인정하는 반민주적인 태도가 아니냐고
했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소리다. 그러나 헛소리,
횡설수설, 잡소리를 다양성이라는 으름으로 포장할 수 없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은 먼저 현명하고 선량하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현명한지 선량한지도 모르고 무작정 자유를 구가하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다.
현명하지 못하고 선량하지 못한 자들이 누리는 자유의 결과는 당연히 현명하지
못하고 선량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온갖 헛소리, 횡설수설, 잡소리도 따지고
보면 현명하고 선량하지 못해서 나오는 소리들이다. 그것들은 자유를 누릴
가치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설사 스스로 현명하고 선량하다고 판단하고, 그
바탕 위에서 어떤 소리를 한다고 믿고 있어도, 지나치게 그것에 매달려 자기 말을
즐기면 참된 진리를 잃고 만다.
장자는 "재유편"에서 이에 대해 말했다. 재유란 천하를 스스로 너그럽게 있게
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을 읽어 보면 자기가 아는 것을 지나치게 즐기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재유편의 일부분을 대강 옮기면 아래와
같다.

눈이 밝음을 즐기는 것은 색깔에 빠지는 것이요, 귀가 밝음을 즐기는 것은
소리에 빠지는 것이며, 인을 즐기는 것은 덕을 어지럽히는 것이요 의를 즐기는
것은 도리를 어기는 것이다. 또한 예를 즐기는 것은 기술을 조장하는 것이요
악을 즐기는 것은 방탕함을 돕는 것이며, 성을 즐기는 것은 속된 학문을 돕는
것이요 지, 바로 지식을 즐기는 것은 시비를 따지는 병을 돕는 것이다.
세상이 장차 그 성명의 진실에 편안할 수 있으면 명을 비롯한 여덟 가지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겠지만, 세상이 장차 그 성명의 진실에 편안할 수 없다면
그 여덟 가지는 사람을 얽매고 바쁘게 하여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 것이다.
그러하거늘 사람들은 그 여덟 가지를 숭상하고 아끼니, 참으로 미혹됨이 심하다.
더구나 그것들을 존경하는 정도에 그치면 그만이겠지만,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은 후에 그것을 말하고, 꿇어앉아서 그것을 주고 받고 북치고 노래하며
떠들어대니 이것들을 어찌해야 하겠는가.

올바른 지식이라도 지나치게 즐기면 시비를 따지는 병이 될 뿐이라고 장자는
지적했다. 올바른 지식도 그러할진대, 그릇되고 비뚤어진 지식을 온갖 헛소리,
횡설수설, 잡소리를 늘어놓으면 그 폐해가 어떠하겠는가.
세상을 공연히 어지럽히지 않으려면 사람은 말이나 어떤 이론을 내세우기에
앞서 자신이 현명하고 선량한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더불어서 자기의 말이나
이론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책임을 진다 함은 삶 속에서 실천을
해야 함을 뜻한다. 실천할 수 없는 숱한 소리들은 세상을 혼란스럽게만 할 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교묘하게 이론만 앞세우는 사람은 분서갱유라는
반문화적 폭거를 단행한 진시황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체증 앓는 세상

요즘 사회는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 쌓아 온 지식 때문에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지식이 왜 문제일까. 언뜻 보면 지식의 많고 적음 때문에 사회가
갈등한다고 하겠지만, 그건 아니다. 지식이 너무 넘쳐서 혹은 지나치게 모자라서
사회가 갈등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지식이 모자라는 사람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를 보면 부러움을
느끼고, 때로는 그 부러움이 지나쳐 마음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러나 부러움은
갈등의 요인이라기보다는 발전의 원동력으로 봐야 할 것이다. 자기 분수를
안다는 것이 부러움마저 갖지 말아야 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지식의 많고 적음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고 믿고 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학벌을 지나치게 중시하기 때문이다. 여러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좋은 학벌을 갖지 못한 사람은 사회적인 차별을 경험할 때
분노하고, 때로는 열등감에 빠지기도 한다.
바로 거기에서 사회적인 갈등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능력이나 실제적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학벌을 중시하는 사회의 폐단일 뿐이다.
지식 그 자체의 많고 적음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학벌이 곧 지식의 많고
적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다 살면서 배운 만큼의 지식을 갖고 있고 거기에는 차등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학교에서만 지식을 쌓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학벌이 남부럽지 않은 사람이건
조금 떨어지는 사람이건 각자가 세상에서 담당하는 분야가 있고, 거기에서 얻는
지식이 있는 것이다.
지식이 철철 넘쳐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모든 분야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모두 제각기 자기가 관심을 갖는 분야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
뿐이다. 예를 들어 나이 어린 고졸 여사원이 특정 분야의 유명한 박사보다
문학에 대한 지식이 훨씬 높을 수 있다. 그건 이상한 게 아니다. 특정 분야를
넘어선 보편적인 지식 역시 학벌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벌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것이 사회적 갈등을 유발한다고 할 수는 있어도,
엄밀히 말해 지식의 많고 적음이 갈등의 원인이 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지식이 왜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는 것일까.
문제는 지식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갖 사회적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왜 제 구실을 못할까. 정신과 갈등하기 때문이다. 배워서 있는
지식과 마음의 알맹이인 정신이 어긋나, 그 둘은 서로 물어뜯으며 다투곤 한다.
요즘 세상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잠시 한눈을 팔면 시대에 뒤떨어질 정도로
변화는 빠르다. 어찌나 빠른지 정신없다거나 어지럽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된다. 깜짝깜짝 놀라 간이 떨어질 정도로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그런 세상이니 지식이란 것도 홍수처럼 밀려와 쌓인다. 세상이 급속도로
변한다는 것은 새로운 문명이 빠르게 밀려온다는 뜻이고, 새로운 문명이란 것은
새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새로운 문명이니 새로운 지식이니 할
때 그 새로움은 긍정적인 면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전에 보지 못했던 다른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 것들이 끊임없이 밀려와 사람들을 압박한다.
그런 세상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은 마구 지식을 섭취한다. 세계 각지에서 밀려오는 지식을
되도록 빨리 또 많이 섭취하려고 허겁지겁 먹어댄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하듯
그렇게 허겁지겁 지식을 받아 들이다가 체증에 걸린 게 이 땅에 사는 요즘
사람들의 초상이다.
변화라는 것에는 과정이 있고 시간도 필요한 것이다. 머릿속에 지식만
채운다고 능사가 아니다. 우리의 생활과 의식을 향상시키고,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제대로 세우면서 지식을 쌓아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했다. 마치 변화 그
자체가 중요하고, 지식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인 양 급히 섭취하기에 바빠 지식은
지식대로 따로 놀고, 정신은 정신대로 따로 노는 이상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니
체증에 걸려 가슴에 어떤 풀 수 없는 응어리를 갖고 있는 게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사람은 정신으로 생활 문명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을 때 정상적이고 희망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다. 정신의 통제권을 벗어난다면 그 어떤 것도 혼란만 줄 뿐
삶의 질을 결코 높일 수 없다. 삶의 질이 낮아지니 당연히 문화와 역사는 새로운
변화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일에 실패한 것이 아닌가 싶다.
위의 현대사를 보면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외견만
보면 많은 발전도 이루었다. 폐쇄사회에서 개방사회로 가고, 생활의 궁핍함에서
풍요로움으로 가고 있다. 보릿고개를 걱정하던 사람들이 작금에는 다이어트에
신경을 쓰고 있으니 식생활만 따져도 세상은 정말 많이 변했다.
발전을 이룬 만큼 부정적인 변화도 무수히 겪으며 살고 있다. 인간으로서
존중할 태도와 바뀌어, 순수하고 따뜻한 정보다는 냉정하고 이기적인 욕심을
앞세우거나, 남성이 여성화되고 여성이 남성화 되기도 하고, 속옷과 겉옷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차림새가 달라지기도 한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변화에는 갈등이 따르게 마련이다. 여러 갈등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지식과 정신의 갈등이 가장 크다.
산업사회, 그것도 한강의 기적이니 무슨 기적이니 하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급속도로 달라지는 산업사회에서 교육마저도 그것을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학교
교육만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서의 교육도 그랬다. 그러니 지식은 기능적으로만
작용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전통 문화를 올바로 승계해 발전시키는 것이 참된 문화 창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지식의 하나로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의 문화가 우리 문화를 제치고 주인 행세를 하는 불행한 현실을 엄연히
벌어지고 있다. 왜 그럴까.
우리의 정신을 가지고 그 외국의 문화들을 통제하고 조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실패요 비극이다. 삶의 실패는 자기가 아는 것을 실천하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다. 모를 때는 알도록 노력하면 되지만,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을
때는 실패밖에 기다리지 않는다. 말로는 우리 문화의 중요성을 앵무새처럼
반복하지만, 정신이 미치지 못하니 앵무새 소리를 지식의 공염불에 불과할 뿐이다.
더 나아가서 지식마저도 이제는 왜곡되어 있다. 외국 문화의 침투에
농락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지식도 외국의 것을 따라가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외국과의 교류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따라가기에 급급한
것은 자기를 잃는 것이다. 자기를 잃은 상태에서 무슨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어쨌거나 지식은 그것이 제대로 배운 것이건, 왜곡된 채로 받아들인
것이건 정신과 갈등을 빚고 있다.
현대 사회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것이라고 변명할
일이 아니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일 뿐이다.
모든 것을 다 누리려는 욕망이 앞서서, 보고 들은 것은 무엇이건 다 흉내를 내려
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마음의 알맹이인 정신으로 무엇이 소중하고,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판단해야 하는데 그러질 않았다. 일단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보자는
식이었다. 얼핏 봐서 좋게 보이거나 욕심이 가는 것에는 생각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고 손을 뻗었다. 미련하게 밥을 먹는 아이와 다를 게 없다. 어느 날 자기
집에서 먹지 못하던 남의 집 음식을 본 한 아이는 생각도 없이 미련하게 마구
퍼먹었다. 이것도 맛있는 것 같고 저것도 맛있는 것 같아 수저를 정신없이
놀려댔다. 그렇게 입에 퍼넣는데 체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미련한 아이와 마찬가지로 급격한 사회 변화를 무작정 받아들이다가, 어느 순간
자기를 돌아보고는 스스로 놀란다. 도대체 왜 있는지도 모르는 것들에 자기가
포위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기 때문이다.
체증을 앓고 있음을 알았다면 빨리 그 체증을 풀어야 한다. 그런데 가슴만
답답할 뿐 체증을 풀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엉뚱한 곳에서 빗나간
방법으로 풀려고 시도한다.
근자에 우리나라에서 향락산업이 번창하는 이유도 나는 거기에서 찾는다.
체증을 앓는 사람들이 풀 길을 찾지 못하자 향락 속에 묻혀 잊으려 하는 것이다.
도시는 향락 산업이 숲을 이루고 있다. 체증을 앓는 가련한 영혼들이 가슴이 뻥
뚫리기를 기대하며 그 숲으로 간다. 그러나 그 숲은 순간적인 마취 구실을 해줄
뿐 결코 체증이 내려가게 하지는 못한다. 애초에 향락으로 풀 체증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순간적인 마취일 뿐임을 알면서도 부지런히 그
숲으로 간다. 그 숲으로 가는 길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길이
없겠는가. 현재 앓고 있는 체증을 내리고 앞으로 또 체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다.
우리 정신의 숲을 가꾸어야 한다. 지식이 갈등 없이 와서 어울리고, 문명의
변화라는 것이 머무르면서 참된 인간적 가치 속에서 자랄 수 있는 터전이 되는
정신의 숲을 가꾸어야 한다. 이 미 황폐화된 숲이라고 좌절할 것은 없다.
정신의 숲을 가꿀 수 있는 싹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길에서 만난 두 사람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할 만큼 숱한 만남들이 우리
앞에 있었고, 또 기다리고 있다. 비록 무인도에서 홀로 살다가 하늘을 바라보며
죽는 사람일지라도 그는 어떤 만남의 결과로 태어났고, 그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만남에는 잠시 스쳐가는 바람 같은 것도 있고, 오래도록 지속되는
유장한 강물 같은 것도 있다. 빨리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도 있고, 늘
떠올리며 그 향기를 맡아보고 싶은 것도 있다.
만남은 대개 필연이라 하기엔 우연에 가깝고 우연이라 하기엔 필연에 가까운
것들이라, 만남의 대상을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만은 없다. 인생의 그 많은
만남은 오히려 언덕 위에 서서 무엇인가를 기다리다가 만나는 바람과 닮아 있을
것이다. 헌데 잠시 스쳐가는 바람일지라도 향기를 몰고 오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악취를 담고 불어 오는 것도 있다.
내게도 숱한 만남들이 있다. 그 가운데 사소하기 그지없는 만남처럼 보이지만
지금도 잊지 못하는 두 만남이 있다. 두 만남 모두 길에서 우연히 이루어져 금세
끝난 것이었지만, 하나는 불행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다행스런 것이었다.
서당에서 공부하던 어린 시절의 일이다. 나는 괴나리 봇짐 하나 짊어지고
서울로 올라온 적이 있었다. 무작정 상경인 셈이었다. 서울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어린 가슴은 채워져 있었다. 거기에 나를 자극시키는 말까지 있었다.
정약용은 장안에서 삼백리 밖을 벗어나지 말라는 글을 남겼다. 그 영역에서
벗어나면 사람도 문화도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과 다름없는 뜻이었다. 도대체 서울이란 곳이 어떻기에
그런가 하고 나는 잔뜩 호기심에 들떠 있었다.
완행열차를 타고 내린 곳이 용산역이었다. 댕기머리에 한복을 입고 괴나리
봇짐까지 매었으니 사람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보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낯선 땅에서 사람들의 그런 시선을 느끼며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더욱 몸을 꼿꼿이 했다.
마음으로 그리던 서울로 오기는 했는데, 당장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가
막막했다.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는 역 광장으로 나온 나를 줄곧 따라붙어온 것이었다. 남자는 내게 어떻게
서울로 오게 됐는지를 아주 상냥하게 물었다. 외지에서 나는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 남자는 부처님을 흉내낸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머금고
자기가 모든 편의를 봐 주겠다고 했다. 직장도 알아봐 주겠다고 하니 나는
구세주라도 만난 기분이었다.
우리는 함께 남산과 창경원 구경까지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왠지
그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어 나는
갈 데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역시 친절하게 바로 앞에 아는 누나 집이 있으니
내 짐을 맡기고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서울에서 돈이 든 짐을 들고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고까지 했다. 그는 이미 내 짐 속에 하숙비가 들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남자는 내 짐을 들고 아는
누나의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헌데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그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조금 불안해진 나는 그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그 남자는 내 짐을 들고 뒷문으로
도망간 후였다. 아는 누나의 집이 아닌 것은 물론이었다.
주머니에는 서당으로 돌아갈 차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잔돈까지 다 털어
대전까지 가는 기차표를 겨우 끊을 수 있었다. 밤 열차를 타고 서울을 떠나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허전했다. 사기꾼에게 속은 스스로를 책망하며, 서울에
대한 호기심마저 다 버리고 어둠 속을 질주하는 기차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새벽에 대전에 도착해 친구 박완식의 집을 찾았다. 친구에게 차비를 얻어
서당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내 나이 열 여섯 살이었다.
부처님 얼굴을 흉내낸 그 사기꾼은 내 돈만이 아니라 서울에 대한 순수한
기대감마저 가져가 버렸다. 남의 꿈마저 훔쳐간 그 사기꾼과의 만남은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불행한 만남이었다.
불행한 만남이 있으면 다행스런 만남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만남이란 것을 기대하겠는가.
미국 뉴욕에 간 적이 있었다. 우리의 정신과 전통에 대한 강연을 할 기회가
생겨서 찾아간 곳이었다. 나를 초청한 측을 대표해서 박 기자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우리가 공항을 막 빠져나가려는데 한국인인 젊은 부부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초면이지만 갓을 쓴 나를 보고 그들은 반가워했다. 이역만리 머나먼
땅에서 도포를 만났으니  나 역시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모를
마중나온 처지였고, 나 역시 갈 길이 있는 몸이었으니 우리는 가볍게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박기자가 매가 머물고 있는 호텔로 찾아와 술을
마시러 가자고 했다. 우리는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술집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무며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밤 열한 시가 되었다.
술집에서 나온 나는 호텔을 혼자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빌딩이
숲을 이루고 있었지만 호텔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박 기자는 자신하는 나를
두고 자기 집 방향으로 먼저 갔다.
깊은 밤에 낯선 이국의 도시를 걷노라면 약간의 두려움은 생기게 마련이다.
술기운으로 두려움을 털어내며 호텔로 걸음을 재촉했다. 별 어려움 없이 호텔
앞에 도착하기는 했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지기 흑인이 나올
때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출입문의 생김새도 아주 딴판이었다. 건물의
모양새를 보면 분명 그 호텔인데 어찌된 셈일까.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낯선
문지기 흑인에게 다가가 물어 볼 수도 없었다.
당시 나는 흑인 공포증 같은 것이 있었다. 흑인들에게는 미안한 얘기가
되겠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왜냐하면 밤거리에서 흑인들을 조심하라는 소리를
너무도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문지기야 교대를 해서 낯설다 할 수 있어도, 몇 시간
사이에 출입문이 아주 딴판으로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나는 혹시나
하며 호텔 주변을 빙빙 돌며 찾아 보았다. 비슷한 건물을 내가 호텔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 봐도 내가 찾는
호텔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출입문이 달라진 그 호텔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거리를 헤매다가 나는 길마저 잃고 말았다.
어두운 뉴욕의 거리에서 공포감이 밀려왔다. 미로 속을 헤매다가 영원히 국제
고아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나는 몸을 부를 떨었다. 달해 보지
않으면 그 심정을 모른다. 국제 고아도 국제 고아지만 불량배들에게 당장 무슨
변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두려움에 떨며 두세 시간을 헤맸다.
이미 새벽이 되었다. 그러나 날이 밝기를 기다리면 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공포감 때문에 정신이 온전할 수 없었다. 설사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해도 그 밤을
어떻게 보낸단 말인가.
망연히 이리저리 걷고 있는데, 어떤 차가 내 뒤에서 경적 소리를 냈다. 드디어
불량배들이 나를 먹이로 삼은 것인가.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그런데 이게
누군가.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남자였다. 아내와 함께 부모를 기다리던 그
사람이었다. 깊은 밤이었지만 그는 한복을 입고 있는 나를 알아본 것이었다.
나는 너무도 반가워 한숨까지 푹 쉬었다.
그가 왜 그 시간에 그 거리를 지나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나는 그이
도움으로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처음에 찾아간 바로 그 건물이었다.
문제가 생긴 것은 내가 그 호텔 정문이 아니라 후문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출입문 모양도 다르고 문지기 흑인도 다른 것이었는데, 낯선 도시에서
당황하다 보니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해 그 고생을 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그 남자와의 우연한 재회는 다행도 그런 다행이 없었다.
우연한 만남에는 이렇게 불행을 가져오는 것이 있는가 하면, 다행스런 일이
되는 것도 있다. 그렇다면 만남의 그 불행과 다행은 우연과 재수가 좋고 나쁨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일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물론 사람의 힘이 미치지 않는 것이 있다. 아무리 좋은, 다행스런 만남만
가지려 해도 나쁜, 불행한 만남을 피할 수는 없다. 또한 뉴욕의 밤거리에서 내가
경험한 것처럼 우연한 행운의 만남을 늘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도움이 되는 길은 있다. 만남이란 바로 사람을 보는 눈을 가지면 된다. 부처님
흉내내는 사기꾼에게 내가 속았듯 사람을 바로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
삼국지에서 나오는 제갈량도 자기 나름대로 사람을 알아보는 지인법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의 사람 됨됨이를 보는 일곱 가지 방법이다. 당시 사람들의 삶이나
사회 분위기가 오늘날과 달라 지금 그대로 적용해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참고 사항은 될 것이다.
하나--상대에게 시비를 따져서 그 사람의 뜻을 알아본다.
하나--상대에게 말을 궁벽하게 몰아가서 그 사람의 임기웅변을 알아본다.
하나--상대에게 꾀를 물어 그 사람의 지식을 알아본다.
하나--상대에게 급작스런 변란을 만들어 그 사람의 용맹을 알아본다.
하나--상대에게 술을 마음껏 먹여 그 사람의 본성을 알아본다.
하나--상대에게 큰 재물을 다루게 해서 그 사람의 청렴성을 알아본다.
하나--상대에게 어떤 약속을 주어 그 사람의 신용을 알아본다.
순수하고 고귀한 만남이라면 제갈량의 지인법 같은 것들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남의 순수함과 고귀함은 그저 생기는 행운만은 또한 아니다. 사람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 잊고 싶은 만남보다 늘 기억하고 싶은
만남을 더 많이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서당에서 만난 요즘 아이들

해마다 방학 때가 되면 도시의 아이들이 청학동 서당으로 찾아온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나와 그 아이들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함께 보내게 된다. 아이들을
보노라면 한편으로 기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 학교에서 배울 수 없었던 우리 것을 알고 싶어 찾아왔으니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한문에 대한 기초 소양과 함께 우리 문화와 예법에 대해
가르치노라면 어떤 희망 같은 것도 느껴진다. 우리 것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아이들이 차츰 우리의 정신을 살리는 서당의 분위기에 젖어든다.
당연하다. 아무리 사회가 변하고 서양 문물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어도 피까지는
바꿀 수 없다. 피 속에 흐르는 민족의 기질과 정신을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교육만 제대로 방향을 잡으면 언제든지 살아나는 우리의 정신과 기질이
있으니 어찌 희망적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요즘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희망도 희망이지만, 안타까움을 떨칠 수가
없다.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정과 학교에서의 잘못된 교육을 절로 통탄하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키웠길래 아이들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창작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미
만들어진 것을 가지고 흉내와 모방은 잘한다. 컴퓨터를 배워서인지 기계적인
조작 같은 것에도 과거의 아이들과 비교해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창작성은 떨어지는 것이다. 아이를 가르친다 하는 것은 세상에서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홀로서기를 하기
위해서는 창작성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미 만들어진 것을 흉내내는 것으로는
스스로 설 수 없다. 남이 우뚝 서야 겨우 그 옆에서 기생할 수 있을 뿐이다.
아이들에게 청소를 시켜 봐도 알 수 있다. 서당 주위의 마당을 청소하라고
하면 아이들은 열심히 쓰레기를 줍기는 한다. 그러나 줍기만 하고는 그만이다.
손에 쓰레기를 들고 서서는 어떻게 할 줄을 모른다. 아마 청소를 할 때는 늘
주변에 쓰레기통이 있어서 거기에 넣었던 모양이다. 그런 쓰레기통이 보이지
않으니 어찔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통을 구해 오든지 태워 없애든지 어떤
대책을 생각해내지 못한다. 아니,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 보인다. 늘
그랬던 것처럼 있어야 할 쓰레기통이 없으니 그저 손에 쥐고 서서 누군가의
명령이나 도움을 바랄 뿐이다.
할 수 없어 아이들에게 모은 쓰레기를 태우라 하면, 그제사 방법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것만으로 또 그만이다. 태우려면 당연히 성냥이건 뭐건
구하고 태울 장소를 물색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할 일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멍청하게 서 있을 뿐이다. 왜 태우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때서야 성냥이 없다는
대답을 한다. 적극적으로 태울 장소와 성냥을 찾지 않는다. 결국 성냥까지 손에
쥐어 주고, 쓰레기를 태울 장소까지 말해 주어야 청소를 겨우 끝낼 수 있게 된다.
청소의 전 과정은 결국 지시의 연속일 뿐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해 보고,
그에 따라 방법을 찾아내 처리하는 기본적인 능력마저도 갖고 있지 않다. 스스로
탐구하고 만들어내는 창작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청소마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쩔쩔매니 창작성이 없으면 손도 못 댈 일을 앞에 두고는
어쩌겠는가.
아이들의 청작성은 점점 퇴보하라는 듯이 보인다. 거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다. 자연 속에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특별히 교육이라고
할 것도 없다. 자연을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자연은 아이들에게 가장
훌륭한 교육장이 된다. 자연은 창작의 현장이다. 대지에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자라고, 숱한 변화를 겪으며 살다가 진다. 지는 것은 그 바탕 위에서 생명의
씨앗은 다시 피어나 영원한 자연의 일부분이 된다. 그 과정이 자연 속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인간 역시 그 일부분이니 어렵게 배우지 않아도 자연 속에
있노라면 가슴을 열고,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허나 요즘 도시의 아이들은 자연을 접하기 못하기에 그 창작성을 배우지
못한다. 학교에서는 현장 교육은 꿈도 꾸지 못한 채 그저 책 속의 자연만을
말한다. 학교에서 나와 거리에서 보는 것은 또 무엇인가. 사고의 위험 때문에
늘 조심해야 하는 차와 인공적인 건물들과 상혼으로 동심을 멍들게 하는 유해
환경들이다.
시골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학교 밖의 자연은 교육의 현장이지만 도시의
아이들에게 학교 밖의 거리는 다치지 않기 위해 늘 긴장해야 하는 위험 지대가
된다. 그러니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위험한 짓을 하지 말고, 늘
조심하라는 것을 주로 가르친다.
그런 환경에서 창작성을 배울 수는 없다. 먼 산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아이와
가까이 있는 차를 비롯한 위험 요소만을 보고 긴장해야 하는 아이는 느끼는 게
다르고 생각하는 게 다를 수밖에 없다. 책 속에 그려져 있는 꽃 그림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아이와 그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직접 보고 향기를 맡아보는 아이는
배우는 게 틀리다. 비록 도시 아이들이 직접 보지도 못한 채 꽃 이름과 그
특징을 달달 외워 시험 성적을 높일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죽은 지시게 불과하다.
외운 것으로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조금 흘러 외운
것을 잊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한 죽은 자식은 아무리 머릿속에 넣어봐야
창작성을 키우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창작성의 부족과 함께 아이들의 홀로서기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지나친 과보호로 아이들을 부모 자신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게끔 조장하는 문제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이 부모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아이들은 단순히
사육당하는 동물과 다름이 없어진다. 자식들이 늘 자기 품안에 있는 것만을
즐기는 부모들이 있다. 바르게 키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생각지 않고, 제
자식 귀한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학교에서 자식이 선생에게 매 좀 맞았다
하면, 그 교육적 가치는 생각지 않고 당장 난리를 부린다. 어떻게 남의 집 귀한
자식을 때릴 수 있냐는 식이다.
물론 선생이란 사람들도 가지각색이라 체벌도 교육적이라 가치가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하고 폭력의 사용이라 부를 만큼 잘못된 체벌도 있다. 그러나
교육적으로 가치가 있는 체벌도 요즘 부모들은 참지 못한다.
자식이 품안에 있는 것만을 즐기는 부모들은 잘못된 교육마저도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사 달라는 것은 다 사주고, 먹고 싶다는 것은 다 먹이고, 입고 싶다는
것은 다 입히는 걸 사랑으로 안다. 또한 버릇이 없게 굴어도, 산만하고 이치에
닿지 않는 행동을 해도 내버려두고 감싸기만 하는 것을 사랑으로 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아이를 망치는 지름길일 뿐이다.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종종 회초리를 들곤 한다. 서당에 며칠 있다 보면 나의 교육 방법을 알기에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은 회초리 맞을 준비를 한다. 그렇게 마음으로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아이들에게 잘못을 스스로 깨우치게 해 주고 회초리를 대면 그 교육적
효과는 아주 크다. 회초리는 신경세포를 일깨우는 데 아주 특효한 것이다.
헌데 회초리를 맞은 아이 가운데 아주 가관인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이 있다.
눈물을 줄줄 흘리고 엉엉 울면서 집에 전화를 건다. 그리고는 회초리를 맞았다고,
맞은 수치까지 고한다. 당장이라도 달려와 자기를 좀 안아 달라는 듯이 그런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런 아이의 부모 가운데 내게 전화를 걸어 자기 자식을
회초리로 좀 때리지 않을 수 없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전화를
받으면 나는 당장 자식 데려가라고 호통을 친다.
자식 귀한 건만 알았지, 어떻게 귀하게 키워야 하는지는 모르는 부모들이 많다.
그저 감싸고 돌면 되는 줄 안다. 그것은 자식을 망치는 길이다. 아이가 크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 알아서 후회한들 이미 때는 늦다.
기계적인 도시 교육 환경이 주는 창작성의 결여와 부모의 과보호로 인한
의타적인 태도 같은 것으로 요즘 아이들은 시들어 가고 있다. 흉내는 내면서도
무엇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로봇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로봇은 그것이 아무리
고도의 기술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해도 로봇일 뿐이다. 세계 최고의 로봇도
결코 창조적인 인간과 비교될 수는 없다.
진단 결과가 나왔으면 처방은 그에 따르면 된다. 대자연과 자주 접하게 하는
등의 노력으로 아이들의 창작성을 높이고, 과보호의 굴레를 벗겨내 스스로 서서
세상을 보게 만드는 게 요즘 아이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다행히 아이들은 언제나 희망이다. 천진난만하기 때문에 좋은 면은 그대로 잘
살릴 수 있고 나쁜 면은 가정과 사회에서 고치면 또 좋은 면으로 만들 수 있다.
구제 불능의 어른들은 있어도, 희망이 없는 아이들은 없다. 아이들에 대한 그
희망은 바로 미래를 보는 사람의 희망이다.

무자식이 상팔자인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자식 농사 잘 짓는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겨 왔다.
사람으로 태어나게 한 후 사람다운 사람으로 키우는 보람보다 더 큰 것이 있을까.
세상에 자식으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없을 터이니, 자식 농사 잘 짓는 것은
부모의 보람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축복이 된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변해도 아주 이상하게 번해 버렸다. 자식을 부부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 정도로 여기는 풍조도 일부에서 있는 모양이다. 신문에서
딩크족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영어 그대로 해석하면 수입을 두 배로 하고
아이는 갖지 않는 부부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아이들 갖지 않고 부부가 맞벌이를
하면서 수입을 두 배로 늘려 행복을 누리겠다는 족속이란다. 외국에 그런
족속들이 많고, 우리도 그 영향을 받았는지 비슷한 부류들이 생기는 모양이다.
인생을 아주 실리적으로 살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자식 키우는 일에 힘을
쏟으면 시간을 보내면 짧은 인생을 언제 즐기며 살겠냐는 계산이 깔려 있을
것이다. 하기야 우리도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한탄을 곧잘 하곤 했다. 자식
키우는 일이 보통 힘겨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딩크족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 자식 하나만 낳겠다고 말하는 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젊은 여자들 가운데 자식 서넛 낳으면 좋겠다고 누가 말하면 자기가 무슨
애 낳는 짐승이냐고 눈을 흘기는 이들도 있다. 짐승이라니? 그러면 과거
어머니들은 짐승이었단 말인가.
하기야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무조건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누구나 인생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문명의 변화와 함께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 대책도 없이 자식을 줄줄이 만들어 낸
흥부 부부는 조롱의 대상이 될지언정 그 다산성을 칭찬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잘해야 '자식 하나'를 고집하면서 자식을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쯤으로
여기는 풍조는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있다. 생각 자체의 문제도 문제지만 '자식
하나'로 인해 숱한 부작용들이 뒤따르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자식을 낳는 것은 자기 행복을 위한 권리이기도 하지만
의무이기도 하다. 종족을 이어가는 것은 인류의 의무요, 한 국가로 말하면
국민으로서의 의무가 된다. 국민이 없는 국가가 있을 수 없고, 인류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도 자신만은 그 의무에서 빠지겠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개인주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어쩌면 의무라는 말에 코웃음을 칠
것이다.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자기가 자식을 낳지 않는다고 뭐가
나빠지겠냐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차라리 낳지 않는 게 보탬이 되는
것이라 주장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산아제한이란 것이 한동안 맹위를 떨쳤으니,
그들도 나름대로 논리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인구가 많기 때문에, 진정 인구 문제를 걱정해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것일까. 요즘 젊은이들은 그게 아닐 것이다. 단지 보다 편히 즐기며
살기 위해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식구가 많아야 집안이 풍요로워지듯 인구가 많아야 국가도 풍요를 누릴 수
있다. 물론 인구가 많다고 무조건 국력이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정
인구를 갖추어야 국력을 키울 수 있고, 그 국력을 바탕으로 보다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온갖 혜택을 주며 아이 낳기를 장려하는 것은 그런 이치를 알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풍토가 지속된다면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유럽의 나라들처럼 아이
낳기를 장려해야 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사람들이 저마다
개인주의를 앞세운 행복관만을 고집 한다면, 울 수도 차마 웃을 수도 없는 그런
날이 찾아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 하나'풍조가 만연해 누구나 그것을 고집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남자와 여자 둘이 만나 하나를 낳는 셈이 된다. 하나를 낳은 둘은
죽을 것이니, 세상은 결국 두 생명이 사라지고 하나의 생명이 남게 된다. 그것이
반복되다 보면 인구는 점점 줄어들 것이 아닌가. 인구에 관한한 요즘 세상에서
문제가 되는 핵심은 인구 과잉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과 같은 자식 하나 풍조가 점점 위세를 떨치게 되면 미래에
어떤 결과가 올지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 아닌가. 먼 곳을 바라보며 사람은
가치관을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자식이 개인주의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상팔자가 될 수 있다. 국가가 어떻게
되건 인류가 어떻게 되건 자기만 잘살다가 죽으면 그만 이라는 식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개인적으로 본다고 무자식이 정말 상팔자일까. 행복관을 너무
편의적으로, 얄팍하게 갖고 있어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닐까. 참다운
행복이란 것은 오랜 수고와 인내 속에서 그 열매로 주어지는 것이다. 수고와
인내를 거부하는 쪽으로만 살아서는 행복의 참맛을 느낄 수 없다. 자식을 낳고
기르는 것은 단순한 수고와 인내만은 아니다. 사랑이라는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
거기에 배어 있는 것이다. 그것마저 거부하면서 찾는 행복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최대한 즐기면서 살겠다고 하는데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큰 즐거움을
외면하고 무엇을 즐기겠다는 말인가.
요즘 자식 하나만 낳는 풍조 때문에 많은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 그 하나로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양성의 조화를 깰 정도로 왜곡된다는 점이다. 뿌리깊은
남아선호의 풍조 탓으로 하나를 낳되 너도나도 남자 아이 하나를 낳겠다고
나선다. 그 결과는 벌써 나타나기 시작했다. 통계에 따르면 남자 아이에 비해
여자 아이들이 그 수가 턱없이 적다고 한다. 이런 현실을 두고 사람들은
농담삼아 앞으로 여자가 없어서 장가 못 갈 남자들 많을 거라고 말한다.
심지어는 전쟁이 터져 남자들이 많이 죽어야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거라고도 한다.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전쟁을 해서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니, 이 무슨 망발인가.
단순히 농담으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상황은 그렇게 심각해질 수 있다. 지구상에서 온갖 일을 저질러 온
인간은 이제 나성과 여성의 균형마저도 허물어 버리려 하고 있다. 낙태와 같은
반인륜적인 수단을 동원하면서까지 그러니, 여기서 무자식이 상팔자니 아니니
하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닌 듯싶다.
자식이 하나밖에 없는 집안에서 그 자식은 어떻게 자랄까. 형제라는 말은
사전에 있지만 아이는 경험해 보지 못한다. 형제를 통해 배울 것도 배우지
못하고 나눌 우애도 나누지 못한다. 오로지 저 하나만을 생각하게 된다. 인류가
가정에서 배우고 느낄 수 있는 상당 부분을 모르고 살게 된다.
그런 자식은 어쩌면 열심히 일을 하면서 자기 세계를 개척해 나가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부모의 재산을 곧 자기 재산으로 여길 터이나, 땀흘려 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부모는 오히려 그것을 반기기도
할 것이다. 우리 재산이 있으니 너 만은 고생하면서 세상 살지 않게 해주마,
하면서 말이다. 자식을 망치는 지름길이 바로 그것이다.
자식이 하나뿐이니 부모가 그 자식에게 거는 기대 또한 그 만큼 클 것이다.
물론 모든 부모는 자식이 아무리 많더라도 모든 자식에게 기대를 크게 갖게
마련이다. 그러나 키우다 보면 각자의 개성과 특질을 알게 되고, 그에 따라
교육을 시키고 기대를 조절하게 된다. 그러나 자식을 하나만 둔 부모는 제
자식이 무엇이건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식의 재능과 소질을
따져보기에 앞서 최고가 아니면 견디지 못하게 된다. 세상에는 다양한 일이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일꾼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뿐이 제
자식만 돋보이는 일을 해야 하고,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고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직업의 귀천을 따지는 잘못된 풍조는 더욱 드세질 것이고, 참다운 경쟁의
의미는 사라진 채 오로지 남을 딛고 서야 하는 맹목적인 경쟁 풍토만 남아
사람들을 비인간적인 전쟁터로 내몰 것이다. 단순한 노파심리 아니라 충분히
예견될 수 있는 상황이다. 인류 공동체의 이상과 희망은 그 뿌리에서부터 흔들릴
수가 있는 것이다.
온갖 문제점들이 예견됨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행복의 장애물 정도로 여기는
이상한 풍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이런 세상이 올 것이다. 무자식이 상팔자가
아니라 자식 많은 사람이 상팔자라고 한탄하는 세상 말이다. 자식이 없거나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의 한탄은 지금도 들을 수 있다.
행복은 시대의 그릇된 풍조나 편협한 개인주의적인 태도에서 찾을 일이 아니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쌓아온 인류의 자산 속에서 보다 긴 안목을 가지고
찾아야 한다. 그릇된 풍조와 태도에 경박하게 일단 몸을 맡기면 그 늪에서 다시
헤어나기가 어렵다. 다산성의 어머니가 되는 것을 짐승의 짓이라고 말하는 젊은
여자들은 이미 그 늪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늪에 빠져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경박하게 자기 주장이랍시고 내세우는 것이다.
젊은이들이여, 자식을 많이 낳아 길러 보라. 그러면 사람으로 사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식 넷을 낳아 기르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
아무런 사심없이 권유하는 말이니 그저 웃어 넘기지는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무자식은 쓸쓸한 인생의 담보물이 될지언정 결코 상팔자가 될 수 없다.

마당 다섯 / 세계의 꽃으로 필 우리

밀알이 썩어 새싹이 나듯
한풀이 시대가 끝나면,
그때 비로소 사랑과 화합의 시대가 열린다.
밀알이 썩지 않으면 새싹은 돋아나지 않는다.
한 역시 풀지 않으면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한 풀이의 과정을 겪고 있다.
깨어나서 빛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다.
세계의 꽃으로 피기 위해
개화의 고통을 견디고 있다.

강남 유자가 강북 가면 탱자 된다

중국에 오자서라는 유명한 재상이 있었다. 그가 어느날 사신의 몸으로 어느
나라에 갔다. 그 나라에서도 오자서의 명성은 자자했다. 이에 그 나라의 몇몇
사람들이 자부심 높은 오자의 콧대를 꺾으려고 술수를 부렸다. 함정을 만들어
오자서의 부하를 도둑으로 만든 것이다. 그 부하는 꼼짝없이 도둑의 누명을
뒤집어썼다. 그렇게 해 놓고 그들은 오자서를 노골적으로 비꼬았다. 부하가 그
모양이니 오자서라고 다를 게 있겠느냐는 식이었다.
그러자 오자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강남 유자가 강북 가면 탱자가
된다. 이치가 그와 같다. 내 부하는 본래 선량한 사람이었는데, 도둑이 많은
당신들 나라에 와서 도둑이 된 것이다.
오자서는 뛰어난 임기응변으로 오히려 술수를 부린 사람들의 콧대를 꺾어 놨다.
임기응변도 뛰어난 것이었지만 오자서는 중요한 지적을 했다. 강남에서 유자였던
것이 강북에 가면 탱자가 될 수 있음을 말했다. 사람은 그렇게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존재다. 환경에 따라서 유자였던 사람이 탱자가 될 수 있고, 탱자였던
사람이 유자가 될 수 있다.
맹자 어머니가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의 이사를 한 것은 지혜가 아닐 수 없다.
맹자가 아니더라도 아이들이 만약 묘지 근처에 산다면 무덤 파는 인부들의 흉내를
많이 낼 것이고, 시장 부근에 산다면 장사꾼 흉내를 자주 낼 것이고, 서당 인근에
산다면 예법과 독서를 자연스럽게 몸에 익힐 것이다.
만약 자기 자식을 훌륭한 음악가로 만들고 싶은 부모가 있다면, 먼저 그 부모가
음악을 좋아하고 집안에 늘 음악이 흐르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환경
아래서 아이들은 자연스레 음악을 접하면서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키울 수 있다.
그런 것을 무시하고 자식을 음악가로 키우겠다는 태도는 나무에 올라가 고기를
잡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나무 하나를 심어도 토양과 기후 등 환경을 고려해 심는다. 그렇지 않으면 잘
자랄 수 없거나 아예 죽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새가 날아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자유롭게 날아가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새 자신에게 맞는 환경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사람도 그러한 세상 만물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환경은 주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사람은
만들어 가는 환경에 더욱 비중을 두면서 역사를 이루어 왔다. 그것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의 돋보이는 면이기는 하지만, 가장 큰 문제점이 되기도 한다.
주어진 환경과 만들어 가는 환경, 그 둘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조화를 이룰
때 가장 살기좋은 환경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때때로 그 조화를
깨버리곤 한다. 일단 조화가 깨지면 환경 그 자체가 일그러지고, 그 일그러진
환경 아래서 사람은 조화를 깬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한민족으로 태어난 사람은 지구상 어디를 가더라도 한민족이다. 한민족에게는
그 나름의 특성이 있다. 주어진 환경이 있다는 것이다. 고양이는 태어났으면
고양이의 개성대로 살아야 하고 개로 태어났으면 개의 개성대로 살아야 한다.
한민족으로 태어났으면 한민족의 개성을 살려 사는 것이 가장 잘사는 길이다.
우리 민족이 우리의 정신과 전통을 따르지 않고 다른 민족을 모방하는 것은
만들어 가는 환경이 주어진 환경을 왜곡시키는 경우가 된다. 그러면 두 사이의
조화가 깨져 온갖 병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고양이로 태어났으면서 개로
살겠다는 태도와 다름이 없다. 그 때 그 고양이가 온전한 고양이로 살 수
있겠는가. 물론 개로는 더더욱 살 수 없다.
우리 문화를 압도하며 외국 문화가 이 땅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은 잘못
만들어진 환경이 주어진 환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결과이다. 거기서 우리를
숱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가치관의 혼란과 그로 인한 도덕성의 상실 그리고 그
결과물들인 온갖 범죄와 타락과 무질서가 판을 친다.
또한 창조성의 결핍이 뒤따른다. 우리 문화를 제대로 살려야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음은 너무도 당연한 노릇이다. 우리 문화를 외면한 채 외국 문화만을
흠모하고 모방하면서 무슨 창조성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외국의 유능한 배우가 아무리 춘향의 연기를 잘한다 해도 우리 눈에는 어설프게
보일 수밖에 없듯 우리 배우가 아무리 햄릿의 연기를 잘한다 해도 영국 사람들
눈에는 마음에 차는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런 연기들이 평가를 받으려면 외국식
춘향 혹은 한국식 햄릿이라는 전제가 붙어야 한다. 한국식 햄릿이라는 식의
문화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에 내놓고 그 창조성을
인정받으려면 그것은 한국식 햄릿이나 외국식 춘향이 아니라 한국식 춘향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주어진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전제가 된다면 우리는 이제 만들어
가는 환경에 전력을 바쳐야 한다. 한국식 춘향이라는 것은 어떤 고정된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표현이 늘 가해져야 그것의 창조성은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우리의 전통 속에서도 잘못된 악습과 같은 것들은 하루 빨리 없애고, 그 장점을
키울 수 있는 쪽으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사농공상은 일이 다름을 뜻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귀천을 따지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헌데 아직도 그런
의식이 사람들 속에 남아 있다. 그런 의식은 그 자체가 나쁜 환경이 된다.
인간의 존엄성을 해체고 사회의 정상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외국에서 살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이
땅에서 살기 싫은 이유가 하나 있다고 했다.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사회에서의
인간적인 대접이 너무도 다름을 뼈저리게 느끼는데, 그것이 그렇게 싫다고 했다.
인간보다는 돈이 앞서는 사회라는 것이다. 그런 환경이라면 사람들은 너나없이
남보다 많은 돈을 벌려고 덤벼들 것이다. 순수한 인간적 가치보다는 돈의
가치에서 자기의 가치를 확인하려 할 것이다. 그러면서 환경이 그런데
어쩌겠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 환경이 그렇다고 말하면서, 거기에 자신을 맡겨 버리는
것으로 끝나면 그 사회는 희망이 없다.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돈의 가치보다는
순수한 인간 그 자체의 가치가 존중되는 환경으로 만들어야 한다. 물론 몇몇
사람들의 노력으로 될 일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나서서 노력해야 한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이렇게 부정적인 환경들이 많이 있다. 유자로
태어났어도 탱자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이런 좋지 않은 환경들을
바꾸지 않고 우리가 우수한 민족이 될 수 없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만들어 가는 환경 가운데 가장 먼저 내세워야 할 것이 교육 환경이 아닌가
한다. 지금의 교육 풍토는 인간 교육이라는 관점에서 봐도 통탄스러울 정도로
미진하고, 저마다 개성을 살려 주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봐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교육 개혁을 앞장세워 내세우지만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개혁이 부족해 교육 환경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면서, 모든 국민이 저마다 타고난 개성을 살리며 살 수 있도록 교육
현장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강남 유자가 강북 가면 탱자 된다. 이러니 유자가 되고 싶으면 강남에 가로
탱자가 되고 싶으면 강북에 가면 된다. 자, 이제 우리의 선택만 나았다.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누가 묻거든

우리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의 조상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면 우리는 조상 없는 천덕꾸러기일 뿐 그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우리의 정신이 무엇이지 알지 못하면 우리는 빈 껍데기일 뿐 그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우리의 전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우리는 길을 헤매는
부랑자일 뿐 이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우리의 문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우리는 남 흉내만 내는 원숭이일 뿐 그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면 우리는 겉으로 무엇을 내세워도 결국 아무 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피부가 하얀 사람, 검은 사람, 노란 사람, 붉은 사람 등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산다. 하얀 색이 검은 색보다 잘났다고 할 수
없고,  노란 색이 붉은 색보다 귀하다고 할 수 없다. 서로 자기 색깔대로
어울려서 사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하얀 색이 검은 색보다 아름답다고 잘난
체를 하는 무리들이 있다. 그런 무리들이 오만스럽게 자기와 다른 색깔을 지닌
무리들을 경멸하고 짓밟는 바람에 세상은 아귀다툼의 수라장으로 전락하곤 했다.
한심한 족속들이다.
그러나 더욱 한심한 족속들이 있다. 검은 색을 가지고 태어났으면서 하얀 색을
한없이 부러워하며 자기 색깔을 부끄러워하는 무리들이 있다. 노란 색을 가지고
태어났으면서 붉은 색을 끝없이 숭배하며 자기 색깔을 스스로 혐오하는 무리들이
있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족속들이다.
어느 날 이런 문제를 생각하다가 낙서처럼 쓴 시가 있다. 물론 시의 기본적인
형식을 갖춘 것도 아니고, 언어를 다듬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은 것이니 시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누가 묻거든"이란 제목 아래 적어 본
것이다. 염치없는 짓이겠지만 누군가 한번 읽어 보기를 기대해 본다.

누가 이 나라의 뿌리가 어디냐고 묻거든
수메르라 하시렵니까
가장 오래된 세계 문명의 발상지로 선전되는
바빌로니아의 그 지방을 가리키시렵니까
누가 이 나라의 발원이 어디냐고 묻거든
황하강 언저리라 하시렵니까
아니면
한강 어느 언저리라 하시렵니까
아니됩니다, 아니됩니다
누가 이 나라의 뿌리를 묻고
누가 이 나라의 발원을 묻거든
환국천산이라고
천제인 환인과 그 아들 환웅 또 아들 단군
그렇게 이어져 내려온
천산을 말하소서

누가 이 나라의 기원이 언제냐고 묻거든
서기를 먼저 떠올리시겠습니까
일천구백구십오 년 전의 그날을 말하시겠습니까
그날이 이 나라를 세운 첫해라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이 나라 역사가
일천구백구십오 년이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됩니다, 아니됩니다
정말로 그래서는 아니됩니다
누가 이 나라의 기원을 묻거든
단기를 주저없이 떠올리셔야 합니다
사천삼백이십팔 년 전의 그날을 말하셔야 합니다
그날이 이 나라를 세운 첫해라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 나라 역사가
사천삼백이십팔 년이 된다고 하셔야 합니다
결코
이천삼백삼십삼 년을 버리시면 아니됩니다

누가 이 나라의 조상이 누구냐고 묻거든
아브라함이라 하시렵니까
그분이 아니라면
워싱톤이라 하시렵니까
그분도 아니라면
징기스칸이라 하시렵니까
누가 이 나라의 시조가 누구냐고 묻거든
진시황이라 하시렵니까
그분이 아니라면
공자라 하시렵니까
그분도 아니라면
이성계라 하시렵니까
아니됩니다, 아니됩니다
정말로 그래서는 아니됩니다
단군이 이 나라의 시조라고
정중하게 말하십시오

애시당초
단군이 계셨기에
이 나라 이 민족은 생겨난 것입니다
애시당초
하늘을 연 날, 개천절이 있었기에
우리 겨레는 태어난 것입니다
애시당초 조상이 계셨기에
역사가 생기고
정신이 생기고
문화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면
그것을 잊으면
우리는 세상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 존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나
참다운 민족주의와 국수주의는 결코 형제가 아닙니다
국수주의를 내세워
민족주의를 병들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만 잘났다는 생각으로
우리를 병들게 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진정 그래야
우리를 세울 수 있습니다

누가 이 나라 종교가 뭐냐고 묻거든
불교라 하시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기독교라 하시겠습니까
그도 아니라면
유교라 하시겠습니까
무엇이라 대답한들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좋습니다, 좋습니다
진리에 임자 따로 없고
종교는 자유로운 것이니
좋습니다, 좋습니다
무엇이라 대답해도 좋습니다
그리스도도 좋고, 부처도 좋고
공자도 좋고, 신선도 좋고
그 모두가 근본은 사랑이요 목적은 구원이니
정말로 다 좋습니다, 진리와 사랑과 구원만 있다면 알입니다

낙서라고 할 수밖에 없는 시는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을 다 열거할
필요는 없다. 내가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였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그 다음에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절망 말고는 할 말도 기다릴 것도 없다.

모든 사물은 저마다 개성이 있다

서양 사람들에게도 인삼과 녹용은 보약이 될까. 사람에게 좋다는 것인데
머리카락이 노란 사람이라고 뭐 다를 게 있겠느냐고 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대부분의 서양 사람들에게 그것들은 보약은커녕 몸을 해치는
것이 될 수 있다. 도대체 왜 그럴까?
인삼과 녹용은 냉체질, 음체질의 사람에게 보약이 된다. 우리나라 사람의
70퍼센트 가량이 음체질이다. 그들에게는 보약이 된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70퍼센트 가량이 열체질, 양체질이다. 양체질의 사람들에겐 인삼과 녹용은 몸에
해를 끼치면 끼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람에게는 이렇게 각자의 체질이 있고,
그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보약이 되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해로움 물질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변비를 만병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육식만 하면 변비를 보이는
사람이 있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드문 일이지만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그런 증상을 보인다. 그런 사람이 육식을 즐기는 것은 몸을 망치는 짓이 된다.
자기 체질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으면 병을 얻는다.
음식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체질에 따라 몸에 해가 되기도 하고 득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지역에 따라 자기 몸에 좋은 음식이 각기 따로 있게 되었다.
체질이 다르고 음식이 다르다 보니, 그에 따라 문화적인 특질도 다르게 되었다.
각자의 개성이 생긴 것이다.
크게 나누어 보면 동양의 채식 민족이 보이는 특질과 서양의 육식 민족이
보이는 특질이 서로 다르다. 채식을 즐기는 동양이 고도의 정신 문화를 세웠다
하면, 육식을 즐기는 서양은 기계 문명을 세워 세계 역사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구분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대개 그렇다. 채식
위주냐 육식 위주냐 하는 식생활의 개성이 민족성을 달리 만들었기에 나온 결과라
할 수 있다.
채식을 주로 하는 민족은 물질보다 정신을 중시하면서 종합적, 전체적, 구심적,
거시적, 방어적, 소극적, 협동적, 조화적, 철학적, 이성적, 신비적, 예술적, 명분적,
정적, 여성적, 음성적 특질은 보이면서 알칼리성 체질을 갖는다. 반면에 육식을
주로 하는 민족은 정신보다 물질을 중시하면서 분석적, 개별적, 원심적, 미시적,
공격적, 적극적, 배타적, 정복적, 과학적, 감성적, 합리적, 기계적, 실용적, 동적,
남성적, 양성적 특질을 보이면서 산성 체질을 갖는다.
그래서 신토불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요즘 식생활을 보노라면
그러한 자기 개성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남이 개성을 흉내내는 이리 비일비재해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가령 우리에게는 김치를 비롯해 훌륭한 발효 음식들이 많다. 발효 음식의
우수성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다. 헌데 요즘 새로운 세대들은 김치와 같은 우리
음식을 멀리하고 햄버거니 피자니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한다.
콩은 콩이고 팥은 팥인데 콩이 팥이 되고 싶어, 아니면 팥이 콩이 되고 싶어
그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그럴 것이다. 자기 개성은 모르고 남의 개성이
부러워 그럴 것이다. 자기 체질이 어떤 것인 줄도 모르고 그저 좋다니 무조건
인삼과 녹용을 먹겠다는 태도일 것이다. 그래서 과연 콩이 팥이 되고 팥이 콩이
될까.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다. 그러한 어설픔 때문에 김치를 멀리하고
햄버거를 즐기는 사람들은 김치를 즐기는 우리 민족의 감정도 갖지 못하고
햄버거를 즐기는 민족의 강점도 물론 갖지 못한다.
우리의 개성을 알지 못하고 혹은 무시하고, 남의 개성을 흉내내고 혹은
흠모하는 빗나간 현상은 비단 식생활에서만 볼 수 있는 현실이 아니다.
우리 옷, 즉 한복에는 현대 사회에서 불편함 등의 단점도 있지만 그 장점도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우리 옷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려는 사람은 몇몇을 빼
놓고는 없다시피한 게 현실이다. 국가의 특별한 행사에서만이라도 우리 옷이
주는 정서와 정신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잃어버렸다.
우리의 한옥 역시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방한 방습 효과가 뛰어나고
부부의 금실을 배려하는 등 인간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다. 가옥에 관한
나름대로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장점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뛰어난 건축가라면 그것을 살리려고 노력해 봄직도 한데
그런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의 한옥에 담긴 알맹이마저 무시하면서, 그에
따라 거기에 담긴 우리의 정서와 정신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잃어버렸다.
우리의 식생활 또한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관혼상제의 의례를
지키면 요즘 사회의 혼란과 타락을 방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어느 통계를
보니 제사를 모시는 가정과 모시지 않는 가정을 범죄율을 놓고 비교해 보니
후자의 가정에서 범죄율이 높았다고 한다. 관례인 성인식을 하면 나이 스물이
넘어도 망나니 짓을 하는 성인 아닌 성인들은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성인식의
전통은 사라지고 발렌타인 데이니 뭐니 하는 서양식 축제만 들어와 판을 치니,
성인식으로 누릴 수 있는 우리의 장점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남의 나라
흉내내는 일에 바빠 우리의 미덕을 잃고 있다.
관혼상제를 비롯한 우리의 실생활의 이 전통이 주는 장점이 무시되면서, 그에
따라 거기에 담긴 우리의 정서와 정신을 서서히 잃어 가고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잃어버렸다.
물론 지금에 와서 양복은 우리 옷이 아니니 입어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없고,
양옥은 우리 집이 아니니 거기서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어떤 변화에도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우리의 개성과 전통을
사리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모든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문화를
여기서 저기로 흘러가고 저기서 여기로 흘러오는 것이다. 고립된 문화는 발전이
없다. 우리가 외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문화를 외국으로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받아들일 문화의 흐름이다.
문화의 흐름은 그러나 일방적일 때 문제가 된다. 모든 사물은 저마다 개성이
있는 것이다. 모든 민족도 저마다 개성이 있는 것이다. 자기 개성과 전통을
상실하면 문화의 흐름은 흐름이 아니라 침략이 되고, 침략을 당한 쪽은 심각한
병을 앓게 된다. 자기 몸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의 몸이 될 수도 없는 무서운 병
말이다. 우리가 전통 문화를 등한시해서 우리의 개성을 잃으면 우리는 우리도
아니고 남도 아닌 기형적인 존재가 된다. 오천 년의 역사를 입에 올릴 수도
없다. 그 역사를 입에 올릴 수 없다고 남의 나라 역사를 우리 것인 양 여길 수
있을까. 어불성설이다.
요즘 세계화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제대로 철학을 갖고
얘기하는 것이라면 아주 좋은 말이다. 사람은 그가 어느 나라 어는 민족에 속해
있건 궁극적으로는 인류평화를 삶의 지향점으로 두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도
세계화가 되어야 한다. 세계화라면 국제 무대가 전제된다. 국제 무대에 당당히
서서 정회원의 자격을 가지려면 자격증이 필요하다. 그 자격증은 다른 게
아니다. 자기 개성과 전통을 지닌 나라와 민족에게 주어지는 것이 자격증이다.
개성과 전통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국제 무대에서 다른 나라와 민족의 눈치나
살피는 족속밖에 되지 못한다. 그런 족속들이 회원 자격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우리 자격증을 가질 생각은 하지 않고, 남의 자격증을 빌리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게 솔직한 우리의 동양 철학을 말하라면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우리 자격증을 자질 생각은 하지 않고, 남의 자격증을
빌리려는 사람들이다. 문화인들 가운데 서양 문화의 언저리를 좋다고 맴돌면서
우리 문화를 보면 눈을 감아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멍청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그들이 우리 자격증 대신 남의 자격증을 훔쳐 보는 사람들이다.
어찌 지식인과 문화인만 그렇겠는가. 누구든 마찬가지다. 우리의 정신을 팔고
매춘녀처럼 남이 정신에 빠져 거들먹거리는 무리들, 우리의 체질을 내팽개치고
남의 체질에 기생하면서 뽐내는 무리들, 우리의 개성을 묵살하고 남의 개성으로
분칠을 해 쓴 가면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미는 무리들, 이 모든 이들이 그런
족속들이다.
콩이면 콩의 개성을 가져야 콩이 되고, 팥이면 팥의 개성을 가져야 팥이 된다.
우리의 개성과 전통을 깔보는 무리들은 너무도 당연한 이 이치를 외면한 채
어디를 헤매며 광인의 춤을 추고 있는가.

지구의 방랑자

방랑자와 떠돌이들에게는 현주소가 없다. 그저 잠시 머무는 곳이 임시 주소요,
발길을 옮기면 그 임시 주소마저 사라진다. 늘상 그런 신세니 누기 현주소를
물으면 내세울 것이 없다.
우리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무엇을 근거로 현주소를 말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먼저 문화를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 문화가 있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현주소를 떳떳하게 밝힐 수 있다. 김구 선생도 먼저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백범일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문화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남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얼마나 부자고, 얼마나 무기와 병력이 많은가를 따져보는
것보다는 우리의 문화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느냐를 살피는 것에서 우리의
현주소를 따져보는 것이 보다 유익하리라.
우리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거리에 나가보면 참으로 막막해진다. 일본 흉내를 내는 젊은 남녀들이 기이한
옷을 뽐내고 다닌다. 왜 그런 옷을 입었냐고 물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멋있게
보여서 입었다고 한다. 이 땅으로 다시 침투해 들어온 듯 일본식 술집과
음식점이 거리에 깔려 있다. 술집에서 일본 노래가 불려지고, 어린아이들은 일본
만화에 넋을 빼앗긴다. 일본이 밉다면서 일본 문화에 혼을 판다.
거리에 나가보면 참으로 막막해진다. 서양 흉내를 내는 젊은 남녀들이 기이한
잡지를 들고 다닌다. 왜 그런 잡지를 보냐고 물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의
유행을 모방하고 싶어서 본다고 한다. 이 땅으로 마침내 침투해 들어온 듯
영어로 된 간판이 거리를 도배하고 있다. 서양 음악이 무대를 독차지하고, 서양
학문이 상아탑의 꼭대기에 서서 호령하고, 서양 문화가 거리를 휩쓴다. 서양
사람들을 낯설어하면서도 서양 문화에 정신을 판다.
이런 꼴만 보면 정말 막막해진다. 우리의 현주소를 말하려니 너무 막막해
말문이 막힌다.
물론 거리에서 본 이 풍경만을 두고 우리의 현주소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래의 주역이 되는 많은 젊은이들의 모습이니 가슴은 더욱 답답해진다. 모방
문화는 아무리 잘나 봐야 이등밖에 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젊은이들은 그리로
가고 있다. 일본 멋을 부리고 서양 멋을 부리며 살려고 한다. 우리의 멋이
없어서일까. 아니다. 우리의 멋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간악한 일제의 침략으로, 다시 해방 후 밀려온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문화
침략으로 우리는 우리의 멋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마음만 먹으면 다시 살릴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 일에 게을렀다. 우리의 멋을 도대체 어떻게
잃어버렸단 말인가. 일제 시민지배의 발톱 아래서 우리는 우리를 잃기 시작했다.
일제는 우리의 장점을 모조리 깔아뭉갰고, 그런 일제에 아부하면서 붙어먹은
무리들이 맞장구를 쳤다.
단군 신화가 어떻게 깔아뭉개졌는지만을 봐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장구한 역사를 시기한 일본 사학자와 그에 맞장구를 친 이 땅의 쓸개 빠진 자들이
식민사관으로 단군 신화를 엄연한 역사에서 단순한 신화로 끌어내렸다.
끌어내리고 나서 그것은 신화일 뿐이니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목적은 하나,
우리의 유구한 역사를 부인하고 싶어서였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의
자부심을 짓밟으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들의 교활한 수작 가운데 하나를 보자. 단군 신화를 보면 천제인 환인의
아들 환웅이 지상으로 내려와 웅녀와 결혼해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웅녀는
곰이었다가 오랜 인내 끝에 사람이 된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시비를 건다. 어떻게 곰이 사람이 되고, 더구나 한 나라의 시조인 아들까지 낳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시비를 걸면서 단군 신화를 정사가 아닌 야사로
몰아붙인다. 그렇지 않으면 곰의 새끼들이라고 비아냥거린다.
악의적인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너무도 한심하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면
모르되 미국과 같이 역사가 짧은 나라에서는 건국 신화라는 게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는 대개 건국 신화를 갖고 있다. 신화의
형식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역사를 말한다.
단군 신화는 우리의 건국 신화다. 신화에서는 곰을 상징물로 내세울 수 있다.
어디 곰만이 그렇겠는가. 신화라는 것이 대개 그렇다. 곰이 조상이냐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유치한 짓이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설화를 보자. 박혁거세는 어느 우물에서 발견된
알에서 깨어난 인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상징을 위해 차용한 말 그대로의
설화다. 알에서 어떻게 인간이 태어날 수 있냐고 유치하게 따질 일이 아니다.
그 설화는 그러나 역사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박혁거세가 신라를 세운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신라만이 아니다. 세계의 건국 신화들은 거개가 상징적인
의미의 신화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건국 신화인 단군 신화도 마찬가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다. 무턱대고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위서를 인용한
삼국유사에 엄연히 나와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식민사관을 지닌 무리들은
삼국유사를 믿지 않는다. 그러면서 다른 증거를 더 내세우라고 염치없이
요구한다. 그런 무리들이 다른 증거를 내세우라고 큰소리를 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의 역사를 기록한 서사들이 외국의 침략을 받아 수없이 불타 없어졌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침략을 받아 고구려의 사서들이 불태워졌고,
나당연합군에게 함락된 백제의 사서들이 불태워 졌고, 후백제 견훤의 침략을 받아
후백제로 옮겨진 신라의 서적들이 왕건의 침략을 받았을 때 불태워졌고, 고려의
사서들이 금나라의 침략으로 불태워졌고, 조선의 사서들이 일본의 침략을 받아
불태워졌다. 일제시대에 우리의 오랜 역사를 기록한 책들이 불태워졌음은
물론이다.
이런 현실이고 보니 사서들이 제대로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래도 삼국유사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고 중국의 사서에도 당당하게 단군신화의 실체라 할 고조선의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의에 찬 일본 학자들과,
어리석게도 그 식민사관에 물든 이 나라의 역사학자라는 무리들이 단군 신화를
역사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식민사관을 버리지 못하는 무리들은 매국노와
다름없는 자들이다.
우리의 건국 신화마저 역사가 아니라고 모독하고 깔보는 식민사관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우리의 장점은 눈에 띄는 것마다 없애버리고, 그 자리를 온갖
단점들로 채워버렸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이 땅의 혈맥이라 할 곳에
일본놈들은 쇠막대기를 박아 이 땅의 기를 끊어놓으려고까지 했다.
이런 일제 치하에서 삼십육 년을 보내고, 해방 후에는 또 친일파들을
처단하기는커녕 그들을 지배 계층에 두어왔으니, 안타깝게도 왜곡된 우리의
자화상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바로 잡히지 못했다. 악의에 찬 왜곡으로 일그러진
우리의 자화상을 보고, 사람들은 그것이 우리의 참모습인 양 잘못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멋스럽고 위대한 것이지 알지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 파고든 것이 외국의 문화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우리의
올바른 자화상을 찾기보다는 쉽사리 외국의 문화에 빠져든다. 거기에 빠져서
그것이 바로 자기 문화요 정신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현주소를 물으면 결코 일본의 그 무엇을, 서양의 그 어떤
것을 내세우지는 못한다. 그저 모방과 흉내만 내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것에서
현주소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우리 문화에서 현주소를 찾을 능력도
없다. 그러니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다.
현주소가 없으면 떠돌이요 방랑자일 뿐이라 했다. 가장 소중한 문화의
현주소를 갖고 있지 못하면 우리는 친구의 방랑자로 헤맬 뿐이다. 자기 문화의
현주소를 갖고 있는 나라들을 기웃거리며 아무런 기약 없이 떠도는 방랑자,
우리가 그렇게 되어도 좋겠는가. 역사와 문화와 전통은 우리가 스스로 인정할 때
발생하는 것이지, 부정해 버리면 몇천 년이 흘러도 문화와 전통은 우리에게 없다.

자만심과 열등 콤플렉스

천하에 우스운 꼴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자만심에 빠져 거들먹거리는 꼴이요,
다른 하나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고개를 푹 숙이는 꼴이다. 천하에 한심한 꼴이
두 가지가 있다. 역시 하나는 자만심으로 똘똘 뭉쳐 헛기침하는 꼴이요, 다른
하나는 열등감에 절어 한숨을 쉬는 꼴이다.
자만심과 열등감이 우습고 한심스러운 것은 그것들이 모두 자기의 본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허상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허상의 얼굴을 세상에 내밀고
거드름을 피우거나 의기소침해 하니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다. 세상
사람들은 그 허상을 이미 알고 있는 데 그 앞에서 허상인 줄도 모르고 얼굴을
내미니 어찌 우습고 한심하지 않을 것인가. 그런 모습은 개개의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와 민족을 단위로 해서 봐도 그런 우습고
한심한 꼴을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어떤
허상을 끌어안고 있을까.
먼저 자만심을 보자. 우리 민족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만심의 허상을
내밀며 살아왔을까. 아니다. 자만심의 흔적을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어느
민족처럼 자기들이 유일하게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며 선민 의식에
사로잡힌 적도 없고, 자만심을 주체하지 못해 남의 나라를 침략한 적도 없다.
오랑캐라 하여 이웃 민족들을 경시하기는 했다. 그러나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
모든 이웃을 이유없이 경시한 것은 아니다. 자기들 이득을 위해 이 땅에 침략을
일삼고, 평가의 잣대가 되는 문화적 수준이 낮았기에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 남을
괴롭히기 좋아하는 못되고 질이 낮은 이웃을 나무라고 경시하는 것은 자만심의
발로가 아니라 정당한 평가요, 필요한 자기 주장이다.
우리 민족은 타민족을 침략해 괴롭힌 적이 거의 없다. 늘상 침략을 받아왔고,
그것을 물리쳤을 뿐이다. 자만심의 허상에 사로잡힌 민족들은 거개가 침략을
일삼는다. 침략을 통해서 자만심의 허상을 만족시키고 이득을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세계사는 자만심에 사로잡힌 민족들의 침략사라 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이 유발시킨 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타민족을 침략한 그런
역사가 거의 없다.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컸지만 그것이 질 낮은 자만심으로 떨어지지 않았고,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릴 만큼 예의를 숭상했지만 그것이 우리의 예의를 아는
민족이라는 자만심으로 전락하지도 않았다. 자만심에 빠져 자기 과시욕에
사로잡히거나 남을 경시하고 괴롭히기는커녕,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겠다는
홍익인간 사상으로 스스로를 담금질해 왔을 뿐이다. 자만심의 늪에 빠지지 않는
이런 민족은 그리 흔한 게 아니다. 우리가 자부심을 갖고 자랑할 수 있는 민족의
장점이다.
그러면 열등감은 어떨까.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결코 열등감으로
위축되는 그런 민족은 아니었다. 사대라는 것은 있었다. 주로 중국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는데, 강한 세력을 가진 나라를 섬기면서 나라의 안녕을 구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힘이 지배하던 시대에 그것을 꼭 열등감의 표현을 볼 수는
없다.
사대는 결코 올바른 태도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중국에서 학문을 받아들인 후
우리 조선들은 그들보다 훨씬 높은 경지의 학문을 이루기도 했고, 예술을
받아들인 후 그들보다 훌륭한 예술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대라면 결코 그런 일을 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조공을 바치기는 했어도
정신을 팔아 바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보다 훨씬 높은 경지의 정신과
문화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열등감을 가진 민족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자부심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 밖에 달리 우리가 열등감에 빠진 민족이라는 흔적을 찾아 볼 수는 없다.
침략을 받으면 분연히 싸워 스스로를 지켰고, 문화적인 자부심으로 일본과 같은
나라에 수준 높은 문화를 전파해 주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근대에 들어와서 해괴한 소리들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엽전들이 그렇지 뭐' 하거나 '조선 사람이 별 수 있어'라 하며
스스로를 비하하는 이들이 적지않아졌다. 일본 식민지배의 영향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어떻게 하든 우리 민족을 비하하려 했다.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까지 하며 그랬다.
안타까운 것은 그 간교한 일본의 책략에 부화뇌동하는 부끄러운 존재들이
생겨나 자기 비하의 늪에 빠진 것이다. 그 이후로 비뚤어진 정신 구조가 좀체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요즘도 무슨 일만 있으면 '조선 사람은 그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하거나 '우리는 아직 멀었다' 라고 자조를 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일제시대에 악의적으로 잘못 뿌려진 씨앗이 자라 스스로를 비하하는 열등
콤플렉스에 빠진 것이다. 우습고 한심스럽다기보다는 통탄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아직 멀었어' 라는 말이 끝없이 구도의 길을 걷는 사람이 하는 자기
확인이라면 더없이 좋은 말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앞날을 위해서 반성을
하고 새로운 기운을 얻자는 그런 뜻이 아니다. 열등 콤플렉스에 빠져 자기
비하를 하는 무리들이 내뱉는 자조일 뿐이기에 통탄스러운 것이다.
열등 콤플렉스에 빠져있는 자들의 자조는 비생산적인 푸념일 뿐이다. 물론
개인이건 민족이건 엄격한 자기 비판과 반성을 하지 않으면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비판과 반성이 없는 것은 자만심의 발로로 앞날의 희망을 차단하는
것이다. 비생산적인 자조 역시 그것과 마찬가지로 희망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위의 장점은 보지 못하고 단점만을 긁어 모아 입을 놀린다.
장점은 보이지 않고 단점만 가득찬 허상, 그 왜곡된 자화상을 끌어안고 있으면서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무슨 꿈을 꾸고 어떤 희망을 갖고 살겠다는
말인가. 침략한 자들의 왜곡된 세뇌 교육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우리 민족이 지난날 외부에 어떻게 보였는지를 보자. 복고 취미나 좋은 면만을
보려는 또 다른 왜곡으로 치부하지 말자. 우리의 왜곡 된 자화상에 낀 때를
벗겨내자는 것이다. 중국의 서적들에 기록된 우리 민족의 모습이었다.

군자의 나라가 동쪽에 있는데,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다투는 일이
없다.--"산해경"

동방은 어진 나라라 군자들이 살고 있는데 예의가 바르고 서로 사양하기를
좋아한다.--"산해경"

그들은 서로 칭찬하기를 좋아하며 헐뜯지 않고 이웃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죽을 데라도 뛰어든다.--"동방삭신이경"

체격이 크고 용감하며 남의 것을 빼앗는 일이 없으며 밤낮없이 모여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후한서"

그들은 인간성이 곧고 용감하다--"후한서"

그들은 성품이 착하고 염치를 안다.--"삼국지"

그들은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고 집도 문을 잠그지 않으며 부인들은 정조가
강하여 음란하지 않다.--"한서"

계속 열거하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은 말들이다. 단순히 좋은 말 들었으니
기분이 좋다는 것이 아니다. 단점도 없지 않지만 우리는 이런 숱한 장점을 지닌
민족이었다는 것을 확인해 보는데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그 장점의
대부분은 인간성이 곧고 바르고 좋다는 것이다. 그 장점의 대부분은 인간성이
곧고 바르고 좋다는 것이다. 다른 그 무엇보다 인간 그 자체가 장점이다. 세상
어디에 있어도 찬사를 받을 만한 민족이 아닌가.
일제의 왜곡과 그 이후로 겪은 급속한 현대화 과정에서 생긴 혼란으로 잃어버린
우리의 자화상이 그런 말들 속에 숨어 있다. 그런데 왜, 무엇을 위해 왜곡된
자화상만을 보려 하는 것인가.
남이 우리를 어떻게 봤냐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다. 남들의 칭찬이 아니어도
우리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많은 문화 유산을 가지고 있다. 다른 것 다 생략하고
한글 하나만 보자.
한문을 쓰면서도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소리 글자인 한글을 만들어낸
민족이다.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한글의 우수성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나의 능력 밖의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완벽하고 다양한 표현 능력은 국어사전만 펼쳐 봐도 알 수 있다.
파랗다고 하는 표현을 보면 파랗다만 있는 게 아니다. 파랗다, 퍼렇다, 푸르다,
푸르께하다, 푸르데데하다, 푸르무레하다, 푸르스름하다, 푸르죽죽하다,
푸르퉁퉁하다.... 이렇게 찾다 보니 내 눈에는 스물 일곱 개가 들어왔다.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소리 글자이면서 세계의 공용어라는 영어가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다양한 표현력을 한글은 가지고 있다. 완벽하고 다양한 표현력은 단순히
효용성이 뛰어나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다양한 표현 속에서 정서와 느낌도
섬세하게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보다 높은 수준의 문화 창조로 이어짐을 뜻한다.
언어는 문화 창조의 주역이기 때문이다.
열등 콤플렉스에 빠져서 스스로의 장점을 키울 생각은 않고, 단점에만 짓눌려
있으면 희망이 없다. 하기야 우리가 그런 상태에 빠져 있기를 바라는 이들이
있기는 하다. 열등 콤플렉스에 넋을 놓고 있는 틈을 타고 들어와 자기 나라의
문화와 경에를 심어놓고 이득을 보려는 외국 사람들이다.
바야흐로 세계는 지금 경제 전쟁을 넘어서 문화 전쟁을 치르고 있다. 어떤
문화가 주도권을 잡고 세계를 이끌어갈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산업은 세계적으로 평균화되어 가고 있다. 이제는 보리개떡이라도
우리 것을 가지고 나가야 국제 무대에서 한 마디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자만심에 빠지는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열등 콤플렉스에 젖어 있는 다는
것은 창과 방패를 버리고 전쟁터로 나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런데도 계속 자기 비하의 태도를 고집하겠는가. 아니면 우리의 장점을
살려서 문화 전쟁의 승자가 되어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겠는가. 선택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몫이다.

미친놈, 호로새끼, 개잡년

우리 민족에게 치떨리는 통을 몰고온 부류들이 있으니, 미친놈과 호로새끼와
개잡년이 바로 그들이다. 민족의 심장을 도려내듯 금수강산을 반으로 찢어 피를
흘리게 한 이들이 미친놈, 호로새끼, 개잡년들이다. 그렇게 반으로 찢어 놓고도,
그 안에서 숱한 사람들이 울부짖게 만들어 놓고도 희희낙락하는 것들이 미친놈,
호로새끼, 개잡년들이다.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들인가. 미친놈은 미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미친 것들을 가리키고, 호로새끼는 러시아라면 간 빼고 쓸개 빼고 좋아하는
호로 자식들을 가리키고, 개잡년은 주체성 없이 이것 저것 뒤섞인 채 문화를
혼란에 빠뜨린 개잡년을 이른다.
민족의 정기를 끊어놓은 일제, 그 악랄한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이 되었다고
좋아했지만 우리는 아직까지도 진정한 해방을 맞지 못했다. 식민지의 고통은 또
다른 굴레로 이어졌으니, 남한에서 주로 설쳐댄 미친놈과 북한에서 주로 설쳐댄
호로새끼들 때문에 우리는 분단의 고통을 짊어지게 되었다.
38선으로 갈라선 나라 일을 생각하니 하늘 보기 민망하고, 민족 일을 생각하니
조상 뵙기 부끄럽고, 세상 일을 생각하니 살아 있기 한심하다. 한숨 쉬고 하늘
보니 떠 있는 저 구름도 남북 하늘 왕래하고, 한숨 쉬고 강산 보니 오는 바람
가는 물도 제 길 따라 오고가고, 한숨 쉬고 쳐다보니 날짐승 들짐승도 서로 쫓아
즐거워하건만, 다시 한숨 쉬고 돌아서서 우리 민족 살펴보니 그 모습 기가 막힌다.
저기 있건만 우리 하늘 날지 못하고, 저기 있건만 우리 땅 다니지 못하고, 저기
있건만 우리집 가지 못하고, 저기 있건만 우리 식구 만나지 못한다. 우리가
허수아비인가, 장승인가. 눈 떠 있고 발 달려 있어도 오도가도 못하니 애달프고
원통하다. 우리 민족 성한 몸이 어찌하여 이토록 모진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남의 하늘은 잘도 날으면서 어찌하여 우리 하늘은 날아갈 수 없으며, 남의 땅은
잘도 다니면서 어찌하여 우리 땅은 오도가도 못하며, 남의 집은 잘도 가 보면서
어찌하여 우리집은 가 보지 못하는가. 슬프기가 한이 없고 원통하기 그지없다.
우리 민족 7천만은 죽음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뜬 구름만 못한 운명,
짐승만도 못한 인생, 어찌 가련치 않으리요.
우리 동포 형제들아! 이 아픔, 이 슬픔, 이 원통, 이 분함을 풀어 버리고
없애려면 남의 부귀 믿지 말고, 남의 권세 두려워 말고, 남의 세력 의지 말고,
남의 위엄에 굴복 말고, 민족 정신 서로 찾고, 민족 힘을 서로 모아 우리 하늘, 우리
땅, 우리 조국, 우리 역사, 우리 함께 찾게 되면 어느 누가 멸시하랴. 그런
후라면 우리 어찌 성공하지 못하랴.
분단 50년 잘못으로 우리의 오천 년 역사를 버릴 수는 없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우리 민족 합심하면 그날부터 대운 얻어 세계 제일 부강국이 될 것이니,
어찌 미국을 믿으며 러시아를 두려워하며 일본을 친애하며 중국을 겁내리요.
우리는 민족 정신을 일깨워 통일 독립을 해야 하는 최대의 난제를 안고 있는
민족이요, 금세기 어느 나라에도 비할 수 없는 비운이 민족이다. 남과 북이
분단되어 남의 사상과 남의 말에만 귀를 기울여 음흉한 계략으로 공포만을
조성하고, 남의 이론으로 식민지화 하였으니 나라도 방향을 잃고 민초들도 중심을
잃어 모두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 땅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며 민초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외세를 등에 업은 권력 상인과  권력을 등에 업은 경제 상인 등이 비리를 조작하고
공명을 사칭하니 민초들도 현혹되어 권력 투기, 황금 투기, 인생 투기에 빠져
범죄와 실상이 만연하는 세상이 되었다. 세상이 그리 변하자 어른이나 아이나
못할 짓이 하나 없게 되었다.
미친놈과 호로새끼가 갈라놓은 땅에 개잡년까지 나서서 혼란과 타락은 더욱
심각해졌다. 서양의 과학기계 문명을 받아들이겠다면 그것만 받아들이면 될
터인데 음란외설, 폭력, 사치, 무례방탕의 풍조까지 받아들여 우리의 전통 사상과
문화를 부정하고 매도해 왔다. 어찌하여 외국이 쓰다가 버린 쓰레기 문화까지
수입하여 나라를 오염시키고 민족 혼을 짓밟아, 한없이 뻗어갈 국운을 패망으로
몰아가는가. 외국에 넋을 판 개잡년들은 도대체 누구를 조상으로 알고 있는가.
오늘날 토일 독립과 문예 부흥을 남의 것에만 의존하고, 오천 년 우리의 가치를
무시하고, 권력에 도취되고 당파에 치우치고 황금에 병들어서, 국가와 민족은
이데올로기의 제물이 되어 버렸다. 오래 풍조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진정 남의
것에 빌붙어서 살겠다는 말인가.
갑오경장 후로 외국 문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그 필요성을 오늘날에 의심하고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능사일 수
있겠는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우리 것으로 만드느냐가 문제였다. 그런데
그만 우리는 맥을 놓고 말았다.
지금의 세계 기류는 서서히 자기 조국, 자기 민족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국제
질서가 재편성되고 있다. 더 이상 남의 사상과 남의 문화로 방황할 때가 아니다.
각자의 개성과 특성을 찾아야 할 때인 것이다.
인류의 공통된 과제는 평화에 있다. 진정한 평화는 각국이 독립되어 제자리를
지킬 때, 그 독립을 바탕으로 성숙된 하나의 지구촌이 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과연 독립하여 우리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가. 아니다.
나라는 있으되 뿌리가 없고 국민은 있으되 민족이 없다. 혼을 잃고 전통을
잃었는데 어찌 민족이 있고 뿌리가 있다고 우길 수 있겠는가. 우리의 혼과 넋을
잃고 미친놈, 호로새끼, 개잡년들이 설쳐대는 세상이 되었다. 껍데기는 민족을
닮았으되 알맹이는 외국 물에 변질되어 그 형체조차 확인해 보기 어렵게 되었다.
베트남의 영웅 호치민은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를 베개처럼 늘 가까이 두고 그
가르침을 배웠다고 한다. 꼭 목민심서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외국의 지도자까지 나서서 배우고 싶은 그러한 문화적 정신적 자산이 풍부하다.
주체성을 갖고 우리 자신을 보았다면 현대사의 격랑을 지혜롭게 헤쳐나가면서
우리를 바로 세울 가치를 스스로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럴 힘을 너끈히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미친놈, 호로새끼, 개잡년들은 주체성을 잃고 외국의 갈보가 되어 민족을
고통의 수렁 속으로 빠뜨려버렸다. 갈보처럼 구는 것들을 기회만 노리던 외세가
그대로 두겠는가.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단맛이란 단맛은 다 짜내려고 이빨을
드러냈다.
그래도 미친놈, 호로새끼, 개잡년들은 좋다고 그들을 반겼다. 갈보짓을 하면
얻는 게 있기 때문이다. 외세를 등에 업고 온갖 권세와 부를 누리고, 쓰레기까지
포함된 외국 문화를 등에 업은 채 온갖 교태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그러면서
쌍수를 들고 그들을 반겼다. 친일파와 다름없는 매국노들이다. 친일파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살 듯 미친놈, 호로새끼, 개잡년들은 갈라진 땅 위에서 여전히
호사를 누리고 있다. 해괴한 춤을 추며 이 땅을 자기들의 춤판으로 만들고 있다.
절망이다. 그 꼴만 보고 있으면 정말 절망이다. 그러나 절망만은 아니다.
미친놈과 호로새끼와 개잡년이 추는 춤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기운이 일고 있다. 우리의 주체성을 찾고,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찾아야 한다는
소리가 일고 있다. 그 소리가 소리에 머물지 않고 결실을 맺기 시작하면, 거기에
절망을 넘어선 희망이 다가온다.

갓 쓴 시위대

1965년 단오 때의 일이다. 당시 내 나이 열두 살이었다. 나는 선배와
어른들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다. 구경삼아 간 나들이가 아니었다. 세상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았다. 모두 한복을 입은 갱정유도교 교인들인 우리는 정부에
할 말이 있었다. 오백 명 가량 되는 인원이었는데, 모두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었다. 단순히 할 말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결연히 요구할 것이 있었다.
우리의 요구는 민족의 존망이 달린 문제였다. 크게 네 가지를 요구하며 우리는
시작했다.

하나, 미국과 소련의 꼬임에서 벗어나고 남과 북의 백성이 화합해야 산다.
하나, 이데올로기로는 백 년이 흘러가도 통일이 되지 않는다. 민족 도의를 세워
통일을 이루고 진정한 독립을 해야 한다.
하나, 충효가 나라의 간성이 되어야 세계 평화가 온다. 원자와 수소가 간성이
되면 세상은 망한다.
하나, 서양 문화를 선별하고 전통 미풍을 되살려야 한다
우리가 먼저 미국과 소련의 꼬임에서 벗어나라고 요구한 것은 민족주체성을
바로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두 강대국이 남과
북으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만들어 놓고 자기들 무기를 팔아먹으려는 속셈을 갖고
있음을 우리는 간파하고 있었다. 강대국의 무기 장사에 우리 민족이 놀아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민족이 망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 아닌가. 무기 장사만이
목적이 아니라 두 강대국은 우리에게 분열을 강요하고, 민족 문화의 파괴를
부추기고, 민족 생존까지 위협하면서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려 했다. 그들의
구도에 말려들면 통일을 이룰 수 없기에 우리는 이데올로기 대신 민족적 도의를
통한 접근을 주장했다.
가치관도 지위가 높건 낮건 나라에 봉사와 희생을 바치는 충의 정신과 효의
정신이 강대국의 논리라 할 수 있는 인간 파괴의 무기보다 앞서야 한다고
주장했고, 덧붙여서 우리의 전통 미풍을 살려야 민족이 살 수 있음을 말했다.
특히 충을 강조한 것은 민초들의 태도만 말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위로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인사들이 제 이익만 좇을 게 아니라 봉사와 희생으로
나라에 충성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요구에 대한 반응은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뿐이었다. 갓 쓰고
한복 입은 우리들은 경찰의 연막탄과 곤봉 세례를 받았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정부는 우리를 빨갱이로
몬 것이다. 당시에 남한에서는 미국 것이라면 똥이라도 좋다고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미국을 멀리하라 하니, 정부는 우리의 본 뜻도 제대로 알기
전에 그 말만으로 용공이라는 칼을 빼 들었다.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며 비장 한
각오를 하고 올라온 우리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남대문 경찰서로 몰려가 백차를 뒤집어버리고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 곤봉을
휘두르고 연막탄을 쏘는 경찰에게 우리는 맨손으로 대항했다. 시위장은 졸지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백성으로서 민족의 살길을 전하려고 하는데, 빨갱이로 몰며
귀를 막는 정부 앞에서 순순히 물러설 수 없었다. 악이 받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과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상한 소문들이 돌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도술을 부린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당시 신문들은 우리의 시위를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신문 기사에
붙여진 제목들도 가지각색이었다. '갓 데모', '백일 난동', '청포 데모',
'앙가즈망'하는 말들이 붙어 있었다.
한복 입은 사람들이 그렇게 나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우리가 한복을 입는 것은 우리의 전통과 정신을 살려 살 길을 찾자는
것이지 현대로부터 도피하겠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살 길을 찾자는데
무자비한 탄압을 하니 어찌 참을 수 있단 말인가. 절대 왕권이 나라를 이끌던
왕조 시대라 하더라도 그냥 물러설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빨갱이로 몰린 데에는 오해도 있었다. 우리의 요구 사항은 한자로 적혀
있었는데, 한문을 제대로 모르는 경찰이 미국을 멀리하고 소련을 가까이 하자는
식으로 잘못 해석한 것이었다. 우리는 미국과 소련 모두 경계하자는 소리를
했는데, 그렇게 잘못 읽힌 것이다. 경찰은 계속 우리를 빨갱이로 의심하며 자금
출처를 조사하고, 우리의 글을 한자를 제대로 해독할 수 있는 장안의 유명
학자에게 보여 그 정확한 뜻을 알려 했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금 출처를 조사한 결과 외부 세력에 의해 조달된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소
팔고 논 팔아 마련된 자금임이 드러났고, 해독을 의뢰 받은 학자도 우리의 요구
내용이 순수한 민족 주체성의 발로임을 경찰에 가르쳐 주었다.
빨갱이 시위대가 아님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던 경찰은 우리를 임시
열차에 태워 남원으로 내려보냈다. 그리고는 그만이었다. 우리의 요구는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무시되고 있다. 지금의 현실도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미국과
소련의 양극 체제가 소련의 사회주의 붕괴로 무너졌지만, 강대국의 논리는 모양을
조금 바꾸어 여전히 우리 민족을 압박하고 있고, 민족적 가치 역시 왜곡되고
무시당하고 있다.
요즘 국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정상 회담이란 것의 실체가 무엇일까.
진정으로 인류 평화를 위해 정상 회담이란 것을 하고 있을까. 아니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정상 회담은 인류 평화를 내세우며 그것을 담보로 잡고
있지만, 실상은 장사 회담이라 할 수 있다. 장사 가운데서도 강대국의 군수
산업이 은밀하게 얘기되면서도 가장 중요한 거래 내용이 된다.
강대국에서 군수 산업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그 군수
산업이 불경기를 맞으면 그들 나라의 전체 경제가 흔들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그들은 온갖 술책과 교묘한 논리를 다 동원해 제 나라 무기를 다른 나라에
팔아먹으려 한다.
세계 곳곳에서 위기를 조성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전쟁을 노골적으로
부추기기도 하면서 자기들 이익을 좇기에 급급하다. 다른 나라에서 위기를
조성해 선거에도 이용해 먹고, 무기도 팔아먹으니 그들로서는 일거양득이 아닌가.
대부분의 나라들은 그들의 술수에 놀아난다.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
분단으로 동족이 대치하고 있으니 미국을 비롯한 무기 장사꾼들이 손쉽게 공략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세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정상 회담이 진정 인류 평화를 위해 열리는
것이라면 그들은 먼저 핵을 지상에서 없애려고 노력할 것이다. 무기를
대대적으로 감축하고 그 돈으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를 비롯해 기아에 허덕이는
인류에게 도움이 되도록 사용할 것이다. 말만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가 주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상 회담은 결코 그렇지 않다. 핵과 무기를 없애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회담이 아니다. 기아를 비롯해 인류의 온갖 고통을 몰아내기
위해 힘을 모으려는 모임이 아니다. 이미 핵을 가진 국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포기하기는커녕 그것으로 이득을 보려 한다. 그러니
다른 나라들도 핵 무기 개발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또한 무기 파는 것을
자국의 주요한 이익으로 삼는 강대국은 그것을 무역의 논리로만 따진다. 차
팔아먹는 것과 무기 팔아먹는 것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게 같은 것인가. 무기는 인류를 전쟁으로 몰아가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닌가.
세계란 것이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다. 군수 산업을 필두로 하는 대상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유엔에 대해서는 나는 썩 신뢰하지 않는다. 진정한
평화를 위한 세계 기구라고 믿을 수가 없다. 거기서도 강대국들, 거대한
장사꾼들의 논리가 지배적이다. 그들의 논리를 뒷받침하고 평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곳이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가 아닌가.
강대국의 술수에 말려드는 모든 국가가 이를 경계해야 하지만 특히 분단이 된
우리 민족은 이런 세계 현황을 냉철하게 파악해 우리의 살 길을 찾아야 한다.
강대국의 논리대로 짜여진 세계 구도가 인류 평화의 장애물이 되는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당장 민족을 죽이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해방 후에 이 땅의 민초들은 이러한 상황을 감지하고, 이에 대비해야 함을
다음과 같은 노래로 다짐했다.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 속지 말고
일본놈 일어선다
조선 사람 조심하자

단순하게 들리겠지만 그 안에는 핵심적인 의지가 깔려 있다. 민족 주체성을
가져야 우리가 살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이 달라졌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민족주의를 이미 흘러간 사상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진정 우리
민족의 고통을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그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민족적인 가치를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고통을 치유하지 않고
어떻게 평화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민족이 주체가 되기 위해 대오각성을 하지 않으면 남과 북으로 갈라진 우리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강대국의 술수로 짜여진 세계 구도 속에서 우리
민족의 의사는 무시당하고, 엉뚱한 이해득실이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
명실상부하게 그렇게 된다면 우리 민족은 미래를 낙관해도 좋다. 방향만
그렇게 제대로 잡으면 저 앞에 평화가 기다리고 있는데, 여전히 민족의 살 길을
외면하는 세력들이 있다. 그들이 끝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갓을 쓰고 다시
시위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인간시대

다가올 세상은 인간시대다. 다가와야 할 세상 역시 인간시대다. 우리에게
그것 말고 내세울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시대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그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거기에는 기본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요건이
있다. 나는 그것을 인간시대의 4대 원칙이라 부른다.
4대 원칙은 인간 존중, 독립 정신, 노예 해방, 문화 균형, 그 네 가지를 가리킨다.
그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인간시대는 오지 않는다.
인간 존중은 사람을 믿고, 사람을 섬기고, 사람을 존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독립 정신은 스스로 서고, 스스로 행하고, 스스로 지키는 것이다.
노예 해방은 선과 종교의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 권력의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
물질의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문화적 균형은 철학과 과학의 균형, 물질과 정신의 균형이다.
인간시대가 되려면 특히 문화가 그 근본을 지켜야 한다. 우리 사회의 뼈대가
되는 각종 문화가 제 근본을 알고, 자기 위치로 돌아가지 않으면 사회는 늪에
빠져 안정을 이룰 수 없다. 발전을 기약할 수 없다. 행복을 보장할 수 없다.
문화가 자기 위치로 돌아가려면 그것을 창조하는 인간이 올바른 가치관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여덟 가지 주요한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그
문화의 근본은 이렇다.

철학의 근본은 진이요
과학의 근본은 지요
정치의 근본은 정이요
법률의 근본은 의요
경제의 근본은 부요
종교의 근본은 애요
예술의 근본은 미요
학문의 근본은 행이다

인간 사회를 치장하기 위해 문화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근본을 망각한
문화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참이 없는 철학은 입을 닫아라
슬기 없는 과학은 더 이상 실험하지 말라
바름 없는 정치는 자폭하라
옳음 없는 법률은 더 이상 잣대가 되지 말라
부유함 없는 경제는 망해 버려라
사랑 없는 종교는 지옥으로 가라
아름다움 없는 예술은 더 이상 분칠을 하지 말라
행함 없는 학문은 쓰레기장으로 가라

철학을 비롯한 여덟 가지 문화의 주체는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이다. 사람이 그
근본을 세울 주체다. 요즘 세상을 보노라면 자기 위치를 잃어버린 문화가
요란스럽게 떠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철학은 우습게 보고, 과학은 경시하고, 정치를 불신하고,
법률을 조롱하고, 경제를 비웃고, 종교를 의심하고, 예술을 천시하고, 학문을
가벼이 여기곤 한다. 거기서 더 나아가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지 않고, 독립
정신을 버리고, 스스로 노예가 되고, 문화의 균형을 잃어 안타깝게도 인간은
스스로를 자조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세계는 그래서 혼란에 빠져버렸다. 말세의 증후군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나서서 문화의 근본을 찾고 인간의 원칙을 찾아 인간시대를
선도한다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이 있겠나.

세계의 꽃으로 필 우리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코리아는 죽은 듯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은 죽은 것으로
알고 절망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선각자들은 코리아의 부활을 예견했다.
부활해서 세계를 밝히는 민족이 될 것임을 믿었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독립
운동가들의 신념이 그랬고, 탁월한 혜안을 가진 민족 종교인들의 예언이 그랬다.
동족만이 그런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 그는 참으로
탁월한 혜안으로 우리의 미래를 노래했다. 나는 그의 시 "동방의 등불"을 가끔
떠올린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하여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우리는 지금 깨어나고 있다. 아직 완전히 깨어나 동방의 등불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깨어나려고 몸부림을 하고 있다. 깨어나기 위해서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리는 요즘 한풀이의 과정을 겪고 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이 우리를 억눌러 한을 만들어 왔던가. 가난의 한,
약자의 한, 사랑의 한, 이별의 한, 천대받음의 한, 외국으로부터 받은 핍박의 한,
유교적 억압을 비롯한 온갖 지배 논리에 당한 한, 없는 자의 한.... 우리 가슴에
켜켜이 쌓인 것이 한이었다.
우리는 그 한을 풀고 있다. 요즘은 한풀이 세상이라 할 수 있다. 한이
쌓였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적으로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있기에 한이 쌓이는 것
아닌가. 우리는 그 욕망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한풀이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는 것이다. 뒤돌아보며 무엇을 원망하고 한탄하고 저주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한풀이는 다시는 한풀이를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밀알이 썩어 새싹이 나듯 한풀이 시대가 끝나면, 즉 인간적으로 살고 싶다는
욕망이 채워지면 그때 비로소 사랑과 화합의 시대가 열린다. 밀알이 썩지 않으면
새싹은 돋아나지 않는다. 한 역시 풀지 않으면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한풀이의 과정을 겪고 있다. 그러나 한만 풀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깨어나서 빛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다. 세계의 꽃으로 피기 위해
개화의 고통을 견디고 있다.
이미 새로운 시대, 새로운 문화는 열리고 있다. 지구상의 주도적 문화는
주기적으로 일정한 방향을 따라 이동하면서 꽃핀다. 음양오행을 말하지 않아도
당장 그 현실이 그러함을 알 수 있다.
인류 문화의 발상은 동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전되었고,  유럽에서 다시 아메리카로, 아메리카에서 다시 태평양을 건너 이
땅으로 오고 있다. 보다 세밀하게 말하면 이제 막 일본을 지나 이 땅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지구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아가지만 문화는 그렇게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법이다. 지구의 지난 역사와 작금의 현실을 보면 그것이 공연한 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태평양 시대가 열렸다는 말은 누가 멋대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냉철한 관찰의 결과일 뿐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는 지금 하루로 보면 아침이요, 일 년으로 보면 봄철에
해당된다. 다가오는 21세기는 우리나라가 세계를 선도해 이끌고 가는 시대가
된다. 그것을 의심할 것이 아니라, 이동해 온 문화의 주도권을 어떻게 제대로
이어받아 꽃으로 피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인류 문화를 동과 서로 나누면 동양은 정문화요, 서양은 동문화라 할 수 있다.
정문화는 정신 문화요, 동문화는 물질문화다. 태평양 시대가 열렸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대서양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뜻이다. 유럽적 르네상스 시대가 가고
아시아적 르네상스 시대가 피어난다는 말이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일어서고 싶은 게 상대성 원리요, 동과 정의
관계다. 동문화에 지쳐 있는 인류는 휴식할 수 있는 정문화를 찾고 있다. 달리
말하면 동문화의 물질로 편리를 얻은 세계는 정문화의 정신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은 편리를 가져다 주었지만 그것이 행복이 되지는 못한다.
행복은 정신 세계에서 얻는 것이다. 물질도 세계 인류에게 편리를 준 동문화는
그 나름의 사명을 이미 마쳤고, 이제 찾아야 할 것은 행복을 주는 정문화다.
우리가 만약 정문화를 바로 세우지 못해 인류에게 행복과 안정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요, 시대의 흐름에 위배되는 것이니, 우리는
살아 있는 생명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21세기의 사명을 부여받은 민족이다. 윤리와 도덕으로 세계인류의
질서를 바로잡을 의무가 있다. 이는 하늘의 뜻이요, 인류의 요망이 아니겠는가.
19세기를 제도 개혁 시기로, 20세기를 산업경쟁 시기로 본다면, 다가올 21세기는
땅에 떨어진 인간의 가치를 회복시키고 정신으로 행복을 누리는 인간시대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선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세기에 우리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 이유와 보람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성과물도 우연으로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새로운 세계의 주인공이 되어 우리가 그 맡은 바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뿌리, 우리의 주체, 우리의 정신을 제대로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대 문화를 다시 선별하고, 기본적인 인간의 가치부터 일깨워서,
양심으로 자제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독립성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물질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생활 풍토가 조성되어,
사회악은 사라지게 되고, 그동안 인간을 억압해 온 이데올로기의 굴레도 벗게
된다. 세상 문제는 인간에게 있으니, 역사와 문화의 질을 높이려면 먼저 인간의
질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가 먼저 달라지지 않고 어떻게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으로서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겠는가.
민족적 가치를 바로 정립하고 통일을 한시라도 빨리 앞당겨야 하는 이유가 우리
민족만 잘살자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넓게 봐서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가져오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인 것이다. 그것을 외면하면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 되기는커녕 버림받는 가련한 존재가 될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선택은 남에게 맡겨져 있지 않다. 바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구하면 얻게 되고 내버려두면 잃게 되는 경우라면 구하는 것이 얻는데
유익하다. 구하는 것이 나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구하는 방법이 있고,
얻는데 명이 있는 경우라면 구하는 것은 얻는데 무익하다. 구하는 것이 나 밖의
다른 것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스스로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있고, 스스로 구해도 남이 인정하는
등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게 있다는 말이 되겠다. 달리 말해
얻는데 작용하는 명이 구하는 일과 어긋나지 않기만 한다면 구하는 것은 얻는데
유익할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 되려 하는 것은 명에 어긋나지 않는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문화의 이동으로 세상은 이미 태평양 시대, 우리나라
시대를 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태평양을, 우리나라를 주목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 구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구하면 세계의 꽃으로 피어 인간의 가치가 중시되는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바로 세워 구하면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래도 구하는 일을 망설이고 주저하겠는가. 구하는 일은 언제나
누구에게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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